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을 일정에 넣으면서 욕심을 한사발 넣었다. 


빈 슈타츠오퍼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사이에 가장 대비되는 공연이 끼어들어갔다. “뮌헨에서 가장 작은 오페라 극장”을 모토로 하고 있는 파징어 파브릭의 오페라 공연이다. 


내가 이 파징어 파브릭을 처음 찾은 건 3년 전이었다. 3년 전에 바이로이트와 잘츠, 루체른을 도는 여름 페스티벌 순례를 하려고 유럽을 처음 찾아왔을 때였다. 루프트한자를 타면 뮌헨에 오후 경에 도착하는데, 도착한 날 밤에 뮌헨에서 뭔가 공연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았던게 이 공연이었다. 뮌헨에 도착해서 마리엔플라츠로 S반을 타고 와서 티켓을 찾고 파징어 역으로 가 케밥을 먹고 공연장에 찾아가니 시간이 딱 맞았었다. 심지어 숙소도 못 들어가서 캐리어를 들고 돌아다녔다. 유럽에 가면 언제나 도착하는 당일부터 공연을 찾아갔는데, 이 공연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3년전에 본 건 라 보엠이었다. 그 때 쓴 후기가 클갤 어디에 남아있을 건데, 진짜 감격에 겨운 공연이었다. 라 보엠을 참 많이 봤지만, 그 공연 만큼 많이 울었던 공연이 있을까 싶다. 미미도 울고 로돌포도 울고 나도 울고 옆에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다 울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가 너도 울었냐며 auch?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게 내가 유럽에서 본 첫번째 소극장 오페라였다. 그 다음이 런던에서 본 팔스타프였고 이 역시 글라인드본보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그것보다 더 나은 팔스타프 연출을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

신행중에 같이 볼만한 공연이 뭐가 있을까 생각할 때 꼭 같이 보고싶은 건 바로 이런 공연이었다. 코앞에서 즐기는 그 몰입감. 출연진들이 각자의 최선을 다해 준비한 공연.



빈 요리에 피곤해진 터라 한식당을 찾았다. 유유미Yuyumi라고 독일에있는 한국음식 체인점인데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고 적당히 로컬라이징 됐지만 맛이 좋았다. 로마에서 간 한식당과 달리 대부분 현지인들이 간단하게 식사하러 오는 곳이었다.


이 식당이 있는 곳이 마침 게어트너플라츠.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왠지 친근한 그 곳이다. 

여기가 뮌헨의 마에스트로 마르코 코민이 일 했던 곳입니까! 두유 노 마르코 코민??? 아 쫓아냈지…. 



뮌헨을 돌아다니다보니 시간이 또 애매해졌다. 결국 3년전에 먹은 케밥집을 또 찾았다. 

파징어 파브릭에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라들러와 무알콜 맥주를 주문해 마시면서 오페라를 보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시작하게 됐다는 공지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데, 20분 정도 뒤에는 지휘자가 올라와서 사정을 설명했다. 단디니 역 가수가 아팠는데 다른 캐스팅을 구할 수 없어 (원래 멀티 캐스팅인데 다른 가수가 무슨 일인지 뮌헨에 없었나보다) 가수와 배우를 따로 구했다는 내용이었다. 가수 한명이 오케스트라 피트에 보면대를 놓고 앉아서 대기했고, 다른 여성 배우가 단디니 역을 대신 했다. 


파징어 파브릭의 오페라 공연은 실내악 편성의 오케스트라로 진행한다. 현5부와 목관4부에 호른까지 모든 파트를 한 명씩만 써 열명의 작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 오케스트라를 줄이고 합창 파트를 없애거나 간소화 시키는 편곡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오페라를 맡은 지휘자가 직접 맡았다. 로시니의 작품이 소편성으로 연주하기에 적합하기도 하고 이런 편곡이 주는 색다른 맛도 있어 상당히 즐거웠다.


챔버 편곡만큼이나 색다른 건 바로 독일어 번안이라는 점이었다. 라 보엠 같은 작품을 독일어로 듣는 것도 새롭지만, 단어의 홍수와도 같은 이 로시니 오페라를 독일어로 바꾸니 다른 작품 처럼 들렸다. 좋은 쪽으로 말하자면 옛 명반 중 이발사 독어판을 듣는 기분도 났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어로도 패터 패시지를 부를 수 있구나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 꽤 있었다. 오페라의 첫 시작인 No no no no를 설마 Nein nein nein nein이라고 부르려나 했는데 진짜 그렇게 부르더라. 가수들 입장에서 난이도가 훨씬 뛰었을 듯.



아쉽게도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서곡에서부터 삐걱거렸다. 저음에서 서로 어택과 음정을 맞추지 못해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3년전 내 기억이 미화돼있기도 했겠지만 어떻게 며칠전에 빈필 듣고나서 뮌헨 오브리 오케 들으면서 만족하겠나 싶었다. 다행히 이내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투티에서는 제법 폭발적인 모습까지 보여주었고 가수와의 호흡도 좋았다. 스코어의 까다로운 로시니 멜로디들을 1바이올린 주자 혼자서 고군분투 연주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가수들은 들쭉날쭉 했다. 걱정했던 신데렐라 역은 놀랄 만큼 잘했다. 목소리도 좋고 발성도 안정적이고 독어 발음도 좋고 연기도 좋았다. 부족한게 전혀 보이지 않는 가수였다. 마지막 논 피우 메스타도 잘 마무리해줬다. 


반대로 돈 라미로 역은 아주 괴상한 테너였다. 어떻게 저 목소리로 가수가 됐지 싶을 정도. 카라얀이나 베컴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다 비브라토도 심했다. 그렇다고 고음이 특별히 잘 나는 것도 아니고. 좀 듣다보면 적응이 되는 건가 싶었지만 2부에 다시 들으니 또 끔찍했다. 화내는 연기 하나는 잘 하더라. 화내는 순간에는 무슨 눈썹이 만화 캐릭터 처럼 \   / 모양이 된다.


단디니 역의 대타 가수는 노래가 나쁘지 않았다. 독어 번역된 단디니를 노래해본 적도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더 놀라운 건 대타로 나온 배우. 여자였으니 단디니를 연습했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동선과 연기를 소화하는 건 물론이고 노래 할 때 립싱크 까지 꽤나 잘 했다. 가사를 언제 다 외운 걸까. 왜 단디니 대타로 여자 연기자를 구했을까, 의상이 여성사이즈 수준으로 작은 것 밖에 없었나 싶었는데 뒤늦게 생각해보니 연출가나 같이 연습했던 다른 가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연이 늦어진 것도 이 둘이 연습할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두 대타가 나름 잘해줬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대극장에서 이렇게 했어도 몰입에 방해가 됐을텐데 소극장 맨 앞자리에서는 연기하는 위치와 노래하는 위치가 내 자리에서 90도 가까이 차이나는 게 예사였다. 불평하지 않으려고 해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디니가 중창에 끼어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자꾸 아쉬운 장면이 계속 나왔다.


알리도로는 멋진 목소리로 잘 해줬고 돈 마니피코는 연륜있는 가수가 재치있게 잘 해냈다. 클로린다와 티스베 자매 중에서 노래는 클로린다가 더 나았지만 연기는 티스베가 나았다. 클로린다 역 가수는 시종일관 세리아라도 부르는 듯 경직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돈 라미로 역의 테너처럼 심각한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예당 오페라 극장에서 듣는 웬만한 가수들보다 코앞에서 듣는 가수들이 훨씬 낫다. 세종 대운동장에서 공연하면 누가 노래해도 구리게 들리는 것 처럼 작은 실내에서 공연하면 커리어를 갓 시작한 가수들도 훌륭하게 들린다. 이런 곳에선 성량 키우기에 몰빵하지 않고 발음이랑 프레이징 신경 써서 부르는 좋은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 


개개인의 기량은 종종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앙상블은 아쉬움이 없었다. 톱니바퀴 굴러가듯 착착 주고받는 맛이 아주 좋았다. 독일어라 서로 자음 맞추기도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가사가 또렷하게 들릴 만큼 노래가 잘 맞았다. 이 맛에 오페라 봅니다.


연출 역시 좁은 무대를 잘 썼다. 라보엠 때는 거의 미니멀리즘 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 무대는 있을 게 다 있었다. 서곡에선 모든 등장인물들이 일렬로 서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판넬을 들고 있었다. 곡의 흐름에 따라 알리도로가 돌아다니며 각각의 팻말을 서로 바꾸기 시작한다. 이윽고 바닥에 있는 다른 정체성 판넬들, 왕자, 하인, 공주, 미녀 등등이 써진 판넬들을 서로 가지려고 정신없이 다투고, 마지막엔 알리도로가 거지 판넬을 얻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퇴장하는 걸로 끝난다. 


가장 인상적인 연출 또 하나는 알리도로가 신데렐라를 무도회로 데려가겠다고 부르는 아리아에서 나왔다. 이 때 클로린다와 티스베의 옷장이었던 무대 양사이드의 구조물은 180도 회전해서 왕궁의 벽이 된다. 이 극장에는 따로 무대 스탭이 없기 때문에 가수들이 나와서 직접 무대를 옮기는 것도 귀여움 포인트. 알리도로가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중앙의 거대한 계단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리며 무대를 완전히 바꿔 버린다. 이 때 계단에 걸려있던 빨래줄을 튕겨서 멀리 날려버리며 신데렐라의 하녀로서의 삶을 떠나보내는 것도 좋았다. 저 계단 돌릴 때에는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컴팩트한 무대였다.


중창 때 동선도 괜찮았다. 무대 자체가 작으니 밀집된 에너지로 공간이 가득찼다. 소극장 연극 처럼 종종 객석에서 등장하거나 관객들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자연스럽게 잘 꾸며놨다. 서곡에서 판넬을 들고 서있던 아이디어를 마지막 피날레에서는 모두 물음표 판넬을 들고 있다가 뒤집으니 Ich가 나오는 것으로 끝맺었다. 무리수를 두지 않고도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연출이었다. 아마 이 점을 생각해서인지 공주가 못되면 다른 남자를 꼬시면 되지라는 내용의 클로린다의 마지막 아리아를 자르지 않고 넣었다.



기대했던 대로 소극장 오페라 다운 매력이 가득찬 공연이었다. 이런 작품을 예당 오페라 극장 크기에서 올렸다면 누가 와도 이런 재미를 느끼진 못했을 테다. 로시니 오페라에 들어있는 음표들은 다소 건조한 음향에서 하나하나가 톡톡 튀는 맛으로 들릴 수 있어야 하고 중창이 빠르게 칼같이 맞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 본 다른 두 소극장 오페라였던 파징어 파브릭 라보엠과 풀럼 오페라 팔스타프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남긴 했다. 일단 라보엠 같은 경우 그런 스탠다드 레퍼토리 비극을 자연주의 연기력으로 정면 승부를 볼 때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였다. 감정적인 폭풍을 겪었었다. 체네렌톨라 역시 라보엠과 다른 묘미가 있다 하더라도 라보엠 같은 극단적인 감정폭은 별로 없었기에 매우 강렬한 동요를 일으키긴 어려웠다. 또한 팔스타프에 비교하면 연출이나 가수들의 연기력이 평범한 축에 속했다. 물론 대극장 오페라들에 비하면 기본적으로 연기가 좋을 수밖에 없지만 풀럼 오페라는 다들 본업이 연기자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줬었다. 특히 연출이 정말 약빤 수준이라 내 팔스타프 인생연출이 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었고. 그건 내가 진짜 내 생애 레전드 공연 중 하나로 꼽아도 아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에반해 이번 오페라는 돈 라미로가 깎아먹은 지분, 단디니 대타로 인한 핸디캡이 무시할 수 없는 단점이었기에 베스트로 꼽기는 조금 아쉬웠다. 대신 체네렌톨라와 알리도로 역의 노래만큼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은 박수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다들 정말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아내 역시 예습을 한번 해갔음에도 못 알아 먹는 순간이 꽤 많았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좋아했다. 무대에 최소한의 장치와 소품만 사용해 모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낸 것에도 감탄했다.


끝나고 나서 무대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지휘자가 나와서 우리 둘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고맙다고 해서 사진을 부탁한 뒤에 내가 3년전에 유럽 처음왔을 때 여기와서 라보엠 봐서 정말 좋아 이번에 또 온 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 좋아하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해줬는데, 오늘은 정말 힘든 공연이었다고, 다음에 오면 더 좋을거라는 말을 해줬다. 단디니 대타는 물론이고 오케스트라에서 두 파트가 오늘 악보를 처음 본 객원이었다고! 그 말을 듣고 내가 “아 그래서 서곡이….” 라고 말하니 지휘자가 “어우 그 음정이란” 하고 이마에 손을 탁… 극한직업 인정합니다. 이런 악몽 같은 상황에서도 그 정도 퀄을 뽑아준 오케 및 출연진 일동에게 박수



오페라로 즐거운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웅장한 슈타츠오퍼의 건물과 세계적인 명성의 가수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3년 전에 보여줬고 이번에도 또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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