예르비에 대한 기대가 모두 사라진 날.

 

학회가 네덜란드에 있었으니 당연히 암스테르담 공연을 제일 먼저 찾아보았다. 하지만 일정에 맞는 공연은 몇개 없었다. DNO가 큰 오페라단이긴 하지만 유럽 메이저 오페라 극장에 비할 바가 못된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 레퍼토리 극장이 아닌 스타조네 형태로 운영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 처럼 매 프로덕션을 짧고 굵게 돌린다. 두 번의 주말 포함 10일 동안 오페라 공연이 하나도 없다니, 독일 극장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나마 콘세르트허바우에는 스케줄이 좀 있었다. 투간 소키에프가 RCO와 쇼10을 하는 공연이 있어서 예매했는데, 결국 쿠렌치스를 보기로 해서 이 티켓은 그냥 같이 학회에 가는 친구에게 주었다. 이걸 놓치고 나니 암스테르담에 두번 갔는데 공연을 한번도 못 보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 찜찜했지만 이 공연을 예매했다.

파보 예르비와 RCO, 거기에 랑랑의 조합이었다. 랑랑이 낀 덕택에 티켓값도 30유로 쯤은 더 비싸지고 티켓도 매진이라서 매일 모니터링하다 취소표를 겨우 구했다. 프로그램은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리고 브람스 교향곡 4번이었다.

 

 

나는 파보 예르비의 상당한 팬이었고 첫 세번 정도의 내한은 한 개의 공연도 빠짐 없이 다 갔었다. 프랑크푸르트 방송향, 파리 오케스트라, 그리고 도이체 캄머필 까지. 그렇게 베토벤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예르비의 내한 공연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 때 쯤이 아마 내가 본격적으로 교향곡보단 오페라에 집중하게 된 시기였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예르비는 오페라 고자다. 내가 예르비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던 데는 이 점이 클 것이다. 라 스칼라에서 돈 조반니를 올렸다고 알고 있는데, NHK향 인가와도 아마 콘체르탄테로 공연한 적이 있을 테다. 밀라노 공연은 못 봤지만 일본에서 한 공연은 한 때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 본 적이 있었는데 세상 끔찍한 노잼이었다. 거의 헬조센 모페라 반주 급. 베토벤이랑 슈만 교향곡을 그렇게 연주하는 사람이 모차르트는 이렇게밖에 연주 못하다니, 충격적이었다.

그 때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 날 RCO 공연에서 깨달았다. 이 탄호이저 서곡에는 영혼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노링턴이나 불레즈 처럼 기름기 뺀 담백한 이성적인 연주였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이 공허해보였다. 콘세르트허바우 공연장에 처음으로 와서 RCO를 듣는 이 벅찬 순간에도 조금의 감흥도 주지 못할 만큼 한숨이 나왔다. 프레이징에는 어떤 섬세함도, 경건함도 없었다. 그저 곡이 빨리 끝나기만 바라며 앞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내가 그동안 보던건 파보 예르비고 지금 포디엄에 서있는 건 그 짝퉁인 패보 재르비인 것일까.

랑랑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그래도 괜찮았다. 피협 2번은 그 동안 한 번도 공연장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수정: 2013년 하이팅크가 내한할 때 피르스의 둘째날 협연곡이 베피협2번이었다. 베피협 2번을 이렇게 무시하고 실았습니다...), 랑랑의 발랄한 스타일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예르비의 반주도 역시 내가 좋아하던 그 베토벤 교향곡을 지휘하던 예르비의 모습이었다. 랑랑은 연주도 연주였지만 특유의 제스처에서 음악의 표정이 다 드러났다. 

 

브람스 4번. 이게 도이체 캄머필이랑 하는 거였으면 좀 더 기대를 했을 텐데 RCO랑 하는거라 기대가 좀 적었다. 난 가디너 브람스도 좋아하고 로트 브람스도 좋아하기 때문에 비록 음반을 들어보진 않았지만 예르비의 브람스 교향곡도 취향에 맞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지휘자는 예르비가 아니라 짭인 패보 재르비가 맞는 것 같다. 바그너야 원래 오페라 고자니 말아먹을 수 있다곤 하지만 브람스를 어떻게 이렇게 연주하지. 템포만 빠르고 디테일이나 생동감 있는 프레이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으로 제발 좀 짚고 넘어가줘, 제발 좀 더 표현해줘라는 갈망이 샘솟는데 단 한번도 그걸 해소시켜주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달려나갔다. RCO 사운드가 예뻐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연주의 흐름에는 어떤 드라마도 없었고 냉철한 분석도 없었다. 내 눈에는 그저 매너리즘에 가득 차서 이 공연을 빨리 끝내고 퇴근하고 싶어하는 지휘자가 보일 뿐이었다.

 

잡설1. 콘세르트허바우 공연장은 오케스트라가 들어서면 무대가 꽉 차서 피아노를 옮길 길이 안보였는데, 무대 밑에서 승강장치로 올라오더라.
잡설2. 콘세르트허바우에서는 물과 커피 등 간단한 음료가 무료다. 공연 티켓값에 포함돼있다고 한다. 음료 주문하고나서 얼마냐고 물어보는데 It's free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한번 다시 물어봤다. 
잡설3. 지휘자와 협연자가 출입하는 그 악명높은 계단은 사진찍기 아주 좋은 장소다. 공연장에 일찍가서 홀 오픈하자마자 들어가면 마음껏 사진찍기 아주 좋다. 같은 학회에 참석한 (당시 기준으로 내 미래의 직장 상사가 되실) 오케스트라 선배님에게 이날 랑랑과 RCO의 공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바로 같이 가자고 하셔 함께 공연장에 갔다. 덕택에 오고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사진도 여러장 찍어드리고 내 사진도 남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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