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캐스팅으로 빛난 로시니 정극의 걸작
프레스토 블루레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들어있길래 항상 궁금했다. 에라토는 디도나토나 드세이, 담라우와 같은 걸출한 가수가 출연한 오페라를 비교적 싼 가격에 내놓는다. 부가 영상이나 자세한 부클릿 노트가 없다는 건 조금 아쉬운 점이지만 메이저 레이블 답게 쟁쟁한 공연들을 발매했다. 아 그러고보니까 부가 영상이 있는데 메트라서 제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공연 역시 캐스팅에서부터 이 작품 최고의 레코딩을 선보이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로시니 오페라에서 디도나토, 플로레스의 투 톱은 흥행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취리히에서 바르톨리와 로시니 오텔로를 공연했던 존 오스본이 로드리고로 나오고 디도나도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현재 가장 괜찮은 클래스의 메조 소프라노라고 할 수 있는 다니엘라 바르첼로나가 말콤을 맡았다. 지휘는 가벼운 이탈리아 오페라를 맛깔나게 잘하는 미켈레 마리오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수 개개인의 기량보다 작품의 신선함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물론 로시니의 워터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작품이지만 그가 정극을 다루는 세련된 솜씨를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디도나토는 열심히 변호하지만, 리브레토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한 명의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대결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고 각자의 아리아는 개별적으로 고립되어있다는 인상을 준다. 일단 이 네명이 한꺼번에 등장하여 노래하는 부분이 없다는 건 감점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극을 다루는 능력은 역시 중창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1막 피날레에서 말콤이 등장하여 로드리고와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은 로시니 치고 상당히 복잡한 음악을 들려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압권은 2막에 등장하는 엘레나, 로드리고, 우베르토의 삼중창이다. 처음 듣는 작품에서 이렇게 마음을 뺏기는 건 오랜만이다. 일단 처음에 두 테너를 같은 선율로 결투를 벌이게 하는 아이디어는 정말 효과적이다. 오텔로에서 테너를 세 명이나 쓰는 걸 보고 로시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 장면에서 두 테너가 하이 C를 두고 경쟁적으로 노래하는 장면은 말그대로 성악적인 결투가 된다. 그 노래가 발전하여 끝으로 치닫는 장면 역시 장엄미가 넘쳐난다. 로시니가 벨 칸토 오페라에서 어떻게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2011년 라 스칼라에서 같은 캐스팅으로 노래하는 장면. 가수 입장에서 자기가 부른 선율을 그대로 플로레스가 따라 부르면 어떤 기분일까. 페북에서도 꼭 한번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역 네 명 모두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엊그제 바르톨리를 들은 입장에서 디도나토는 그저 괜찮은 메조 소프라노로 들리고 플로레스의 노래도 노쇠함이 조금 엿보여 가슴이 아프다. 오스본은 멋진 고음을 들려주지만 바로 뒤에 플로레스가 고음은 이렇게 내는 거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바람에 비교를 피할 수가 없다. 바르첼로나는 힘있는 목소리와 모범적인 표현으로 노래한다. 빌바오에서 직접 본 후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메조 소프라노다.
연출은 스코틀랜드인 폴 커런Pual Curran이 맡았는데 정말로 메트스럽다.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메트스러울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예쁜 뒷배경, 자연주의적인 무대, 가끔 등장하는 신기한 무대 변환. 메트에서 공연했던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와도 비슷하고 맥비커 연출의 일 트로바토레와도 비슷하다. 아 지라르 연출의 파르지팔과도 비슷하다. 연출가의 국적과 상관없이 메트에 맞는 연출이 나오는 것 같다. 이것도 메트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미켈레 마리오티는 통통 튀는 로시니를 잘 만들어낸다. 엔리케 마촐라의 잘 가공되고 세련된 음색과는 차이가 좀 있다. 대체로 각각의 음 입자가 많이 살아있는 편이다. 전체적인 느낌은 괜찮지만 번뜩이는 순간은 찾아보긴 힘들다.
잡썰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리스어 자막이 들어가 있다. 독일어 자막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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