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구텐베르크가 지휘하고 연출한 마술피리. 대사 파트를 새로 다시 썼기에 제목도 <왕의 마술피리Des Königs Zauberflöte>라고 붙였다. 샤이보이님의 블루레이 협찬 덕에 감상한 타이틀이다.
사실 추 구텐베르크가 내한했을 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한 소식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 기회를 놓쳤나 싶다. 에노흐 추 구텐베르크는 유명 독일 정치인인 카를테어도어 추 구텐베르크의 아버지이며, 에노흐의 아버지 이름도 같은 이름의 같은 CSU당 출신 정치인이다. 남작 가문 출신이며 2005년까지 다이데스하임의 최대 규모 포도주 양조장을 소유하기도 했었다.
지휘자가 오페라의 연출까지 같이 하는 것은 요즘 시대에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기억으로 이반 피셔였나 누군가가 파리 오페라에서 코지인가를 지휘 연출을 겸해서 상연한 적이 있다던데 그 시기 파리 오페라의 흑역사로 남아있다. 그 외에는 구스타프 쿤이 자신의 왕국이라할 수 있는 에를 음악제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연출과 지휘를 겸하면서 올린 것이 떠오른다. 추 구텐베르크 역시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헤렌킴제 음악제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연출은 상당히 세련됐다. 기본 아이디어가 괜찮고 그걸 이루는 수단 역시 깔끔하다. 루드비히 2세가 당시 최첨단 조명기술들을 도입해 헤렌킴제에서 <마술피리>를 상연한 것을 모델로 삼고 극중의 인물들을 모두 당대의 유명한 귀족들로 상정한 것이다. 자라스트로는 자신만의 세계, 특히 남자들만의 세계를 구축한 점에 있어서 루드비히 2세로 비유되고, 모노스타토스는 독일의 국왕의 조언자인 비스마르크, 파미나는 바이에른 출신이며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시시 황후가 된 엘리자베트, 타미노는 시시에게 구애하는 프란츠 요제프 1세, 밤의 여왕은 후에 오스트리아 황실을 휘어잡은 조피 대공비로 나온다. 조피 대공비는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며느리인 엘리자베트의 이모이기도 하다. 역시 흔한 유럽 왕실의 족보... 그 외에 파파게노에서부터 세 명의 시녀들, 갑옷남들 까지 실제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이 함께 붙어 소개된다. 연출가가 바이에른 귀족 족보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양반이기에 가능한 아이디어였을 것 같다.
이런 방식은 몇가지 확실한 효과들이 있었다. 첫째, 이야기가 허황되고 낡은 점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들 알고있는 19세기 인물들이 여혐 발언 하는 걸 본다고 암이 생기진 않는다. 둘째, 인물간의 관계에 역사적인 맥락을 집어넣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프란츠 요제프로 분장한 타미노가 왕자 놀이를 하고 있으면 위화감이 사라진다. 루드비히 2세가 자라스트로가 되어 고매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저런 중증 환자가 진짜 존재했을 것만 같다. 후술하겠지만 이 연출은 파미나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그 역할을 유럽 최고 인기의 황후인 엘리자베트에게 맡기면서 해석에 묘한 설득력을 더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인물에 대한 비유가 항상 정교하게 맞물리는 것은 아니다. 밤의 여왕 역인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가 아닌 요제프의 어머니이니 타미노의 어머니인 셈이다. 뭔가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O zittre nicht "mein lieber Sohn"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닌 셈이 되기도 한다. 자라스트로-파미나 관계 역시 루드비히 2세가 엘리자베트를 가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엘리자베트가 루드비히보다 나이도 많고 5촌 당이모 뻘이다. 루드비히 2세와 조피 대공비를 자라스트로와 밤의 여왕 만큼 서로 대립되는 관계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인물이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인데 비해 타미노만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츠 요제프 1세로 비유되는 점은 마술피리의 세계와도 살짝 닮아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유 정도로만 멈추지 않고 추 구텐베르크는 더 과감한 손질을 한다. 나이 든 파파게노가 오페라를 지켜보며 훈수를 두듯 나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모든 대사를 다 들어내고 이 나이든 파파게노의 관점으로 내용을 회상하며 해석한다. 처음에는 젊은 파파게노의 입장을 대변해주며 자신의 행동에 억울한 점이 있다는 걸 확실히 해둔다. 뱀을 잡았다고 거짓말을 하려던 건 절대 아니고, 타미노가 그렇게 물어보니 차마 아니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식이다. "귀족의 말에 내가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냐"며 귀족 출신인 추 구텐베르크에게 따지는 것이 포인트. 이런 식으로 귀족 디스를 한참 하고 자라스트로 무리의 여혐도 열심히 깐다. 마지막 나레이션 때는 이 갈등을 해결한 것이 바로 파미나의 공로라는 걸 분명히 기억해야한다고 강조하며, 연출가가 생각하는 작품의 방향을 굉장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 역시 득이 있고 실이 있다. 좋은 점은 마술 피리의 바보같은 대사들로 더 이상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타미노가 "여긴 어디지? 나는 왕자야" 같은 멍청한 말을 하는 걸 보고 있을 필요 없이 늙은 파파게노가 알아서 까준다. 여혐 대사 역시 마찬가지이며 파파게노가 할머니로 변한 파파게나를 비웃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덕분에 플롯의 내용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마술피리가 훨씬 건전하며 PC해지는 효과가 있다. 단점은 각각의 배역에 주어진 대사가 사라지므로 캐릭터들이 손해를 본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어떤 가수가 <지크프리트>의 지크프리트를 부르지 않고 <신들의 황혼> 지크프리트만 불러서는 캐릭터에 대한 동정이나 공감이 쉽게 생기지 않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특히나 손해를 많이 보는 건 파파게노다. 대사가 없는 파파게노는 입에 자물쇠 찬 파파게노와 다름이 없고 그저 가벼운 노래만 부르는 실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파파게나는 마지막 듀엣 장면에서야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고생 끝의 만남이라는 분위기가 사라진다. 다른 캐릭터들은 그래도 유명 인물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대사가 없다고 해서 캐릭터가 많이 죽지는 않는다.
종합하자면 마술피리의 문제를 독특하게 풀어냈다. 프로 연출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상당히 깔끔하게 나왔다. 이런 방식이 최선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작품을 까면서 즐길 수 있는 것도 괜찮은 해결책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유럽 역사에 해박한 사람이라면 이 연출에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다.
반주가 참 훌륭하다. 클랑페어발퉁의 독특한 사운드, 군데군데 돋보이는 강조가 매력넘친다. 유기적인 템포 흐름도 좋고 오케스트라의 칼같은 앙상블도 훌륭하다. 특히나 합창 파트는 유난히 아름답다. 마술피리 피날레가 다른 모페라 피날레에 비해 좀 맥이 빠진다는 생각을 하는데 합창단의 풍성하고 합일된 소리가 정말 인상적이라 피날레가 빛난다. 나에겐 비교적 지루한 장면인 이시스와 오시리스 파트 역시 합창 소리를 즐기는 맛이 있었다.
가수진은 타미노를 제외하면 모두 괜찮다. 아무래도 연출 컨셉 상 외모가 닮은 인물들을 캐스팅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상당히 괜찮다. 특히 루드비히 2세를 맡은 타레크 나즈미Tareq Nazmi는 외모 싱크로율도 높은 주제에 노래까지 탁월하다. 파파게노 역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헨 쿠퍼Jochen Kupfer가 맡았는데, 대사가 없어서인지 큰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타미노 역을 맡은 외르크 뒤르뮐러Jörg Dürmüller는 배역에 비해 너무 나이든 목소리였다. 밤의 여왕을 맡은 안톄 비터리히Antje Bitterlich는 강렬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소화해내고 파미나 역의 수잔네 베른하르트Susanne Bernhard도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파미나를 노래한다.
한글자막도 달려있고 연주나 연출 모두 빼어나 강력추천할 수 있는 타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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