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예술가들의 파리 습격.



줄거리 요약

게르만이 리자를 사랑함. 리자는 돈 많은 옐리츠키 공작과 약혼한 상태. 게르만은 리자에게 열렬히 구애해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돈이 없음. 돈을 얻기 위해 도박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의 세 카드를 알고 있는 리자의 할머니를 협박함. 할머니는 놀라서 죽지만 게르만의 꿈에 나타나 비밀을 알려줌. 리자는 게르만이 카드의 비밀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며 절규. 게르만은 이미 정신을 잃고 도박장에 가서 자신의 모든 돈을 걸지만, 옐리츠키 공과의 대결에서 세번째 카드인 에이스를 내는 대신 실수로 스페이드 퀸을 내버려 돈을 잃음. 카드에 그려진 스페이드의 여왕이 자신을 보며 비웃고 있자 자살.


<스페이드의 여왕>이 얼마나 쩌는 작품인지는 저번 리뷰에서 서술한 적이 있다. 부클릿에서 읽은 이야기 몇가지. 마린스키 극장장이 푸쉬킨의 단편 소설을 오페라로 만들기로 마음 먹고 차이콥의 동생 모데스트에게 리브레토를 부탁하고 차이콥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하지만 차이콥은 작품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거절. 그래서 클레놉스키Klenovsky에게 작곡을 의뢰하게된다. 당시 극장장은 프랑스 그랑 오페라 뽕을 거하게 마신 상태. 거기다 푸쉬킨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이미 유진 스크리브의 리브레토에 할레비가 1850년에 오페라로 발표한 바 있다. 클레놉스키는 이런 전통을 따라 들리브의 <라크메>를 롤모델로 작업한다. 하지만 극장장은 좀 더 대단한 작품을 원했고 '러시아의 카르멘' 같은 오페라를 만들고 싶어했다. 결국 다시 차이콥에게 애걸해서 그를 설득한다. 당시 차이콥이 쓴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기대한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두 번째 부탁까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작품이 맘에 안든다고 츤츤댔던 차이콥이지만 정작 다 쓰고 나선 "내가 미쳤거나 이 작품이이 걸작이거나 둘 중 하나다" 라고 자평했다. 마지막 게르만(헤르만)의 죽음 장면을 쓰고 나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이 오페라가 초연된 지 3년이 조금 되기 전 차이콥이 사망하는데, 푸쉬킨 역시 <스페이드의 여왕>을 출판하고 딱 이 맘때 쯤 죽었다고 한다. 


두번째 보는 것이지만 정말 빼놓을 것 없이 격정적이고 폭발적인 작품이다. 모든 프레이즈가 차이콥이라고 외치고 있다. 오페라가 감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스페이드의 여왕>은 최고의 오페라다. 오네긴을 본지 오래돼서 차이콥 오페라의 느낌을 잊어가던 찰나에 다시 차이콥 뽕을 가득 맞게 됐다. 내한 오케스트라들 차이콥 교향곡 한다고 할 때마다 '어우 사골 차이콥 ㅉㅉ 그게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자주하지' 싶었지만 정작 피크담으로 차이콥의 향기를 가득 맡으니 이게 음악이지 싶다. 


차이콥의 음악은 초연 때부터 극찬 받았지만 모데스트의 리브레토는 푸쉬킨의 걸작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까였다. 때문에 연출 중에서는 푸쉬킨의 원작의 느낌을 더 살린 것들이 있다. 이 연출 역시 그런 스타일로 진행된 작품이다. 원작에서 게르만은 자살하지 않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데, 이 연출의 배경 역시 정신병원이다. 사실 요즘이야 정신병이 오페라 연출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급이라 굳이 연출의 뿌리를 원작까지 가서 찾을 필요가 있나 싶긴 하다. 전체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갇힌 게르만이 겪거나 회상하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 공연에 대한 정보를 별로 안 읽어봐서 연출가도 모른 채로 끝까지 봤다. 보면서 연출가가 누굴까 계속 고민했는데, 크게 떠오르는 후보는 로버트 카슨과 드미트리 체르냐코프였다. 하지만 체르냐코프라고 생각하기에는 광기나 연극적인 디테일이 덜 했고 카슨이라고 하기엔 조금 꿈과 현실의 경계가 좀 불분명했다. 이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아는 연출가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연출을 뽑아내는 사람이라면 분명 널리 알려진 거장임에 분명할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음악가들과 서유럽 연출가의 조합이 분명하다라는 예측을 했다.

보기 좋게 틀렸다. 크레딧에 올라가는 연출가의 이름은 레프 도딘Lev Dodin, 러시아 연출가였다. 


왜 이 연출을 그렇게 높게 평가했나. 배경을 정신병원으로 옮겨 모든 이야기를 환상과 회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트릭이 아니다. 감탄이 나오는 건 바로 음악적인 장면에 새로운 컨텍스트를 만들어서 음악의 감정을 끌어내는 장면들이다.

옐리츠키 공이 부르는 2막 1장에 부르는 "당신을 사랑합니다Я вас люблю" 라는 아리아는 극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아리아가 아니다. 옐리츠키라는 인물 자체가 원작에도 없는 인물이며 그저 게르만의 사랑을 좀 더 불쌍하게 만들어주는 인물일 뿐이다. 또한 옐리츠키의 사랑은 뭐가 됐든 게르만의 열렬한 사랑과 대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앞 장면에서 리자는 이미 게르만에게 마음을 준 뒤다. 도대체 옐리츠키의 사랑 노래가 리자에게 어떤 울림이나 줄 수 있겠는가?  관객 입장에서 옐리츠키는 남주의 돈많고 재수없는 무매력 연적일 뿐이다. 오죽 매력이 없으면 스토커 같은 게르만이 침실 가서 애걸복걸하니까 리자가 옐리츠키 버리고 게르만한테 넘어가겠냐고. 여튼 이런 무매력 캐릭터에게 아리아가 들어가는 건 그냥 연적으로서 인물균형할당제 아리아를 하나 받는 것 뿐이다. 그런데 또 차이콥이 쓸데없이 기합 빡넣고 오페라에서 제일 서정적인 아리아로 만들어 버린 게 문제지. 

이 작품에서 옐리츠키는 단 한번도 무대 2층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는 현실과 발이 떨어져 있는 묘한 인물이다. 한번도 직접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가 실재하는 인물인지, 게르만의 환상인지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옐리츠키는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객관적이며  제 정신이 박혀있는 이성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는 이 정신병원을 정말로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옐리츠키가 환자들이 가득한 정신병원을 내려다보며 당신을 사랑한다고 노래한다. 그 곳에 리자가 없는데도 말이다! 옐리츠키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환자들이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 순간 이 컨텍스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래서 옐리츠키와 이 병원의 관계는 무엇인지, 도대체 왜 쟤는 환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은 전혀 의미가 없어진다. 아름다운 차이콥스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고, 무대에는 따스한 조명이 내리쬐고 있고, 환자들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다른 남자에게 넘어간 약혼녀에게 불러주는 덧없는 사랑노래가 아니라 누군가를 정말로 위로해주는 노래가 되는 셈이다.

옐리츠키는 이 장면을 통해 더 이상 약혼녀 잃은 찌질이가 아니라 전체 이야기의 꼭대기에 자리잡는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 게르만의 광기에 휘말린 마지막 세번째 도박에 응해주는 사람이 옐리츠키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옐리츠키는 이 정신병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한 장면 더 살펴보자. 2막의 파스토랄은 차콥의 모덕 간증 순간이자 그랑 오페라 식 유흥 장면이다. 여기에 나오는 듀엣은 참 아름다운 음악이지만 잘라내도 오페라에 아무런 지장도 없다. 하지만 도딘은 이 장면을 게르만과 리자, 여백작의 삼중창으로 바꿔 놓는다. 눈을 가리고 방황하며 상대방을 찾아가는 게르만과 리자의 모습은 이 음악에 새로운 의미를 얹어준다. 여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노래를 리자와 여백작이 노래하니 '리자의 사랑이냐 여백작의 도박 비밀이냐' 사이에 미쳐가는 게르만의 모습을 암시하는 효과도 있다. 이 극중극에서 결국 게르만이 리자를 선택하며 해피엔딩을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이 아름다운 음악의 끝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어준다.


전반적인 해석 역시 설득력있다. 리브레토 상으로 게르만은 리자의 스토커일 뿐이지만 이 작품에선 리자가 마치 오랫동안 게르만을 보살펴 온 것 처럼 보인다. 마지막 순간까지 노답 게르만을 한번이라도 더 믿으려는 리자의 모습은 '나쁜 남자 콤플렉스' 같은 걸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심한 중증이다. 리자 입장에서 처음보는 게르만을 사랑할 이유를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출에서 리자는 정신병자 애인을 오랜 기간 동안 보살펴 온 여인이 된다. 아 물론 이것도 답답하긴 짝이 없지만 그래도 말은 된다.


오랜 기간 볼쇼이를 호령했던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지휘를 맡았다. 작품에 드러나는 차이콥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려내지만 디테일이 아쉬운 장면들이 종종 나타난다.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이 탁월하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없기도 하지만 유독 이 공연에서는 칼 같은 집중력이 부족해보인다.

가수들은 모두 탁월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게르만 역의 블라디미르 갈루친(Vladimir Galouzine, 프랑스어 식으로 옮긴 것 같다. 키릴로는 Владимир Галузин)이 연기나 목소리 모두 폭발적이다. 게르만에 필요한 단단하며 영웅적인 목소리, 극 내내 지치지 않는 스태미나, 여기에 연기까지 두루 갖췄다. 러시아 가수면 왠지 연기랑 거리가 멀 것 같은데, 정신병 걸린 표정을 이렇게 잘 살려낼 수가 없다.

갈루친 영상 찾다가 발견한 클립인데 게르기예프가 반주를 잘 한다.


리자 역의 하스믹 파피안Hasmik Papian 역시 윤기있으면서도 알맹이 있는 목소리를 갖춘 가수다. 여백작 역의 이리나 보가체바Irina Bogatcheva는 특색이 없어 조금 아쉬운 편이고 톰스키 역의 니콜라이 푸틸린Nikolai Putilin은 적은 비중에도 상당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첫 아리아에서 고음이 조금 아쉽지만 꽤나 카리스마 있다. 

대부분 러시아 출신의 가수지만 옐리츠키 공에는 프랑스의 자존심인지 루도빅 테지에Ludovic Tezier가 나온다. 테지에가 왜 인기 있는지 납득을 못하고 있었지만 이 공연에서는 발군이다. 이 프로덕션에서 연출 버프를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 옐리츠키이기도 하지만 테지에의 굵고 강렬한 목소리가 없었다면 성공적이지 못했을 테다. 오히려 2010년 리세우 공연 때보다 이 공연에서 더 노래를 잘하는 것 같다. 턱선도 잘 살아있는 외모도 한 몫한다.


러시아에서 체르냐코프 같은 연출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다시는 러시아 연출가들을 무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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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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