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피리 리브레토가 그냥 커피라면 이건 TOP야.


생각해보니 라모의 작품을 한 번도 리뷰한 적이 없다. 라모 오페라 전체를 본 것은 글라인드본 이폴리트와 아리시 영상 뿐이다. 그래도 라모를 꽤 오랫동안 좋아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오페라 전막 경험이 너무 없구나 하고 조로아스트르Zoroastre를 골랐다. 


라모의 음악은 리드미컬한 매력이 철철 넘친다. 내가 라모 음악을 처음 들은 건 2009년 코프만 내한 때 다르다누스 모음곡을 연주했을 때였다. 이 모음곡 정말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탕부랭은 마음에 쏙 드는 곡이다. 그 뒤로 민콥스키의 상상교향곡 역시 실연에서 듣고 예습 복습 하면서 상당히 즐겨 들었던 작품이고, 무엇보다 쿠렌치스의 라모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쿠렌치스의 음색과 장기가 가장 잘 드러나는 명반이 아닐까 싶다.


라모의 오페라는 다른 바로크 오페라와 확연히 다르다. 오페라 세리아나 부파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확실한 구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해 라모의 오페라는 서정 비극tragédie lyrique으로 몬테베르디나 그 뒤의 바그너, 드뷔시를 보는 듯 하다. 글루크가 개혁하겠다고 한 모든 것이 사실 라모의 오페라에는 이미 다 완성돼있다. 서정적인 레치타티보, 곳곳의 발레 음악, 강렬한 합창, 합창과 독창의 조화 까지.


조로아스트르에는 체감상 레치타티보가 절반은 되는 것 같다. 실제로 레치타티보 분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기도 하고 레치타티보의 길이가 느리다보니 시간적으로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프랑스 서정 비극의 레치타티보는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와 전혀 다른 형태다. 몬테베르디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한 서정적인 노래로 심지어 베르디의 레치타티보에 비교해도 더 폭넓은 선율을 자랑한다.


나는 대체로 연극적인 면이 강조된 오페라를 좋아한다. 그래서 몬테베르디 - 글루크 - 모차르트 - 바그너로 이어지는 오페라 라인을 좋아하며 바그너 이후의 슈트라우스, 푸치니, 야나체크, 브리튼 등의 작품을 좋아한다. 라모를 비롯한 프랑스 바로크 서정 비극은 몬테베르디와 글루크의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으니 라모의 작품은 이론 상 내 취향에 딱 맞아야할 것만 같다. 하지만 어째 극에 도저히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리브레토가 심각하게 구리기 때문이다. 이폴리트와 아리시도 이것 보단 차라리 나았다. 


시놉시스는 대충 선을 대표하는 남녀 두 명(연인)과 악을 대표하는 남녀 두 명이 있는데, 악을 대표하는 두 인간이 선을 대표하는 남녀를 각각 사랑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폴리트와 아리시는 구체적인 배경이 있고, 신화 특유의 독특한 갈등이 있는데, 도대체 조로아스트르에는 각각의 캐릭터의 성격도 너무 단순하고 그럴싸한 극적인 사건도 없다. 서로 갑자기 등장해서 살리고 구하고 하는데 어떠한 논리적, 극적인 전개 방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언급한 시놉시스만 보면 헨델 리날도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래도 리날도는 시작부터 끝으로 가는 어떤 얼개가 있다. 주위 사람들의 역할도 대체로 확실하고 그 사이에 사람들의 갈등에서 흥미로운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크 오페라에서 리브레토가 구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당히 공들인 레치타티보가 나오고, 서정적인 아리아가 등장하는데 도대체 얘가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글루크의 오페라를 보면서 매순간 인물이 처한 상황이 무엇이고 그래서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전달되는 것과 달리 조로아스트르는 모든 면에서 불친절하다.


이 리브레토가 나에게 왜 이렇게 재미없게 다가올까 부클릿을 읽어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리브레토를 쓴 루이 드 카우삭이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작품 역시 프리메이슨 적인 사상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조로아스트르는 마술 피리 자라투스트라와 동일인물이다. 메이저 오페라 중에 내가 리브레토 제일 구리다고 생각하는 게 마술 피리인데, 이 작품에 비하면 마술 피리는 아주 다채롭고 환상적이며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에는 정말 어떤 흥미로운 전개도 찾아보기 힘들다. 겨우 이런 이야기에 음악을 붙여야 했던 라모가 불쌍할 지경이다.


리브레토가 이렇게 구리게 다가온 건 분명 피에르 오디Pierre Audi 의 연출이 너무나 황량하며 리브레토 자체로만 승부를 보는 무리수를 던졌기 때문이다. 18세기 바로크 극장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스톡홀름 드로팅홀름 궁정 극장에서 당시 무대 장치를 그대로 활용해 연출한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지만, 체스키 크룸로프의 스카를라티 오페라에서 훨씬 더 높은 퀄리티를 선보였다. 공연 시기는 이 공연이 앞서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황량하며 인상 깊은 사건을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등장인물의 갑툭튀로만 이루어져있는 작품에서 옛날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건 작품을 살려낼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라모의 재능이 빛나는 순간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4막에는 악의 무리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강렬한 합창과 춤곡은 바로크 오페라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표현력을 보여준다. 글루크 오르페오 지옥 장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외 아리아에도 훌륭한 작품이 있지만, 바로크 오페라에서 다카포 아리아가 아니며 구조가 불확실할 때 청중 입장에서 얼마나 당혹스럽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아리아 수가 다른 오페라에 비해 적기 때문에 적응이 안되기도 한다. 오페라 세리아에서 레치타티보 - 아리아의 반복이 단조롭다고 비판받지만 그 단조로움 안에서 관객이 편안하게 음악과 극에 집중할 수 있었겠구나라는 걸 직접 체감할 수 있다. 


크리스토프 루세Christophe Rousset의 이름은 바로크 음악 좀 듣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지만 오페라로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크리스티의 하프시코드 주자로 오랜 기간 활동했던 루세는 귀에 익숙한 서곡에서부터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극이 시작되면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을 통솔하는데 살짝의 아쉬움이 보인다. 일단 합창단의 앙상블이 무지카 에테르나 등에 비하면 뛰어난 편이 아니라 응집력 있는 소리나 특별히 따뜻한 소리를 기대하긴 어렵다. 오케스트라 역시 서곡에서는 훌륭하지만 극 중간중간 앙상블이 루세의 욕심을 못따라 온다는 게 조금 느껴졌다.


가수들은 대체로 훌륭한데, 특히 타이틀 롤을 맡은 스웨덴 테너 안더스 달린Anders J Dahlin의 티없이 맑고 비브라토 없는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상당히 아름다운 목소리인데 오페라 베이스를 찾아봐도 커리어가 썩 대단하지 않은걸 보면 아마 바로크 전문 가수 답게 성량이 후달리는 게 아닐까 싶다. 아멜리테 역의 시네 분드고르Sine Bundgaard는 소프라노인데 낮은 음이 좀 불안했고 오히려 악역인 에리니스를 맡은 소프라노 안나 마리아 판자렐라Anna Maria Panzarella가 목소리나 표현력 면에서 더 빛났다.

 

오페라는 160분 정도고 다큐멘터리가 1시간 가량이다. 다큐멘터리 내용은 충실하지만, 그래도 작품이 구리고 공연 퀄이 아쉬운 게 나아지진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작품 보는데 4시간 가까이 썼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해진다. 라모 음악이 궁금하면 모음곡으로 들읍시다.


한줄 요약: 그러니까 작곡가들은 프리메이슨을 멀리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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