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오페라를 위한 여정.
이아고가 잔인한 신을 믿는다면 나는 공연의 신을 믿는다고 할 수 있다. 학회 일정에 맞춰서만 겨우 해외에 나가기 때문에 학회가 있을 때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시간에 좋은 공연들이 겹치지 않고 나를 반겨주는 것은 순전히 행운의 영역이다. 내가 유럽에 와서 보는 많은 공연은, 내가 그 공연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공연이 적당한 시간에 있었기 때문이 많다. 그저 공연의 신이 좋은 공연을 점지해주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헨트에서 헬리아네의 기적을 보게 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원래 계획은 토마스 햄슨과 베로니크 장이 나오는 파리 오페라의 <유쾌한 미망인>을 보는 것이었다. 예매도 미리 해놓으려고 했지만 티켓 값이 애매해서 일단 미뤄뒀다. 그러다 아예 욕심을 더 내볼까 하고 휴가를 더 쓸 작정으로 뒤 일정까지 찾아봤다. 가장 욕심 났던 건 취리히에서 마테이와 브레슬릭이 나오는 오네긴.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마리오티 지휘 베스트브룩 주연의 운명의힘, 카디프에서 웨일즈 국립 오페라의 호반시나 까지 눈에 들어왔다. 카디프 - 취리히 비행기 일정까지 검색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욕심이 과한 것 같았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코민이 <베니스에서 죽음>을 지휘하는 걸 보러갈까도 싶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게 바로 Das Wunder der Heliane였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검색 결과를 훑어볼 때는 바로 제꼈다. 제목을 얼핏 보고 <아름다운 엘렌>의 독어 제목인 줄 알았다. 뭐 Die Wunderschöne Helene 쯤이라고 읽은 것 같다. 물론 사랑스런 작품이지만 <미망인>을 피해서 굳이 보러 갈 이유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외국 나가서 공연 볼 때는 뭔가 거창한 작품을 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그렇게 제껴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수요일에 볼만한 공연이 파리 미망인 말고 없는 거다. 그래서 리스트를 몇 번 다시 확인하는데, 그제서야 제목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헬리아네의 기적!
처음 들어본 작품이었다. 샤이보이에게 물어보니 이 글을 추천받았다. 읽고나면 강력한 뽐뿌가 오지 않는가? 잊혀진 걸작, 유럽에서도 공연이 귀한 작품, 코른골트의 마지막 오페라. 글을 읽고 나서 고민 없이 표를 질렀다.
파리에서 이제 헨트(Gent, 겐트)로 떠나면 된다. 독일에서 매일 기차타고 돌아다녔는데 파리에서 헨트로 딱 한번 가는 거 제대로 못 하겠냐 싶었다. 표도 여행 떠나기 2주 전에나 샀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착각한 게 있으니, 독일 안에서 DB타고 돌아다니는 것과 달리 파리에서 헨트로 가려면 뭐가 됐든 국경을 넘고 기차 회사가 바뀐다는 사실이었다.
파리에서 아침에 테제베를 타고 릴로 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파리 - 릴 까지는 표에 정확한 기차 시간이 적혀있었지만 릴 - 헨트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알아서 가야했다. 처음엔 브뤼셀로 가면 되는 줄 알고 브뤼셀 기차를 적당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혹시 모르니 한번 확인은 해보자고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표를 보여주며 물어봤다. 그러니까 벨기에 철도 기차는 여기(Lille Europe)서 타는 게 아니라 Lille Flanderes에 타야 한댄다. 아니 그럴 거면 표에 기차역도 적어주던가! 릴 유럽은 유로스타와 테제베가 다니는 곳이고 릴 플랑드르는 다른 열차들이 다니는 중앙역이다. 허겁지겁 몇백미터 떨어진 릴 플랑드르로 옮겨갔다.
릴 유로스타에서 릴 플랑드르로 가는 길. 저 멀리 기차역과 성당이 보인다.
릴 플랑드르로 가면 헨트로 가는 직행 열차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직행열차를 타려면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구글 맵으로 찾아보고, 또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안되는 불어를 섞어가며 물어보니 구글 맵에 나온 일정이 맞는 것 같았다. 두번이나 더 환승해야하는 코스였다. 하지만 이 쪽이 한시간 더 일찍 도착했다. 캐리어를 맡길 곳이 있으면 맡기고 릴 시가지를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었겠지만 못 찾겠어서 그냥 환승하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환승 뭐 그 까짓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첫 환승역인 Froyennes에 내렸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거.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문제는, 내가 타야할 기차가 어느 쪽 방향인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플랫폼 번호가 안 쓰여져있다. 마침 나와 같은 기차에서 내린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도 똑같이 당황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계셨는데, 승무원이 자기한테 이 쪽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철도 일정표를 보고 아마 이 쪽으로 오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기차를 기다렸다. 뭐 기차가 반대편으로 들어와도 기차가 짧으니 적당히 뛰어가면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기차가 반대편으로 오더라ㅋㅋㅋㅋㅋㅋ 그것도 내가 타고왔던 기차보다 훨씬 긴 기차가. 할아버지와 나는 당황해서 캐리어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기차의 맞은 편 문은 당연히 열리지 않았고 열심히 기차를 돌아가보려고 달렸지만 이미 기차는 출발해 버렸다. 이 깡촌에서 기차를 놓치다니. 멘붕이 왔다.
둘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던 와중에 또 다른 기차가 왔다. 할아버지와 난 서로 반대편 터미널에 서있었고, 이번에는 기차가 오는 것이 멀리서부터 보였기에 내가 급하게 다시 철길을 그대로 건너갔다. 일단 기차를 탔으니 다행이지만, 문제는 방향이었다.
내 입장에서 릴 -> 헨트로 가는데 어떻게 중간에 반대편 기차로 갈아타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기차나 타고 상황을 다시 체크해보니 알 것 같더라. 원래 릴에서 쿠트레(Courtrai, 네덜란드어로 Kortrijk) 쪽으로 가야하는데, 하필 내가 출발하려는 시간대에 쿠트레로 가는 기차가 전혀 없어, 가까운 벨기에 도시인 투르네로 가서 쿠트레 행 기차를 타야 했다. 릴 - 투르네와 투르네 - 쿠트레 행 사이의 분기점이 바로 Froyennes.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자면 서대전에서 대구를 가는데 오송역에서 환승해야했던 셈이다. 그러니 왔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기차를 타야했던 것이다.
우리가 다시 탄 기차는 투르네 행이었다. 할아버지는 터키인이었지만 프랑스에서 공부하셨다고 불어를 잘 하셔 기차 안의 승객에게 길을 물어봤고 나는 이 열차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구글 맵은 뭐라고 말하는지를 찾아봤다. 결론은 투르네에 내려서 다시 기차를 찾아보자였다. 할아버지는 70세 정도에 이스탄불에 사시는 분으로 여행차 파리와 릴에 갔다가 브뤼헤로 떠나는 중이었다. 이렇게 터키인 할아버지와 한국인 청년이 벨기에에서 일행이 됐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투르네 역에 도착했다. 한 40분 정도 기다렸으려나. 쿠트레 행 열차를 탔다. 투르네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터미널 번호도 잘 써져있고 전광판도 다 있다. 이렇게 당연한 게 감사해질 줄이야. 재밌는 게 벨기에는 불어와 네덜란드어를 섞어 쓰다보니 Courtrai 행 열차에 탔는데 도착하면 Kortrijk이 나온다. 둘이 같은 도시인지 나중에 앎;; 기차역에서 기다리면서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는데 벨기에 어린 학생이 와서 할아버지한테 담배 좀 달라고 하더라.
쿠트레 행 기차를 타니 일단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지는 브뤼헤 행, 나는 헨트 행이었으니 쿠트레에서 헤어져야했다. 가는 기차에서 다시 이것 저것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할아버지는 불어가 편하고 영어는 잘 못하시는데, 난 영어가 편하고 불어로 이야기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불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에서도 일했다는 걸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탈리아어도 조금 공부했다고 말해서 이탈리아어로도 잠깐 대화를 나눴다. 신기한 건 전체 공부한 시간도 불어나 이탈리아어나 비슷하고 오기전엔 불어 위주로 공부했지만 정작 말하거나 듣는 거나 이탈리아어가 훨씬 편하더라.
내가 한국전쟁을 설명할 때였다. 한국 사람들은 터키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도와준 걸 기억하고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war 를 못 알아들으시더라. 그래서 불어로 la guerre라고 말해봤지만 내 발음이 구려서 역시 실패.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떠오른게 La battaglia였다. 물론 전쟁을 이야기하려면 Guerra di corea가 맞겠지만 먼저 떠오른 건 저 단어였다.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이해하셨다. 터키인과 한국인이 벨기에의 기차 안에서 유럽 삼개국어를 사용하며 그렇게 힘든 대화를 나눴다.
쿠트래 발 헨트 행 열차는 이 날의 다섯 번째 열차였다. 파리에서 헨트 오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여러분. 헨트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30분 쯤이었다. 파리에서 오전 9시 40분 기차를 탔으니 6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파리에서 릴이 230km 정도고 릴에서 헨트까지가 80km 정도인데 파리에서 릴은 1시간만에 오고 릴에서 헨트까지는 5시간 만에 도착했으니 정말 험난한 여정이었다. 80km면 자전거를 타고 가도 5시간 안 걸렸겠다ㅜㅜ
내 기억으로 원래 일정 도착 예정 시간은 1시 쯤이었다. 2시간 30분이나 늦어진데다가 피곤하기 까지 해서 숙소에 가자마자 한시간 정도를 잤다. 헨트를 아예 안 둘러보기엔 너무 아까워서 헨트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많이 돌아다녀서 다리가 지친 게 느껴졌지만 헨트 시내를 보는 순간 그걸 싹 잊을 정도였다.
구시가지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성 니콜라스 교회다.
뒤에 붙어있는 이 곳은 헨트의 종루.
엄청 있어보이는 건물이지만 수퍼마켓으로 쓰인다고 한다.
이 건물들에 넋을 잃고 있다가 좀 돌아보면 또 다른 건물이 보인다.
강 건너 편에 있는 성 미카엘 성당.
발을 옮기면 항상 새로운 건물이 등장한다. 헐 대박 하고 가다보면 또 헐 저건 또 뭐임
사람들이 배타고 논다.
헨트 풍경의 화룡점정은 그라베스틴 성이다.
성 내부의 정원. 오후 5시가 넘어 입장이 불가능했다.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에 성 주위를 둘러봤다. 도심 안에 이런 성이 떡하니 놓여있는 풍경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 전에 가본 성은 호헨잘츠부르크였을 텐데, 산 정상에 독야청청 서있는 성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냥 평범한 건물들의 모양이나 색감도 특이하다.
이제 다시 오페라 극장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계속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프라이데이 마켓 사진.
지나가다 보인 성 야곱 성당.
다시 종루로 돌아왔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City Pavilion (Stadshal) 이라고 한다.
처음 본 니콜라스 교회의 반대편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마지막 저녁이라 맛있는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는 메뉴가 없으니 그냥 스테이크나 썰기로 했다.
스타터로 나온 오리 고기.
한껏 여유와 사치를 내며 마지막 밤을 자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공연이 7시 반이라 여유있게 먹으려고 식당 문여는 6시에 맞춰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스테이크가 안 나오는 거다. 시계를 보면서 점점 초조해지는데, 6시 40분이 지나도, 50분이 지나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거의 7시가 다 되었을 때에야 내 테이블에 스테이크가 놓였다. 오페라 극장까지 걷는 시간을 생각하면 7시 15분에는 나가야 한다. 300그램 스테이크 15분 컷 가능합니까???
부지런히, 열심히 쳐묵쳐묵 했다. 마지막 밤의 여유와 사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기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여행객이 되었다.
그 와중에 곁들여준 토마토랑 감자가 맛있어서 틈틈이 곁들여 먹었다. 고기도 꿀맛이었지만 이미 내가 하는 건 식사라기보단 전투에 가까웠다.
이건 계산지 담겨있는 함이었다.
다행히 15분 컷 끝내고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여러분, 유럽 음식은 언제나 생각하는 것보다 늦게 나옵니다. 공연 시작 전 2시간 전에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세요 흐그흐긓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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