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크보다 무서운 벨리니
뭣 모르던 시절 듣던 음악을 몇년 만에 다시 들으면 그 때 이 음악이 왜 그렇게 어렵게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슈트라우스 살로메라든가, 베르크라든가.
하지만 여전히 가장 두려운 이름이 있다면 벨리니다. 모든 오페라 작품을 사랑하려 노력해보지만 벨리니 만큼은 너무 힘들다. 벨리니와 나의 악연은 2008년으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2학년 ~ 대학 학부 저년차 시절에 내가 감상하는 레퍼토리는 교향곡과 협주곡 정도에 치우쳐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오페라도 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오페라만 보면 너무 잠이 오는 거다. 사실 내가 초중등 학교 때 클덕질 비스무리한걸 처음 시작할 때 오페라 DVD를 사서 봤던 걸 생각하면 언제부터 오페라와 단절된 건지 나도 궁금하다.
여튼 잠이 오는 걸 참고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 아예 잠들기 전에 오페라를 보기로 했다. 그 때 선택한 오페라가 바로 벨리니의 청교도였다. 며칠을 시도한 끝에 난 청교도를 한 막도 다 못 본채 8년을 묻어두고 있었다.
8년 만에 다시 청교도를 보았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나와 가장 거리가 먼 오페라 작곡가가 벨리니라는 게 확실하다는 것만 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플로레스의 노래마저 벨리니의 음악 안에선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첫째, 극의 구조가 부실하다. 특히 극이 처음 시작하는 부분에선 어떠한 긴장감이나 방향도 전달하지 못한다. 결말 부분도 엉성한데, 특히 청교도나 몽유병 여인의 결말은 좀 심각하게 멍청하게 보인다.
음악은 또 어떤가. 로시니 특유의 활력이나 도니체티의 따스함 같은 매력을 찾압괴 힘들다. 반주 스타일은 베르디를 예고하지만 극적인 무게감에서 비교할 수가 없다. 아 물론 감각적 수준으로 듣기에는 괜찮은 음악이지만 3시간 동안 각잡고 듣게 만드는 무언가가 없다. 노래에서 반전이라든가, 예상을 깨는 진행이라든가, 분위기의 적절한 교차라든가, 그런 게 부족하다. 극의 진행이 밑받침 되지 않기에 엘비라의 광란의 아리아도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도니체티 루치아의 아리아도 상당히 긴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벨칸토 아리아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엘비라의 아리아는 구조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너무 길다는 인상이었다.
여기에 영상물의 조잡한 수준도 끔찍한 경험에 한몫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블루레이 비닐을 벗기기 전에 이 작품을 메트 꺼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메트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메트 같이 작위적인 카메라 각도를 보여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카메라 워크가 메트 전매 특허인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횡이동 하며 찍는 각도인데, 이 영상에서도 그 각도를 자주 활용한다. 거기에 무슨 측면이랑 후방 카메라까지 동원해서 온갖 괴상한 앵글을 다 보여준다. 카메라는 대체로 사이드에 많이 위치해있는데 무대 바닥이 수평 방향으로 나있기 때문에 이 앵글이 더욱 불편해진다. 여기에 클로즈업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걸 보면 딱 브라이언 라지 스타일이다. 거기다 샷 교체가 너무 빨라서 정신사납다. RAI에서 찍은 것 같은데 감독 이름은 안드레아 베빌라쿠아Andrea Bevilacqua니 앞으론 꼭 피하도록 하자. 영상이 진짜 짜증날 정도로 조잡해서 연구 주제로 오페라 영상을 분석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화면 분석에서 쓰는 것 처럼 화면에서 가수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 샷 교체 빈도, 카메라의 이동 속도와 줌 속도, 카메라와 무대의 앵글을 바탕으로 분석하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녹음 상태도 조악하다. 가수의 소리는 멀리서 잡았고 오케스트라는 너무 가까이서 잡은 듯 하다. 지휘는 미켈레 마리오티가 맡았는데 마리오티 특유의 날카로운 음향이 여기선 너무 날이 선 느낌으로 들린다. 거기다 단순한 반주 패턴이 소리를 지배하다보니 더욱 지루해진 경향이 있다. 마리오티가 투티를 가벼우면서도 깔끔하게 가져가는 것은 좋지만 레치타티보를 반주할 때 긴장감 없이 너무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수 중에선 플로레스와 마차이제가 발군의 실력을 뽐내지만, 바리톤과 베이스는 기대 이하다. 특히 다르칸젤로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는데, 아름답지도 않은 목소리, 그렇다고 매력있는 것도 아닌 프레이징, 여기에 언제나처럼 딱딱한 연기까지 모든 면에서 평균 이하의 모습이다. 애초에 다르칸젤로가 바리톤과 대비될 만한 베이스가 아니고 벨칸토와 어울리는지도 잘 모르겠다. 평소부터 다르칸젤로가 왜 그렇게 인기 있나 이해를 못하는 편이지만 무난한 가수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선 더욱 실망이다.
연출은 그냥 예-쁜 이탈리아 연출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떻게 벨리니의 극을 어떠한 연출력도 없이 감상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파스타 면을 삶아서 어떤 소스도 없이 바로 먹으면 이런 기분일까.
이렇게 난 벨리니와 또 한걸음 멀어져 갑니다. 언젠가 이 글을 보면서 벨리니를 저평가한 거에 대해 부끄러워서 이불킥을 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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