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보리트(오페라니까 극 중 발음은 파보리테)는 도니체티의 그랑 오페라다. 2014년 잘츠부르크에 갔을 때 플로레스가 나오는 파보리트 공연이 있었다. 일정 상 보진 못했으나 오페라 제목은 기억하게 되었다. 벨 칸토 울렁증이 있는 나였지만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 영상물로 나오면 일단 호기심이 생긴다. 한글자막도 달렸고 캐스팅도 준수하고 표지가 예쁘길래 궁금해서 샀다. 생각해보니 이 작품도 세비야가 배경이라 세비야의 알카사르를 지나갈 때 이 곳이 파보리트의 배경이라는 설명을 본 기억이 난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처음부터 쭉 감상했는데 기대보다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랑 오페라 형식이지만 벨 칸토 오페라라고 분류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합창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고 발레 역시 삭제되었다. 때문에 공연 시간도 2시간 30분 가량으로(왜 184분으로 표기되었는지 모르겠다)  짧다. 아리아는 모두 전형적인 벨 칸토 아리아의 형식을 따른다. 기억이 맞다면 메조와 바리톤의 아리아는 템포 디 메조가 없는 구조로 카바티나를 부른 뒤 아무 사건 없이 카발레타로 넘어간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보긴 어렵지만 벨 칸토 오페라니 그려려니 하고 넘겨야겠다.


물론 그랑 오페라의 특징도 나타나있다. 일단 오페라의 내용이 역사적 인물인 카스티야의 왕인 알폰소 11세와 그의 애첩(la favorite)이었던 레오노르(엘레아노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비가 있는 상태에서 애첩을 둔 것이 귀족과 교회의 지탄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왕을 파면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배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음악 역시 훌륭하다. 브리튼을 듣고 난 다음에 이렇게 귀에 달착지근하게 감기는 선율을 듣고 있으면 내가 왜 여태 벨 칸토 오페라를 안 좋아했는지 반성할 정도이다. 1막 테너 주인공인 페르낭의 아리아에서부터 귀를 즐겁게 해주는데 2막 페르낭과 레오노르의 듀엣 역시 굉장히 아름답다. 3막의 경우 극적인 흐름이 자연스럽고 음악 구조 역시 다채로워서 하이라이토로 꼽을만 하다. 


테너 바리톤 메조 주역 3인방이 이끌어가는 형태의 오페라이기 때문에 가수들의 역량이 중요한 작품이다. 가장 뛰어난 사람은 이지에 쉬Yijie Shi다.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이집트의 모세 영상에서 아론 역으로 나와 인상깊게 들었던 가수인데 이번에는 주역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과연 프랑스어를 잘 할까 싶었지만 딕션도 상당히 괜찮다. 발음을 빨리 배우는 것도 재능 아닐까. 인터뷰를 보니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2주간 가사의 단어별 뜻과 발음기호를 받아적는 것으로 배역 연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로시니 테너를 많이 맡았던 만큼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시원시원한 고음을 내준다. 아, 다시 들어보니 목소리에 따뜻함이 있다. 달콤하다고 표현해야할까. 우리나라 테너 박지민 씨에게서 느꼈던 '멋진 목소리'와 비슷한 분위기다. 오페라 베이스를 검색해보니 유럽의 좋은 극장들에서 공연하고 있지만 아직 빅 네임 극장 출연은 별로 없는 것이 아쉽다. 아마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의 동양인이라는 점이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파보리트에서는 연기도 나쁘지 않다. 3막에서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절규하는 장면은 관객을 휘어잡는다. 귀족들에게 출신이 다르다고 무시받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동양인이라는 점이 더 극적으로 작용한다.  

아직 푸치니를 하긴 아쉽긴 하지만 목소리 하나 만큼은 훌륭하다. 파보리트에선 이것보다 좀 더 스핀토하게 소리낸다.



타이틀 롤에는 메조 소프라노 케이트 올드리치가 출연한다. 국립오페라단 카르멘에도 출연해서 직접 본 적이 있어 친숙한 가수였다. 노래나 연기가 부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긴 어려웠다.

바리톤 루도빅 테지에는 참 특이한 케이스다. 훌륭한 목소리에 프랑스인이니 딕션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감정의 표현이 부족한 걸까. 확실한 건 테지에가 연기는 참 못한다는 것이다. 얼굴 표정 변화 없이 항상 비슷한 표정만 짓고 있다는 점에서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가 맡은 알폰소 역이 왕이다보니 감정을 쥐어짜내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도통 극 내내 인물의 감정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연기가 부족하다. 저번 라 트라비아타 영상에서도 느꼈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셈이다. 연기 뿐만 아니라 노래 역시 아름답지만 감정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지휘 안토넬로 알레만디는 특별히 인상깊지 않았다. 


연출 뱅상 부사르Vincent Boussard는 꽤 훌륭하다. 프랑스 연출 특유의 아름다움이 무대에 묻어나있다. 시각적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이탈리아 연출과 비슷하지만 프랑스 연출은 어딘가 환상적인 부분이 있다. 이 연출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간단한 무대와 파스텔 톤의 배경, 다채로운 원색 조합의 드레스가 시각적인 만족을 주면서 동시에 의상의 스타일에서 환상성을 담아냈다. 남성복의 옷깃은 레이스가 반쪽만 달려있으며 여성들의 드레스도 기묘하게 비대칭적이다. 전체적인 스타일은 엘 그레코의 영향도 받았다고 한다. 


스페셜 피쳐로는 40분 가량의 지휘자, 주연 3인, 연출가, 의상 디자이너의 개인 인터뷰가 담겨있다. 


파보리트의 첫 불어판 영상물로서 훌륭한 퀄리티다. 가수들이 조금 아쉽다고 썼지만 도니체티의 작품 자체를 즐기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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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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