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부터 페르골레시를 열심히 빨겠다고 선언한다. 페르골레시는 모차르트, 바그너, 베르디, 푸치니와 같은 반열에 두어야 하는 천재다.
주체할 순 없는 감격이다. 말도 안되는 경험이다. 내가 종종 이야기 했듯 내가 처음 듣는 오페라를 재밌게 본다는 건 어지간해선 잘 없는 일이다. 중간중간 아름다운 장면에서 마음을 뺏기는 일은 많지만 그런 오페라에서도 지루해서 정신을 놓는 부분도 많다. 그런데 오늘 페르골레시의 오페라를 보면서 모든 아리아를 열중해서 들었으며 새로운 노래가 나올 때마다 페르골레시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헨델 오페라 처럼 초인적인 기교 때문에 정신을 번쩍차린 것도 아니고 귀에 익숙한 선율이 나와서 집중한 것도 아니다. 처음 듣는 선율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우며 완벽하게 설계돼있다.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바로크와 고전의 매력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히려 본질적으론 고전에 가깝다. 일단 다른 바로크 오페라와 달리 아주 규칙적인 프레이징 단위를 가지고 있다. 바로크 음악은 빠른 음악이든 느린 음악이든 '부유'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언제나 명확한 프레이징을 보여준다. 때문에 프레이즈를 이루은 마디 수가 불규칙적인 때가 있더라도 그 변화를 훨씬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4마디 단위로 가다가 여기선 3마디 단위로 가는구나, 여기선 다른 느낌의 2마디가 덧붙은 거구나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에 아리아 형식도 훨씬 다채롭다. 다카포 아리아인가 싶었는데 론도 형식에 가까운 노래도 있고 뜬금없이 불어로 부르는 짧은 노래도 있고 A - B 형식으로 끝나는 노래도 있다. AABA라고 생각했는데 B파트가 A의 발전인 경우도 있다. 모든 아리아의 구조 분석을 해보고 싶을 만큼 모든 노래들이 개성이 넘친다.
형식이 비전형적으로 보이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한 노래 안에서 대비되는 선율이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카포 아리아에서 A - B - A가 완벽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A와 B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하고 A안에서 음악이 완전히 통일되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A-B간의 대비 자체보다는 A에서의 통일성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A와 B가 거의 같은 분위기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B를 놓치지 않는 이유는 A가 뚜렷하게 하나의 선율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 완전히 대비되는 느낌의 선율이 중간중간 등장하기 때문에 "어라 여기서 새 부분이 시작한건가?"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생길 수 밖에 없다. 소나타 형식에서 1주제와 2주제가 뚜렷이 구분되듯 페르골레시의 음악 안에서는 잠깐 다른 조성이나 다른 분위기의 선율이 등장한다. 가사의 내용에도 충실하며 듣는 사람을 훨씬 더 집중하게 만든다.
느린 노래에서도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확실한 마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다가 특정 음정을 곡의 모티프처럼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아스카니오의 첫 아리아를 보면 전타음을 어떻게 곡 전반에 걸쳐 활용해서 처음 듣는 사람의 귀에도 강렬히 꽂히게 하는지 잘 보여준다. 단조 선율이 중간에 잠깐 장조로 바뀌는 부분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가.
이 모든게 1732년의 오페라에서 이루어져 있다. 줄리오 체사레가 1724년 작품이고 알치나가 1735년 작품이다. 글루크 오르페오가 1762년 초연이니 30년은 앞서가 있다. 물론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단순히 음악사적 가치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음악 자체가 역사의 앞이나 뒤에서 찾을 수 없는 페르골레시만의 매력이 있다.
가수들은 평범한 편이지만 반주는 기가 막힌다. 파비오 비온디가 에우로파 갈란테를 이끌었다. 비온디가 오페라를?? 엊그제 안토니니가 줄리오 체사레를 말아먹은 걸 생각하면 걱정이 될수 밖에 없었다. 안토니니는 그래도 오케스트라 지휘도 많이 하지만 비온디는 그렇지도 않다. 둘다 좁은 오페라 레퍼토리를 자랑하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노르마를 한적이 있다. 안토니니의 노르마는 아직 안 들어봤지만 비온디의 노르마는 상당히 놀라웠다.
비온디는 지휘봉 대신 바이올린을 직접 들고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안토니니와 달리 비온디는 오케스트라 반주 자체가 곧 오페라가 되도록 이끌어나간다. 에우로파 갈란테는 시종일관 가수와 동등한 비중으로 소리를 낸다. 여기에 비온디는 앙상블이 어떻게 프레이징 해야할지를 확실하게 표현한다. 모든 프레이즈는 또렷이 구분되어 고유의 늬앙스를 가지며 간혹 포인트를 줘야할 부분이 어디인지도 분명하다. 여기에 가사나 음악의 흐름에 맞게 자연스러운 루바토를 구사하는데 이 부분도 맛깔난다. 비온디랑 에우로파 갈란테를 감금해서 페르골레시 오페라 전집을 녹음시키고 싶다.
오페라 제목이 Lo frate 'nnamorato라서 옛날 이탈리아어인가 보다 했는데,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나폴리어라고 한다. 그냥 들었을 때는 당연히 이탈리아어라고 생각하고 어미 변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사하다.
사실 리브레토 내용은 좀 허접한 편인데 오페라 부파의 '필수 요소'가 이때부터 나타난다는 점은 재미있다. 남자를 가지고 노는 두 하녀, 여기에 마지막에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 '사랑에 빠진 오빠'가 누구일지 헷갈렸는데 마지막에야 밝혀진다. 역시 제목이 스포일러라는 법칙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페르골레시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올림피아데였다. 그게 아마 내가 처음으로 본 오페라 세리아였는데, 그 때도 음악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여태 페르골레시를 찾지 않았던 게 후회될 정도다. 다행히 YES24에서 블루레이 떨이를 할 때 페르골레시 두 개를 집어놓았다. 앞으로 페르골레시 작품을 더 열렬하게 파야겠다.
Pergolesi의 정식 표기는 '페르골레시'인데 보통 '페르골레지'라고 쓴다. forvo 발음은 분명하게 '시'로 나는데 위키피디아 발음기호는 'zi'로 되어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헷갈리면 페르골레갓이나 갓갓갓갓갓으로 써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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