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세 개를 꼽자면 반지, 라 보엠, 라 트라비아타를 고르겠다. 너무나 진부한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흔히 덕후들은 대중적인 작품을 '최애'로 꼽는 것을 주저하게 되지만 라 보엠과 라 트라비아타를 좋아하는 걸 숨길 생각은 없다. 나는 정말로 이 작품들을 사랑한다.
처음부터 꽤나 좋아했던 반지나 보엠에 비해 트라비아타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조교로 있던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가르치셨기에 조금 접한 정도였다. 내게 트라비아타는 진부한 스토리에 유치하고 단순한 음악이 나오는 오페라일 뿐이었다. 사실 트라비아타 뿐만 아니라 난 베르디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서울 까지 가서 보았던 아이다는 지루했고 그 뒤로 피가로의 결혼, 카르멘 등의 오페라를 찾아보긴 했지만 베르디의 작품은 전혀 듣지 않았다. '첼로는 쿵 세컨은 짝짝' 하는 거 따위의 반주를 듣고 싶진 않았다.
내가 정말로 트라비아타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부산에서 구자범 선생님의 트라비아타 특강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원작 소설을 읽고 선생님의 자세한 해설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오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딱 지금 어울리는 표현이다.
난 트라비아타의 세 막을 이렇게 요약한다.
1막 비올레타는 왜 알프레도와 사랑에 빠지는가.
2막 비올레타는 왜 희생을 결심하는가.
3막 비올레타는 얼마나 천사 같은가.
트라비아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지는 한 여자의 이야기 쯤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들이랑 헤어지세요'는 너무 익숙한 대사 아닌가.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수록 이 이야기가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있는지 감탄하며 공감하게 됐다. 가수와 연출가의 임무는 각각의 막에서 위의 사항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이다. 비록 좋아하는 오페라이지만 디비디만 많이 봤을 뿐 블루레이는 잘츠부르크와 그라츠 공연, 그리고 마젤 지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연만 구입했다. 그 중 마젤 영상은 잠깐 봤는데도 구리고 어머니의 평도 좋지 않아 굳이 꺼내보지 않았다. 네트렙코와 비야손, 햄슨 주연의 2005 잘츠부르크 공연은 라 트라비아타 뿐만 아니라 모든 오페라를 통틀어서도 가히 역대급이라는 표현이 과장되지 않은 공연이다. 콘비츠니 연출의 그라츠 공연 블루레이는 콘비츠니의 천재성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내가 지금 껏 본 모든 오페라 프로덕션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연출 중 하나다.
너무나 사랑하는 음반이 있다면 동곡의 다른 연주는 선뜻 손이 안가게 된다. 라 트라비아타 역시 최근에 나온 베로나 공연이나 글라인드본 영상 역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걸 사서 보느니 차라리 앞의 두 공연을 한 번 더 보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 그런데 담라우가 비올레타를 맡았다. 디아나 담라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프라노 중 한명이다. 마음 가는대로 현역 최고의 소프라노를 꼽자면 네트렙코, 하르테로스, 담라우, 슈템메 정도가 아닐까. 2014년 유럽 여행에서도 무리해서라도 꼭 담라우의 리사이틀을 듣고 왔다. 최근들어 담라우가 비올레타를 맡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았고 라 스칼라 영상도 유튜브에서 잠깐 보았지만 영상물이 나오다니, 고민할 필요 없이 구입했다.
담라우의 비올레타는 정말로 완성된 모습이다. 가수가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음악적인 테크닉이나 연기나 모든 것이 완벽하다. 글을 쓰면서도 완벽하다라는 말 이외에 어떤 단어를 써야할지 모르겠다. 레치타티보를 포함한 모든 단어들이 정확하게 전달되며 그 단어들의 감정이 하나하나 살아있다. 노래를 잘 한다 말고, 정말로 배역을 잘 한다는 건 이런거다.
2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째서 비올레타가 희생을 결심하는가이다. 원작에 따르면, 그리고 오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르조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정말로 고결한 인간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알프레도가 비올레타의 마음을 얻은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때문에 조르조가 비올레타를 자기 가문의 천사로 생각하겠다는 말은 비올레타에게 아주 중요한 말이다. 집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자신을 매춘부로 생각하고 아주 무례하게 대했던 그 조르조가 비올레타에게 진심으로 간청하는 것이다. 담라우는 l'angiol consolatore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이 없다는 듯 웃어버린다. 아 정말로 훌륭하다. 지금 조르조가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보여준다. 이 단어가 곧 비올레타의 폐부를 찌른다. 그 앞선 장면에서 조르조가 알프레도가 결국 당신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를 열심히 부정하다가 결국 è verro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표정변화는 정말로 감탄을 자아낸다. 비올레타의 모든 대사가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된다.
담라우의 레치타티보는 오페라 레치타티보의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공연에서 박자 맞춰서 하는 그런 딱딱한 레치타티보를 듣다 담라우의 노래를 들으니 이게 정말 레치타티보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고음들도 단순히 기교를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정을 담아서 소리낸다. 아 정말 이런 공연을 직접 보고 싶다.
담라우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연기라고 생각한다. 생기발랄한 수잔나, 청순가련하지만 용감한 질다, 순진한 소피 등등 어떤 역할이든 인물의 감정을 다양한 표정과 몸짓으로 효과적으로 잘 표현해낸다. 오페라에서도 연기는 중요하다. 가수들의 훌륭한 연기만 있다면 무대 연출이 아무리 단순하거나 진부하더라도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 뮌헨의 파싱어 파브릭의 작은 극장에서 그걸 직접 경험했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모두 진실되는 것, 그것이 정말로 드라마다. 담라우는 그런 점에서 최고의 연기자며 가수다.
데무로와 테지에 역시 훌륭하다. 특히 데무로가 이렇게 멋진 목소리를 가진 줄은 몰랐다. 어느 전설적인 가수를 닮은 것 같은데 누군지 떠오르질 않는다. 부드러운데 영웅적인 면모가 들어가있다. 하지만 두 가수 모두 연기가 많이 아쉽다. 담라우가 정말 완벽한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반해 둘은 거의 연기가 없다시피 하다.
연출 역시 특별한 것이 없다. 마네의 올림피아를 모티브로 삼았는데, 그림 그대로 흑인 하녀를 두기 위해 안니나를 백인 가수가 맡았음에도 흑인으로 분장시켰다. 2막에 합창단이 동작이나 노래나 정적이라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든다. 집시의 노래와 투우사의 노래 때 발레단의 성별이 바뀌어 남자가 여장 집시 무용을 하고 여자가 남장 투우사 무용을 한다. 하지만 별다를 건 없다. 비올레타가 그렇게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은 아마 연출이 아니라 담라우 때문일 것이다. 연출가가 그렇게 완벽한 연기를 지시할 수 있었다면 알프레도와 조르조가 그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연출보다는 오히려 카메라 연출이 더 훌륭하다. 카메라 감독을 연출가 본인이 맡았다. 때문에 다른 오페라 영상물과는 전혀 다른 앵글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 피트 사이드에서 가수를 찍어서 가수와 지휘자가 한 샷에 보인다거나. 무엇보다 오페라 시작과 끝을 한 관객의 관점으로 맞춘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머리 스타일이나 의상으로 보았을때 여성으로 추정되는 한 관객의 어깨 너머로 무대를 찍어준다. 막 시작이나 끝 뿐만 아니라 실제 노래 도중에서도 그런 샷을 보여주어 진짜 객석에서 무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게 현장감을 높여서 집중을 시킨다고 볼수도 있지만 소격효과 같기도 했다. 이것은 극장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라고.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Pretty Woman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감상하는 줄리아 로버츠를 연상시킨다. 굉장히 거슬릴 수도 있지만, 나에겐 묘한 긴장감과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하다. 감상을 방해함으로써 더 집중하게 만들다니. 아, 조명 효과가 상당히 카메라에서 효과적이다.
알프레도의 카발레타 Oh mio rimorso 와 비올레타의 Addio del passato 는 2절 까지 모두 부른다. 알프레도와 비올레타 모두 각각 2막, 1막의 카발레타 마지막을 고음으로 장식한다. 이상하게도 2막 조르조의 카발레타는 생략되었다.
지휘는 담라우를 잘 반주해준다. 담라우가 정말 가사 한줄한줄을 마음대로 요리함에도 열심히 맞춰준다. 정말 아리아에선 어디 하나 인 템포로 가는 마디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합창이 나올 때 박력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지만 담라우를 잘 반주해준다. 그거면 된다.
아마존 리뷰를 보니 담라우와 네트렙코가 서로 정반대의 길을 밟고 있다는 점을 지적햇다. 네트렙코는 비올레타를 자기 커리어 초기에 맡고 현재는 부르고 있지 않지만 담라우는 40을 넘어서야 비올레타에 아주 집중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담라우의 비올레타는 21세기의 새로운 레퍼런스다. 이 영상은 다른 것 필요 없이 담라우의 비올레타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감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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