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서 코플랜드의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가'를 열심히 읽었다. 코플랜드가 매카시에게 빨갱이로 몰렸던 걸 생각하면 군대에서 읽기에 안전한 책은 아닌 듯 하지만 다행히 별탈 없이 다 읽었다.


책에서 오페라를 한 챕터를 할당해 설명하는데, 여기서 아주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이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다. 물론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코플랜드가 이렇게 빨아재낄 작품인 줄은 몰랐다. 훈련소에 나온 다음날 바로 친구와 감상실 전세놓고 오페라 한편 보기로 이야기했는데 마침 이 작품을 꺼내들길래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영상을 처음 본 건 (에센 극장, 렌호프 연출) 2014년 쯤이 아닐까 싶다. 당시 지갑에 여유가 없던 나에게 블루레이 한 장을 산다는 것은 손이 덜덜 떨리는 일이었고 심사숙고를 거쳐 작품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집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니 참 놀라운 일이다. 요즘이야 그냥 보이는 대로 다 사 모으고 있지만 정말 2년 전만 해도 정말 블루레이 하나하나를 살 때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때나 요즘이나 드뷔시는 내게 참 어려운 작곡가인데 무슨 용기로 그걸 질렀는지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마 경기필하모닉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공연에 매료되어서 이 이야기를 꼭 오페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쇤베르크, 포레, 시벨리우스, 드뷔시. 한 문학 작품을 이렇게 많은 작곡가가 다룬 경우는 파우스트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야기 자체에 대해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였을까, 오페라는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봤던 것 같다. 원작 연극에 음악을 입혀놓은 듯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번이 두 번째로 보는 것이니 꽤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오페라를 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코플랜드의 책을 읽고 나서 음악의 내용에 집중하려고 했기 때문일까, 이 작품이 얼마나 섬세하게 짜여져 있는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음악은 순간순간이 고유하다. 작품을 보면서 추측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오페라의 리브레토는 메테를링크의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뒤 몇가지 삭제만 한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이야기가 너무나 연극적이라서 거의 연극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그랬다. 때문에 각 장면에 쓰인 음악은 희곡의 대사가 하나하나 고유한 것 처럼 매 순간 새로운 느낌을 준다.


이해하지 못한 작품에 대한 해석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렌호프의 연출이 친절했던 것에 비해 베흐톨프의 연출은 안 그래도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더 미스테리하게 만들어낸다. 등장인물들이 무대 위에 휠체어 탄 자신의 마네킹과 함께 등장한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추측하자면 서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껍데기와만 소통하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아 아닐까 싶다. 무대는 시종일관 얼어붙은 겨울을 보여주는데, 얼어붙은 무대처럼 내 머리 속도 굳어간다.


성악진 중에는 단연 골로 역의 미하엘 폴레가 돋보인다. 2004년이면 폴레가 비교적 듣보 시절일 텐데, 폭 넓은 표현력과 연기력은 이 때에도 살아있다. 타이틀 롤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지만 정작 가장 고생하는 인간은 골로라고 본다. 펠레아스나 멜리장드나 어딘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기묘한 인물인데, 오직 골로만 이 이상한 세계에서 인간다운 고통을 느낀다. 폴레의 나름 젊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펠레아스 역의 로드니 질프리Rodney Gilfry는 처음 들어보는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터펠이 나오는 가디너 피가로에서 백작 역을 맡았던 가수다. 목소리가 상당히 부드러워 펠레아스 역할에 잘 어울린다. 멜리장드 역의 이자벨 레이Isabel Rey는 취리히 오페라에서 종종 등장하는 가수인데 무난하지만 멜리장드 특유의 초현실적인 매력을 나타내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어보인다.

젊은 벨저 뫼스트의 지휘도 괜찮은 듯 하지만 내가 아직 드뷔시를 잘 지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맹아라 평가를 내리긴 뭐할 것 같다.


앞으로 몇번은 더 봐야 할 작품이다. 아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평할 수 있는 건 입문용으로는 에센 영상이 더 낫다. 대사가 쏟아지는 작품에서 자막이 한눈에 들어오냐 아니냐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인데다 연출 역시 렌호프가 훨씬 더 쉽고 간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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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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