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손의 매력.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의 원래 제목은 <기사 데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 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두편의 오페라가 모두 마농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실제로 문학 비평가들은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마농이 아니라 데그리외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 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마농 역시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데그리외는 마농보다 훨씬 강렬하고 인상적인 캐릭터다. 소설에서 마농의 모습은 오로지 데그리외의 시각으로만 그려진다. 이 점은 <마농 레스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춘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두 소설은 이야기의 액자식 구조가 닮아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여주인공을 스치듯이 본적이 있고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남자 주인공의 회상으로 전해 듣게 된다. 여주인공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남자 주인공의 묘사에 의지하고, 이는 '나'의 스치듯한 기억에 의해 살짝 뒷받침된다. 여기까진 <춘희>와 <마농>이 동일하지만 <춘희>의 마지막에는 여주인공의 일기가 나온다. 이 일기야말로 소설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고 <트라비아타>를 낳은 원천과도 같은 부분이다. 하지만 마농은 거의 전적으로 데그리외의 열정적인 증언에 의해서만 묘사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 역시 대체로 단순한 원칙으로 행동하는 마농과 달리 데그리외는 마농을 벗어나지 못하고 끝도 없는 온갖 기상천외한 생고생을 하며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마스네 <마농>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둘의 신혼생활인 2막과 수사가 된 데그리외를 다시 유혹하는 3막 2장이라고 생각한다. 둘의 사랑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두 사람 모두 중요한 아리아를 부르면서 프랑스 오페라 특유의 쇼 같은 모습은 없다. 또한 재밌게도 두 장면 모두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에서는 포함되지 않는 장면이다. 마스네가 3막 2장을 다뤄내는 모습은 특히 탁월하다. <타이스>에서 드러나듯, 마스네는 매력적인 여성이 성직자를 유혹하는 장면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 같다. 소설에서는 마농을 보자마자 데그리외가 눈이 돌아가지만 오페라에서는 밀당을 잘 표현해낸다.
때문에 오페라에서도 데그리외의 열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한다. 비야손은 이 점에서 아주 탁월한 데그리외다. 2막의 꿈 아리아 En fermant les yeux에서 마농의 손을 잡고 노래하며 시선이 마농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아리아 부르면서 연기한다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비야손을 보라고 해야한다.
3막 2장 Ah fuyez, douce image에서 비야손은 처절한 고통을 내비친다. 마농에 대한 데그리외의 엄청난 열정을 잊을 방법이 없기에 선택한 길이 바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한없이 평안해보이는 신부의 모습이지만 속은 들끓고 있는 모습을 비야손은 제대로 드러낸다. 그게 바로 소설에서 보던 데그리외의 모습이기도 하다. 필요한 만큼 폭발하는 비야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이 시절 비야손이 얼마나 귀중한 재능을 가졌는가 감탄하게 된다. 이랬던 그가 부상 이후 자신의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는 모차르트로나 겨우 가수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는 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야손의 불어 딕션이 상당히 훌륭해서 놀랐는데, 이 즈음에 아예 프랑스 시민권을 땄다. 리허설 중에서도 드세와 불어로 대화를 나눈다.
이 오페라에서 또하나 좋아하는 장면은 3막 1장에서 마농과 데그리외 백작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무대 뒷쪽에서 들려오는 춤곡 반주에 두 사람이 천천히 대화하는 장면은 참으로 오페라스럽다. 오페라가 가장 오페라다운 것은 바로 이런 순간 아닐까. 연극도 아니고 아리아도 아니고 교향악도 아니고 가곡도 아닌, 오직 오페라에서만 가능한 장면이다 특히 음악의 화성이 조금씩 바뀌는 부분이야 말로 백미다. 이 공연에서 마농을 맡은 드세는 이 장면을 매력적으로 표현해낸다.
베이스 사무엘 래미가 데그리외 백작 역으로 등장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베이스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염소 비브라토를 들려준다. 특히나 마농과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에서 드세가 아주 자연스러운 프랑스어 문장으로 노래하는 데 반해 래미는 한 음절을 노래해도 거북한 비브라토가 섞여있다.
맥비커는 드세와 비야손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가수의 능력을 제대로 살려냈다. 작위적인 쇼 장면이 많다고 생각하는 이 작품에서도 연극으로서의 설득력을 만들어낸다. 특히나 전형적인 프랑스 춤곡 형태의 전주곡 첫 부분에 발레를 넣음으로써 이 작품에 산재한 춤곡을 단점이 아닌 개성적인 특징으로 살려냈다. 전체적인 해석의 틀은 쉽게 와닿지 않지만 마농과 데그리외 사이의 연기는 신경을 많이 썼다. 1막의 첫만남에서 둘이 눈이 맞는 장면은 설레는 감정이 세밀하게 표현돼있다. 데그리외가 말을 걸기 전부터 데그리외를 신경쓰며 기다리고 있는 마농이나, 말을 걸어놓고 당황하는 데그리외의 모습은 참 사랑스럽다. 둘이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의 도피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쉽지 않은데 맥비커는 서툴고 순진한 두 연인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빅토르 파블로 페레스의 지휘는 약간 심심한 듯 절제되어있지만 두 가수를 자연스럽게 받춰준다.
비야손이 마지막으로 빛나던 순간이다. 같은 연도에 공연한 동일 작품의 베를린 슈타츠오퍼를 본지 오래돼서 비교할 순 없지만 맥비커가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듯한 이 연출만의 매력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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