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자존심을 보여주려다 한계만 보여준 공연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파르지팔을 보았다. "로얄 오페라 코벤트 가든이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집대성하여 이 위대한 걸작에 도전하였다." 라는 광고문구라니.
말은 바로 하자. 모든 역량을 집대성한 게 아니라 영국의 자존심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 거겠지. 지휘 파파노, 연출 스티븐 랑그리지, 암포르타스 제랄드 핀리, 클링조르 윌라드 화이트, 티투렐 로버트 로이드. 딱 봐도 영국인으로 가득가득 채워넣었다. 뉴질랜드 출신인 사이먼 오닐도 영연방으로 치면 한명 더 추가.
그리고 이 사람들이 공연을 다 망쳤다. 일단 파파노 이야기부터 하자. 올해 런던에서 본 마지막 공연이 파파노와 런던 심포니의 엘가였다. 후기를 공항에서 올리려다 마지막 순간에 인터넷 접속이 끊겨서 그냥 포기했었는데, 그날 공연은 충격적이었다. 파파노가 이렇게 구리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블로그에 올리겠지만 (벌써 4달이 다 지나가지만) 실연을 보고 이렇게 실망한 지휘자는 처음이었다.
파파노의 사전에 완급조절이란 건 없다. 오케스트라를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는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포르티시모만 나오면 시종일관 총력전을 펼치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피아노에서 선율적인 장면을 잘 살리는 편이지만 다시 포르테가 나오는 순간 정신줄을 놓고 오케스트라를 윽박지른다.
이런 개성이 바그너에서는 정말 최악으로 발현된다. 곳곳에서 밸런스를 잃어버린 채로 엄청난 포르테를 뽑아낸다. 음악은 신경질 적이고 듣는 이를 피곤하게 한다. 4시간 30분의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데 머리 속에는 전력질주 밖에 없다. 더욱이 파르지팔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사운드를 사용한 유일한 오페라 아닌가. 바이로이트의 신비롭고 먹먹한 사운드의 대척점에 파파노가 있다. 금관악기가 포효하고 현악기는 물어뜯는 사운드 말이다.
모든 포르티시모가 같다면 클라이막스라는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바그너에서 느끼는 그 황홀함이 삭제된다. 내가 세상에 음악 들으면서 틸레만을 그리워하게 될줄이야. 틸레만이 바그너를 지휘하며 매순간 유혹당하고, 그 지점에 다다르지 않기 위해 애쓴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파파노는 훌륭한 실패 사례를 보여준다.
여기에 가수들도 훌륭한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사이먼 오닐? 물론 서울시향과 발퀴레에서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파르지팔을 맡기에 그 목소리는 너무 가볍고 간사하게 들린다. 카우프만이 암포르타스!라고 외칠 때의 느낌에 비하면 사이먼 오닐의 목소리는 초등학생 수준이다. 르네 파페는 과연 세계 최고 스타라는 이름에 걸맞는 실력인지 이제 슬슬 의심이 생긴다. 파페의 노래를 들으면서 차라리 제펜펠트였다면 훨씬 더 긴장감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연광철이었다면 훨씬 더 단단한 노래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안겔라 데노케Angela Denoke는 슈투트가르트 반지에서 지클린데를 잘 불렀던 기억이 남아있지만 쿤드리로선 그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세 명은 뛰어나지 않다 뿐이지만, 영국인 두 명은 상당히 부족하다. 암포르타스의 제럴드 핀리는 내가 참 좋아하는 바리톤이지만 암포르타스는 좀 아니다. 특유의 연기력으로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정말 열심히 표현하지만 정작 노래로는 그 고통이 잘 표현이 안된다. 여기에 핀리는 애초에 성량이 큰 가수도 아니며 바그너를 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다. 어느 한순간 감정이 폭발해야하는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다. 여기에 윌라드 화이트는 클링조르의 성격을 표현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두텁고 둥글다. 게다가 다들 연기파 가수이지만 어째서 이렇게 재미없는 노래만 들려주는지. 파파노는 가수들에게 표현할 여유 공간 조차 주지 않는 것 같다.
핀리와 비교를 위해 슈트루크만의 암포르타스.
티투렐 역의 로버트 로이드는 최고의 바그너 베이스 중 한 명이었지만 73세의 나이로 무대에 서는 건 쉬운게 아니다. 10년만 더 젊었으면 이야기가 달랐을텐데, 티투렐 답게 다 죽어가는 노인을 노래한다.
여기에 스티븐 랑그리지Stephen Langridge의 연출도 효과적이지 않다. 사실 헤어하임을 제외했을 때 파르지팔에서 대단한 아이디어를 갖춘 연출이 뭐가 있겠냐만, 이 연출은 표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꽤 있지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파르지팔을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적인 관점으로 환원하려는 방식이며,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파르지팔을 만드려고 노력한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성배 장면에서 성배를 상징하는 어린 남자아이의 몸에 상처를 내고 상처입은 아이를 피에타 자세로 껴안고 의식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때 파르지팔이 느끼는 동정심은 암포르타스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기사단에게 무자비하게 이용당하는 어린 아이에 대한 것이다. 상당히 괜찮은 해석이다. '파르지팔이 암포르타스에게 동정심을 느껴야하는가'는 조금 복잡한 문제이지만 '외부인인 파르지팔이 기사단 내의 부조리로 희생되는 남자 아이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훨씬 현대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 어떤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정작 가장 수수께끼 같은 2막은 전혀 변화가 없고 암포르타스를 외치니 1막의 컨셉을 이어받지도 못한다. 3막의 결말은 나름대로 신선한 편이지만 놀랍거나 감동적인 것 과는 거리가 있다. 가장 큰 결점은 영국 연출답지 않게 연기의 방향성이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다. 파페는 시종일관 방관자 처럼 존재하며 핀리는 너무 심할 정도로 고통만 강조한다. 암포르타스를 가지고 pain porno 느낌이 나게 만들었는데,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그렇게 연기로 강조한다고 해서 관객이 무슨 감흥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로열 오페라에서 올린 공연 중 가장 실패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5할 이상은 파파노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오케스트라 앞에서 제대로 노래할 수 있는 가수는 없을 거다. 이번에 나오는 ROH Cav/Pag나 안드레아 셰니에도 파파노가 맡았는데 아마 이렇게 때려부서도 상관없는 베리즈모가 그나마 파파노에게 어울리는 레퍼토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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