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무대 연출, 하지만 아쉬운 가창.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는 말러 8번에 버금가는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만 150명 정도가 필요한 거대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지휘자 장윤성이 통영 음악제에서 2004년에 초연한 것이 유일한 연주로 알고 있다. 말러 8번이 종종 연주된 것을 생각하면 구레의 노래가 거의 공연되지 않은 건 쇤베르크에 대한 거부감과 작품의 오묘한 분위기 때문에 인기가 적기 때문으로 보인다. 1913년 2월 초연으로 봄의 제전과 같은 연도에 초연된 셈이다. 1년 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니 벨 에포크의 끝무렵이라는 상징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라토리오를 무대 연출로 올리는 경우는 흔하지만 신기하게도 구레의 노래를 무대 연출화 한 것은 이 공연이 처음이라고 한다. 쇤베르크는 본디 이 작품을 칸타타라고 이름 붙였다. 독창자는 주인공 발데마르 왕과 그의 연인 토베가 나오고, 그 이외에 굵직한 노래를 하나 씩 맡은 숲비둘기, 농부, 광대 클라우스, 나레이터(슈프레허)가 등장한다. 작품은 2시간에 못미치는 길이로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발데마르와 토베의 연애질, 그리고 숲비둘기가 토베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2부는 달랑 한 곡으로 발데마르가 빡쳐서 신에게 분노하는 내용이다. 3부는 발데마르가 죽은 병사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서며 농부와 광대 클라우스를 만나는 내용이다. 결국 언데드 병사들의 시간은 끝나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찬양하는 노래로 끝난다.


1, 2부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이해하기 쉽지만 3부가 진행되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헷갈린다. 3부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클라우스와 나레이터의 대사는 마치 아무말 대잔치를 보는 듯 난해한 비유로 가득차있다. 뭔가 광대가 나타나서 왕을 조롱하니 왕이 부끄러움을 깨닫는 것 같다는 클리셰적인 연결까진 가능한데 그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공돌이라서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시 하나 이해할 줄 모른다는 말 들을 때마다 발끈했었는데 다 보고나니 나의 부족함을 허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본 지 조금 지났는데도 여태 리뷰를 못 쓴 게 내가 뭘 본건지 머리 속에서 정리가 안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음악은 훨씬 쉬운 편이다. 쇤베르크의 초기작들일 그렇듯 조성적이며 적당한 긴장감과 탐미적인 선율이 모두 등장한다. <정화된 밤>이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떠올리면 된다. 서주부터 마음을 평온하게 녹여내리는 음악이 나온다. 발데마르가 말 타면서 부르는 노래(Ross! Mein Ross!)나 신에게 꼬장부리는 노래(Herrgott, Weisst du, Was du tatest)나 병사들의 합창처럼 다크포스 풀풀 풍기는 노래들도 흥미롭다. 종종 따로도 연주되는 숲비둘기의 노래(Tauben von Gurre!) 역시 비장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곡이다. 1부의 내용이 트리스탄 2막과 비슷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 숲비둘기의 노래는 트리스탄 3막의 황량함에 비유할 수 있다. 


연출은 네덜란드 오페라의 감독인 피에르 오디Pierre Audi가 맡았다. 피에르 오디가 연출하면 무대는 추상적이지만 독특한 구조로 남는다. 반지 사이클의 경우 아예 무대가 오케스트라 피트를 포함시켜버리도록 했고 아울리드 & 타울리드의 이피제니에서도 오케스트라를 무대 뒤편으로 보내버렸다. 그에 반해 이 구레의 노래 무대는 추상적이지 않고 상당히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구레 성은 오래된 대저택과 같은 아우라를 풍기며 가운데에는 멀쩡한 침대도 있다. 석양을 노래할 때 정말 무대의 조명이 석양빛으로 바뀌며 무대 공간이 사실적으로 비춰지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숲비둘기 역시 발퀴레 마냥 검은 날개 단 죽음의 천사로 등장한다. 이때 등장하는 피묻은 작은 방의 벽들이 상당히 사실적이라 또 한번 이거 오디 맞나 의심했다. 숲비둘기 날개가 조금씩 움직이는 디테일도 좋았다.

표지 사진이 방사능 쩌는 디스토피아 처럼 찍혔는데, 오히려 이런 장면은 별로 길지 않다. 표지만 1부로 바꿨어도 판매 실적이 조금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죽은 병사들의 의상이나 연기가 몰입감있다. 광대 클라우스는 달처럼 보이는 밝은 풍선을 메달고 다니는데 발데마르 왕을 태양으로 이끌기 위해 진실을 비춰주는 인물로 보였다.

네레이터 역할의 배우가 1막 시작 전부터 시를 읊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명히 뭔가 메시지를 주려고 넣은 거겠지만 정확한 의도는 읽기가 어렵다. 시어가 주는 분위기가 첫 전주곡과 꽤나 잘 어울린다. 결국 네레이터와 합창단이 마무리하는 작품이니 수미상관으로 극을 엮는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에 새하얀 복장을 입은 합창단이 고글을 끼고 태양을 찬미한다. 태양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햇빛에 눈멀지 않기 위해 고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아이러니다. 이 작품의 마무리가 단순한 뒤끝없는 구원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는 듯 하다.


마르크 알브레히트Marc Albrecht는 네덜란드 오페라의 마술 피리를 보고 나서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지휘자다. 첫 전주곡에서부터 독특한 아티큘레이션으로 귀를 사로잡는다. 알브레히트의 해석은 바그너나 말러적인 관능미를 강조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쇤베르크의 섬세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최대한 투명하게 보여주면서 극을 차분하게 이끌고 나간다. 클라우스의 노래가 끝나는 부분에 나오는 트럼펫 선율은 강조할 법도 한데 오히려 담백하게 가져가면서 감정을 절제한다. 대체로 목관 파트가 매우 뚜렷하게 강조돼있어 5관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 작품의 오케스트레이션의 매력을 더욱 확실히 표현해준다.


다만 아쉬운 건 가수다.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발데마르 역의 테너 부르카르트 프리츠Burkhard Fritz가 성량이나 음색이나 모두 아쉽다. 녹음 때문인지 오케스트라에 비해 너무 소리가 작아서 노래를 듣기가 힘들 정도다. 숲비둘기 역의 안나 라르손Anna Larsson이 가장 안정적이면서 깊이있는 노래를 들려준다. 농부 역의 마르쿠스 마르크바르트Markus Marquardt 역시 무난한 편이고 토베 역의 에밀리 마기는 목소리가 이 역할과는 조금 안 어울리는 느낌이다. 클라우스 역의 볼프강 아블링어-슈페르하케Wolfgang Ablinger-Sperrhacke는 그 동안 봤던 다른 역할에 비해 조금 아쉬운 느낌이다. 네레이터를 맡은 수니 멜레스Sunnyi Melles는 중성적인 복장을 입고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리지만 헤쳐나가려는 듯한 인물을 그려냈다. 


20여분 정도의 부가 영상이 있다.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 답게 인터뷰를 상당히 잘 뽑았다. 합창단 위주로 진행하면서 핵심적인 장면만 쭉쭉 보여줘 템포가 빠르다. 피에르 오디가 이 작품이 마치 뭉크의 절규에서 들리는 소리와 같다고 비유한 것이 인상깊었다.


가수만 좋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공연이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작품이고 입문용으로는 손색이 없으니 하나쯤 갖춰놔도 좋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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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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