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는 정말 S급 극장이 맞는 걸까?
괴츠 프리드리히 연출에 벨저뫼스트의 지휘.
내가 가는 주를 라이프치히에서 울프 셔머가 알슈 주간으로 정해 금토일에 아라벨라-무영녀-살로메를 연달아 한다. 세가지 중 하나를 고르자면 가장 길고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무영녀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구레의 노래와 날짜가 겹치기 때문에 아라벨라를 선택했다. 사실 슈트라우스 오페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가 아라벨라이기도 하다. 장미의 기사도 아름답지만, 멋진 바리톤이 소화하는 아라벨라는 다른 오페라에서 보기 힘든 희열을 전해준다.
결국 돈 많은 남자가 몰락한 가문의 딸과 눈 맞아 결혼한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는 다른 오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연애와 관련된 심리 묘사가 잘 나타나있다. 타이틀 롤은 아라벨라지만 결국 가장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 건 만드리카다. 1막에서 아라벨라의 집에 찾아가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 2막에서 아라벨라에게 수줍게 말을 거는 장면, 아라벨라의 배신을 의심하며 폭발하는 장면, 3막에서 모든 사실을 알고 후회하는 장면까지, 만드리카는 바리톤의 모든 것을 표현하게 해주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마지막에 물 한잔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정화되는 것 역시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걸맞는 엔딩이다.
옛 거장인 괴츠 프리드리히의 연출은 생각보다 현대적인 느낌이다.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조명의 사용이나 은은하게 사용되는 프로젝션 배경 등이 극에 잘 어울리는 것이 음악과 인물의 심리를 잘 고려한 연출이라고 본다. 2막의 파티장 역시 너무 사치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벨저뫼스트의 지휘는 윤기 없이 거칠게 느껴진다. 건조한 녹음 환경 때문에 특히 도드라지는 것 같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선율은 푸석푸석하게 느껴져 슈트라우스 특유의 부풀어오르는 황홀경과는 거리가 멀다. 종종 단단하게 뭉치는 앙상블에서 벨저뫼스트의 장기가 발휘되는 듯 하지만 아라벨라는 기본적으로 그런 음향이 자주 나오지 않는 작품이다. 5년 뒤 빈 슈타츠오퍼에서 지휘를 맡았던 공연에서는 벨저뫼스트가 각성을 한 건지 아니면 빈필 빨을 받아서인지 단점은 감춰지고 장점만 부각됐는데 취리히에서는 단점만 남아있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각각 따로 튀기만 하고 너무 블렌딩 되지 못한 것이 패착인 듯 하다.
프클에 등록된 아라벨라 영상물이 다섯 개 뿐인데, 그 중 숄티가 한 개고 틸레만과 벨저뫼스트가 각각 두 개를 남겼다. 틸레만 메트 지휘는 어땠을 지 궁금하다.
르네 플레밍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은 슈트라우스라고 생각한다. 독일어 가사를 연극적으로 전달해야하는 비중이 높은 슈트라우스의 작품에서는 느끼한 프레이징이 훨씬 덜 드러난다.
만드리카를 맡은 덴마크의 베이스 바리톤 모르텐 프랑크 라르센Morten Frank Larsen은 상당히 특이하다. 첫 등장에서 섹시한 R발음을 들려주며 매력을 발산한다. 딕션이 명확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은 느낌이지만 어차피 만드리카는 크로아티아 사람이니까 발음이 좀 투박해도 상관없잖나. 1막 만드리카의 노래를 단단하며 비브라토를 절제한 소리로 쭉 불러내는데 이렇게 멋진 장면이 나올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다만 뒤로 가서는 노래가 딱딱한 느낌이 남아있는 게 좀 아쉬웠다. 아라벨라를 세 번째 보는 건데, 1막 만드리카의 노래는 언제나 감동 그 자체였다. 그 때마다 가수가 쩐다고 생각했는데, 이 쯤 되니 그게 가수빨이 아니라 순전히 슈트라우스 빨이었구나 깨닫게 됐다. 알고보면 누가 불러도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법의 장면이었던가.... 가수 얼굴이 익숙하다 했는데 플레밍이 나온 메트 카프리치오에서 백작역으로 나왔다.
즈덴카 역에는 요새 한창 잘 나가는 율리아 클라이터Julia Kleiter가 나온다. 고구마를 목구멍에 억지로 쑤셔넣는 3막에서 즈덴카의 입장은 갈등을 해소하는 사이다 같은 장면인데, 이 공연에서는 음악적으로도 사이다였다. 청량한 음성, 여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비브라토로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준다.
마테오 역으로 나온 요한 바이겔Johan Weigel의 목소리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만큼 초점이 없어 3막을 듣고 있기가 괴로웠다. 마테오보단 작은 역할이지만 엘레머를 맡은 페터 슈트라카Peter Straka 역시 딱딱하기 그지 없는 노래를 들려준다.
취리히 전속 가수인 듯한 알프레드 무프Alfred Muff가 아라벨라의 아버지 발트너 백작으로 나온다. 이 공연에서 흠잡을 곳이 없는 몇 안되는 가수다. 목소리나 연기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2막의 활력소 피아케르밀리 역을 맡은 소프라노 센 궈Sen Guo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이 의례 갖는 광폭한 비브라토가 없는 가수라 마음에 들었다. 현재 취리히에서 콜로라투라를 전담하고 있는가보다.
음정이 좀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너무 내지르지 않으면서 컨트롤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나 가수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취리히 극장의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스타 가수들을 캐스팅해오는 능력은 확실하지만 내실있는 안정성이 부족한 느낌이다.
짤: "마테오 너가 나랑 결혼할 확률은 존나 이만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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