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똘끼를 보여주는 오네거의 역작.


라모의 플라테를 보고나서 프랑스 또라이론을 언급했었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 오네거 역시 프랑스의 자랑스런 전통을 이어가는 작곡가였다는 걸 알게 됐다.


원래 오라토리오에 큰 관심이 없지만 이 작품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마리옹 코티야르가 타이틀롤을 맡은 영상물이 알파에서 발매됐기 때문이다. 거기다 주인공이 잔 다르크다. 유관순과 비슷한 생애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어렸을 적부터 자주 접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나에겐 무엇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캠페인으로 특히 기억에 남아있는 위인이다. 가히 에오윈이나 브리엔느 같은 여전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오페라는 베르디의 <조반나 다르코>와 차이콥스키의 <오를레앙의 처녀>가 있다. 둘 다 실러의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이름만 들어보고 여태 감상해보지 못한 작품이다. <조반나 다르코>는 최근 네트렙코가 타이틀롤을 맡아 녹음을 남기고 잘츠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해 잘 알려진 편이다.


<화형대의 잔 다르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잔 다르크의 최후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잔 다르크의 재판과 최후를 그리고 있는데, 장면들이 명확히 서사적으로 연결되는 편은 아니다. 화형대에 올라간 순간 수사 도미닉과 과거를 이야기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리브레토는 시인 폴 클로델이 맡았다. 내용이 살짝 난해한 편이라 잔 다르크의 일생(동레미, 랭스 대관식, 재판 과정, 출정하며 칼을 찾아낸 일화 등)을 알고 있는 편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오네거의 음악은 상당히 개성적이다. 호른 대신 색소폰을 사용하였고 옹드 마르트노도 포함시켰다. 음악의 스타일은 시시각각 변한다. 음침한 오라토리오 분위기를 띄다가도 거의 재즈처럼 들리는 부분도 있고 카드게임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관악 앙상블이 나온다. 필요한 양식은 무엇이든 차용해서 썼다. 특히 오케스트라의 연주 위에서 잔 다르크가 울부짖는 장면은 제프스키의 Coming Together를 연상시켰다.

황당한 장면이 많지만 그 중 가장 또라이 같은 부분은 잔 다르크를 재판할 주교를 뽑는 장면이다. 호랑이, 여우, 뱀을 부르지만 다들 재판을 거부한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있으니... 

음반으로 들을 때 어떤 놈이 계속 Je suis le cochon(돼지) 이라고 하길래 내가 잘못 들었나 했는데, 진짜였다. 잔 다르크 재판관을 동물로 비유했구나 감탄했는데 흥미롭게도 진짜 역사 속에서도 잔 다르크의 재판을 맡은 주교의 이름도 코숑이었다! 대신 철자가 Cauchon. 코숑 주교의 이름을 비틀어 이 무자비한 마녀재판을 동물 잔치로 만든 셈이다.

중간에는 4명의 왕, 여왕, 귀족들이 카드 놀이를 한다는 대화가 등장한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누가 이겨도 돈을 가져가는 넌센스의 연속을 통해 잔 다르크를 둘러싼 정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지적한다.


몇가지 모티프를 잘 활용하여 상황에 맞는 감정을 잘 축적해나간다. 처음에도 등장하는 Fille de Dieu, va! va! va!가 마지막에 Fille de Dieu, viens! viens! viens! 으로 바뀌는 순간은 음악과 가사와 극이 하나 되며 희열을 준다. 

하지만 가장 탁월한 점은 합창단의 활용이다. 각각의 성부가 개성있게 진행되는 복잡한 폴리포니를 구사하면서도 그 합은 뚜렷한 분위기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눈에 띄는 독창은 별로 많지 않고 합창단의 비중이 매우 큰 작품인데 잔 다르크를 비난하는 민중에서부터 천상의 목소리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오라토리오라는 장르적 특성을 매우 잘 살렸다고 할 수 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선율에서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의 향기도 종종 느낄 수 있다. 


영상 커버에도 드러나듯 이 작품의 스타는 단연 마리옹 코티야르다. 코티야르는 2005년 오를레앙(!)에서 이 작품을 맡기 시작해 최근까지 종종 무대에 서고 있다. 오페라 영상만 주구장창 보다가 갑자기 영화 배우가 화면 속에 있으니 비주얼에서 엄청난 위화감이 생긴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당연히 뛰어난 프랑스어 딕션으로 대사를 읊는데, 프랑스 전군을 지휘했던 용맹한 잔 다르크가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과 아주 잘 어울린다. 가만히 서서 노래하기 때문에 연기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표정과 목소리 연기와 미모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장면에서도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정도를 잘 조절해서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감정적으로 들린다. 죽음을 앞두고선 눈물을 뚝 흘리는데, 눈물 연기에도 클래스 차이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라고 외치고 나선 갑자기 닭똥같은 눈물 한방울이 쭉 떨어지질 않나, 눈을 감았다가 마지막 음표가 사라지는 순간에 딱 눈물이 흐르게 하질 않나, 거의 타악기 연주자급의 절묘한 타이밍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프로 눈물러! 다만 마지막 순간에는 '저기서 타이밍 맞춰 눈물 흘리려고 얼마나 집중하고 있을까' 생각하느라 반대로 몰입이 안 되긴 했었다. 중간에 동요풍의 노래도 잠깐 부른다.


다른 배우나 가수들도 훌륭하지만 역시 합창단이 가장 인상적이다. 내가 직접 본 오페라 공연에서 합창이 정말 좋았다고 느낀 게 빌바오에서 본 돈 카를로 때였는데, 확실히 스페인 합창단만의 저력이 있지 않나 싶다.


마르크 수스트로Marc Soustrot의 지휘는 깔끔하며 감각적이다. 프레이징 감각이 훌륭해서 음악이 생동감 있게 흘러가고 복잡한 합창 성부 역시 뭉게지지 않고 투명하게 들린다. 오케스트라의 색채도 훌륭하게 잘 이끌어내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모아 화끈한 모습도 보여준다.


한달 뒤에 떠날 독일 여행에서 처음으로 볼 작품이 바로 오퍼 프랑크푸르트에서 올리는 이 작품이다. 지휘자도 이 영상과 같은 마크 수스트로. 원래는 잔 다르크 역시 마리옹 코티야르로 캐스팅됐는데, 안타깝게도 코티야르가 임신 때문에 하차했다..ㅠㅠ 사실 일정도 잘 안맞고 이 작품을 잘 모를 때는 뭐 마리옹 코티야르 보는 게 뭐 중요하나 하면서 공연 자체를 제끼려고 했는데, 막상 보러가려고 마음 먹으니 코티야르가 하차했다ㅋㅋㅋㅋ 코티야르가 하차 안 했으면 공연이 매진되어서 못 봤을 거라고 괜히 위안을 삼고 있다. 


오네거를 전혀 모르거나 오라토리오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며 연주 역시 매우 훌륭하다. 같은 연주가 앨범으로도 발매됐으며 애플 뮤직에도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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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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