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는 아주 흥미로운 소설이다. 라 트라비아타 공부를 위해 뒤마의 춘희를 읽기 위해 책을 빌렸는데 마침 마농 레스코와 커플링되어있었다. 춘희에서 소설 마농 레스코가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두 소설은 남자 주인공의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 이야기를 남자 주인공의 입에서 전해듣는 액자식 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마농 레스코라는 인물은 아주 특색있는 인물이다.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졌다가 배신한다는 점에서 카르멘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상당히 다르다. 마농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외를 사랑한다. 다만 돈이 충분히 없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전형적인 여혐 유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마농이란 인물보다는 데 그리외가 훨씬 더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원작 소설의 제목은 마농 레스코가 아니라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다. 데 그리외는 정말 사랑에 미친 사람이다. 한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읽다보면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미치도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마농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고 마농을 구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다 겪지만 그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마농 레스코를 원작으로 한 오페라는 두 개가 있다. 마스네의 마농,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다. 세비야의 이발사나 라 보엠의 케이스와는 달리 두 오페라 모두 표준 레퍼토리로 남아있다. 이런 예시는 파우스트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두 오페라 모두 각각의 묘미가 있다. 마스네의 작품에서는 3막에서 신부가 된 데 그리외에게 마농이 구애하는 장면이 아주 훌륭하다. 원작 소설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2막에서 마농이 데 그리외를 버리는 장면 역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푸치니의 작품은 3,4막이 원작과 더 비슷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 데 그리외가 절대 마농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나서는 장면은 데 그리외의 광적인 사랑을 잘 보여준다. 2막에서 마농이 거울을 들이밀며 데 그리외의 외모와 한 번 비교해보라는 원작의 에피소드를 교묘히 집어넣은 장면 역시 원작의 팬이라면 즐거워할 장면이다.


사실 2014년에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카우프만과 네트렙코 주연의 마농 레스코 공연이 있어서 표를 구입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워낙 인기 있었던 공연이라 예매하는 것도 실패하고 여행 일정도 맞출 수 없어서 결국 포기했다. 카우프만과 네트렙코라는 드림 캐스팅이 네트렙코가 오폴라이스로 바뀌었다는 점이 그나마 아쉬움을 조금 달래줄 뿐이었다. 딱 그 조합이 뮌헨 공연 전에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출연한 공연이 영상물로 발매되었다.


서부의 아가씨와 함께 비교적 덜 유명한 푸치니의 두 주인공을 카우프만이 맡았다. 카우프만이 최근 푸치니 앨범을 낸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안드레아 셰니에와 같이 베리스모 시대의 중요한 배역을 하나하나 정복해가고 있다. 카우프만의 가창은 이번에도 역시나 훌륭하다. 카우프만은 자신의 맡은 역할의 고뇌를 아주 잘 표현하는 가수다. 데 그리외는 끊임없이 강렬한 감정을 표현해야하는 배역이니 카우프만과 잘 어울리는 것이 당연하다. 

오폴라이스 역시 가창이나 연기력이나 모두 훌륭한 배우다. 바이에른 루살카를 보며 정말 무대를 압도하는 표현력에 감탄했었다. 하지만 마농은 글쎄... 잘 모르겠다. 카우프만과 함께 마농 레스코로 런던, 뮌헨, 뉴욕을 정복하고 다니지만 특별히 훌륭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물론 훌륭한 가수다. 하지만 어제 담라우를 보고 이를 듣고 있자니 특별함을 느끼기 힘들었다. 아직 내가 이 오페라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았던 탓도 있으리라. 흠을 잡으려는 건 아니고, 이게 최고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몰트만 역시 훌륭하다. 레스코는 훌륭한 가창보다는 극을 이끌어나가는 힘이 더 중요하다. 몰트만은 레스코의 시정잡배스러운 면모를 잘 보여준다.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지휘 파파노였다. 최근 보았던 오페라 영상들에서 '지휘가 괜찮네'라고 느낀건 그냥 평범한 것이었음을 알게됐다. 파파노의 지휘는 그냥 감탄이 나온다. 처음 시작부터 푸치니의 화려한 색채감을 놀라울 만큼 아주 잘 살린다. 뒤따르는 극적인 박력은 파파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녹음된 공연들이 기본적으로 오케스트라 게인이 높고 가수들 소리가 안들리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가수들 핀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점이 특히 파파노의 지휘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다. 


연출은 상당히 실망이다. 조너던 켄트의 연출은 글라인드본 히폴리트와 아리시, 나사의 회전, 로열 오페라하우스 토스카를 보았는데 모두 다 만족스러워서 어느 정도 기대를 했다. 하지만 이번 연출은 조금 달랐다. 그 전의 연출들은 비교적 무난한 편이었다. 영국 연출스러운 깔끔하고 사실적이고 아기자기하며 흥미로운 무대였다. 그런데 이번 연출은 조금 공격적이었다. 배경을 완전한 현대로 옮긴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현대 의상을 훨씬 지지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불편했다. 가수들의 동선이 음악과 조화롭지 않아서였을까?

특히 2막의 의상은 너무나 불편하다. 어디 감히 오페라에서 저런 상스러운 의상이냐- 라는 것이 아니다. 마농이 유흥을 사랑하는 여성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필요한 사치를 부리기 위해서이지, 그녀 자신이 창부인 것은 아니다.

왜 마농이 창부처럼 묘사되어야 하는가? 제론테는 마농에게 물질적인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기선 제론테가 마농의 미모를 활용해서 돈을 번다. 마농은 무용 수업을 듣는 대신 성인 비디오를 찍고 있다. 어째서? 마농은 제론테에게 감금된 것인가? 리브레토 상으로 마농은 제론테에게 지루함을 느낀다. 마농이 제론테와 만난 것은 마농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마농은 떠나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제론테가 마농과 데 그리외의 밀회 장면을 보고서도 그 자리에서 바로 대응하지 않고 퇴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제론테와 마농의 관계를 비틀어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을지 몰라도 오페라의 개연성을 희생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마농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3막과 4막 역시 시대를 현대로 바꿈으로써 얻는 이익이 없다. 아니, 현대로 바꾸었을 때 얻는 가장 중요한 점인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일이라는 것을 마농의 요상한 복장으로 파괴한다. 저렇게 옷 입은 인간에게 쉽게 공감하는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보너스 영상에는 마농이란 인물에 대한 다큐, 리허설 과정, 파파노의 음악 소개 등 짧은 클립들이 수록되어있다. 이 짧은 클립들을 왜 굳이 다 따로 쪼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로열 오페라 하우스 유튜브 채널에도 올라온 영상들의 하위호환이다. 

거기다 마농이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는 내용 역시 납득할 수 없다. 변덕스럽고, 쉽게 이해할 수 없으며, 데 그리외와 제론테 사이를 갈등한다라는데, 글쎄올시다. 소설 속 마농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있다. 항상 데 그리외를 사랑하되, 데 그리외가 돈이 없으면 돈을 얻기 위해 다른 남자에게 떠나는 것이다. 마농은 돈에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이 누리고 싶은 향락을 충분히 누릴 수 있냐 없냐만 중요할 뿐이다. 이건 프레보 본인이 지적한 사실이다. 이건 어느정도 오페라 리브레토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2막 끝에 비싼 집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든가 보석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장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 전체적으로 데 그리외에 대한 마농의 사랑이 흔들린다고 보긴 어렵다. 데 그리외와 살고 싶지만 사치도 그만큼 필요한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원작이나 오페라의 리브레토를 충분히 꼼꼼히 읽어보질 않아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농의 가장 큰 특징은 데 그리외를 한결 같이 사랑한다는 것, 그럼에도 충분한 사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 수 없는 허영이 있다는 것임은 분명해보인다. 조너던 켄트는 원작의 인물을 살리는데도 실패하고 설득력 있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데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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