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영상이 많지 않은 가운데 바렌보임 지휘, 체르냐코프 연출의 프로덕션이 영상물로 발매된 것은 정말로 반가운 일이다. 내가 알기로 림코 오페라 블루레이가 이것 외에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츠의 전설>만 있을 텐데 이 영상 역시 체르냐코프가 연출을 맡았다. 블루레이로 발매된 러시아 레퍼토리 중 또 빼놓을 수 없는게 메트 <이고르 공> 영상인데 이 역시 체르냐코프가 연출을 맡았으니 메이저 극장에서 체르냐코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차르의 신부는 1899년 초연된 작품으로 림코의 10번째 오페라다. 줄거리부터 짧게 요약해보자. 주인공은 그리고리 그랴즈노이Grigory Gryaznoi로 이반 뇌제의 친위대인 오프리치니크의 일원이다. 부인 류바샤Lyubasha가 있지만 다른 여자인 마르파에게 반해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마르파는 이미 그리고리의 절친이자 다른 오프리치니크인 이반 리코프Ivan Lykov와 약혼한 사이다. 그리고리는 심지어 자기가 리코프 들러리를 서주겠다고 하는 상황. 그리고리는 마르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금술사인 보멜리우스에게 사랑의 묘약을 부탁한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된 류바샤는 마르파의 아름다움을 빼앗기 위해 보멜리우스에게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조건으로 마르파를 서서히 죽일 독약을 얻어낸다. 류바샤는 자신의 약을 그리고리의 약과 바꿔치기하고 그리고리는 이를 모른 채 리코프와 마르파의 결혼식에서 마르파의 잔에 약을 넣고 마르파는 이를 마신다. 여기까진 흔한 막장극인데, 여기서 뭔가 맥거핀스러운 게 등장한다.  차르의 전령이 와서 마르파를 차르의 신부로 삼겠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사실 결혼식 전부터 차르가 신부감을 찾고 있으며 마르파도 그 후보였지만 사람들은 모두 마르파의 누이인 두냐샤가 신부로 간택됐다는 소식만 들었었다. 마르파가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 갑자기 결정이 바뀐 것. 이에 마르파의 신랑인 리코프가 멘붕한다. 마르파는 마르파대로 류바샤의 독약을 먹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그리고리는 이게 다 리코프가 마르파에게 독약을 먹여서라고 주장해 리코프를 처형시킨다. 리코프가 죽자 마르파도 같이 멘붕. 마르파가 멘붕하는 걸 보고 그리고리도 멘붕해서 "왜 묘약을 먹었는데 날 좋아하질 못하니!!"라며 자신이 사랑의 묘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털어 놓는다. 그걸 듣고 또 류바샤가 나타나서 "그 약 사실 내가 바꿔치기함ㅋ"이라고 또 다시 부부 동반 자폭을 보여준다. 그리고리는 빡쳐서 류바샤를 찔려 죽이고, 마르파 역시 정신이 나가서 그리고리를 리코프라고 생각하면서 죽는다. 결국 제일 나쁜 그리고리 혼자 살아남고 끝남.


체르냐코프의 연출에서는 그리고리만 살아남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지 그리고리가 자살하는 장면을 추가하고 마르파가 죽는 장면은 생략했다. 


<차르의 신부>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정작 차르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다 마르파가 차르의 신부로 간택된다는 것도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다. 마지막에 죄책감에 자신의 범죄를 술술 털어놓는 건 도스토옙스키 이후 러시아인의 오랜 전통이라도 되나보다. 아 그리고 오페라에서 자꾸 사람들이 서로 이름, 성, 부칭, 애칭을 섞어서 불러서 꽤나 헷갈리게 만든다.


음악은 1899년 초연이란 점을 생각했을 때 좀 보수적인 편이다. 위키를 보니 림코가 이 작품을 작곡할 때 바그너의 대척점에 서는 작품을 의도했다고 한다. 아리아의 전후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독립된 편이며 삼중창 규모의 앙상블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특이하게 1막에 류바샤의 무반주 아리아가 있다. 중간에 간주 부분을 제외하면 아예 반주가 없다. 딱 듣는 순간 "이걸 쓰면 가수 목소리 분석할 때 소스 세퍼레이션 안 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왠지 좀 서글퍼졌다.


 전반적으로 키테츠를 처음 들었을 때는 간지가 폭발한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차르의 신부는 조금 애매했다. 작품의 내용도 완전한 비극이라고 하기에는 좀 가벼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림스키코르사코프 특유의 세련된 관현악법이 빛나는 순간도 많고 아름다운 선율도 상당히 많이 등장하지만 극과 충분히 결합되어있다는 인상이 부족하다. 거기다 선율이 대체로 단조롭고 반복이 많다는 점에서 푸치니와 비교당할만 하다.


체르냐코프는 이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와서 차르를 방송국의 산물로 만들어낸다. 첫 서곡 때부터 가짜로 차르를 만들어내자는 메일을 주고받는 영상을 보여준다. 꽤나 매력적인 설정이지만 이 작품 자체에서 차르의 역할이 조금 애매한 와중에 이런 설정 변화가 별다른 역할을 못한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차르가 작품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거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얘가 있지도 않은 가짜라면 어떨까'라는 상상력은 적중하는 듯 하지만 그게 다른 장치로 이어지지는 못 한다는 점이 아쉽다. 거기다가 그리고리와 리코프 등의 귀족 계층이 이 연출에서는 방송국 직원들로 나오며 방송국에서 차르 영상을 합성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그럼에도 차르가 신부를 선택한다는 걸 진짜처럼 받아들이는 것, 특히 자신의 신부를 빼았기는 리코프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은 좀 어색해보인다.


하지만 무대 안에 벽을 하나 더 세워 가정집 같은 실내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게 만드는 무대 디자인은 체르냐코프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다. 방송국의 회전 무대 역시 잘 설계돼있다.


바렌보임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얼마나 잘 어울리려나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바렌보임의 장기는 여기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육중하게 현을 물어뜯는 저음 현악파트의 소리는 포디엄 위에 바렌보임이 서있다는 걸 숨기지 못한다. 어떻게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전력투구 하게 만들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걸 듣고나니 베를린 슈타츠오퍼 공연 중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진주조개잡이를 애초부터 제꼈던 걸 다시 고민해봐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빛나는 건 그리고리 역을 맡은 요하네스 마르틴 크렌츨레Johannes Martin Kränzle다. 내가 볼 때마다 감탄하는 가수로 올해 바이로이트에서 베크메서를 부른다. 크렌츨레는 일단 연기력이 단연 압도적인 수준이다. 다른 가수들 보면서 연기가 괜찮네 마네 하는 게 부질없다. 연기력이라는 게 오페라 가수를 평가하는 데 부차적인 요소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가수다. 내가 반지를 보면서 군터가 진주인공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가수다. 이 작품에선 마르파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하며 자신의 친한 친구를 배신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악한 인간을 보여준다. 연기 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모든 출연진 중에 가장 압도적이다. 목소리에 실려있는 힘이 점점 빛을 발한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내가 밀고 있는 '발음은 잘하는 사람이 잘한다'라는 설에 딱 맞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나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명확한 딕션을 선보인다.


타이틀 롤을 맡은 가수는 러시아의 떠오르는 신성 올가 페레탸트코Olga Peretyatko다. 페레탸트코를 처음 마틸데 디 샤브란에서 봤을 때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페레탸트코가 가벼운 로시니를 벗어나 점점 무거운 역할로 진화하는 모습을 기대해왔다. 하지만 차르의 신부에서 보여주는 페레탸트코의 기량은 조금 아쉬운 편이다. 러시아 출신이라는 국적 어드밴티지보다 그 동안 놀던 영역이 로시니였다는 전공 디스어드벤티지가 더 커 보인다. 물론 마르파의 성격 상 청순가련형 소프라노가 맡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다들 강렬한 목소리로 휘어잡고 있는 와중에 타이틀 롤의 무게감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페레탸트코를 잡아먹는 가수가 바로 류바샤 역을 맡은 메조 소프라노 아니타 라흐벨리쉬빌리Anita Rachvelishvili다. 요즘 카르멘과 암네리스 역할로 탑 티어에 드는 가수로 이 구역의 나쁜년 역에 최적화 된 가수다. 메타 지휘 라 스칼라 아이다에서 암네리스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류바샤는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빼았긴다는 점에서 암네리스와 닮아있는데 자주 해본 역할인 것 마냥 표현이 잘 어울린다. 다만 러시아어를 잘할 것만 같은 이름과는 달리 러시아어 발음이 좀 뭉개지는 편이다. 찾아보니 조지아 태생이다.


그 외에 빛나는 가수로 마르파의 예비신랑 역인 이반 리코프 역의 파벨 체르노흐Pavel Černoch 가 있다. 약간 자루스키 닮은 듯한 외모로 쿠렌치스 지휘 차이콥스키 욜란타와 헤어하임 연출 루살카에서 왕자 역할을 맡아 잘 기억하고 있는 가수다. 동유럽 출신답게 훌륭한 딕션과 러시아 적으로 시원스럽지만 감정이 잘 실린 가창을 선 보인다. 


바렌보임의 인맥 자랑으로 70세가 넘은 은퇴한 안나 토모와신토우Anna Tomowa-Sintow가 등장한다. 생각보다 노래 파트가 적지 않은 배역을 맡아 괜찮은 노래를 둘려준다.


출연진만 보면 별 다섯개를 먹고 갈 만한 타이틀이지만 작품 원판도 그렇고 연주도 그렇고 조금씩 아쉬움이 남는다. 벨에어 답게 추가 영상도 없고 부클릿에도 시놉시스만 딸랑 적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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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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