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는 뉘른베르크 근처였다.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나서 스스로에게 주는 상으로 뉘른베르크 슈타츠테아터에 가기로 했다.


학회에서 주는 맛있는 저녁이나 먹을까 한참 고민했다. 공연하는 작품이 오페라였다면 고민하지 않았겠지만 하필 뮤지컬이었다. 마이 페어 레이디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잘 알려진 고전이면 좋았겠지만 줄 스타인의 <슈가>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거기다 뮤지컬을 하면 자막도 없이 모두 독어로 번역해서 부른다.


뉘른베르크 극장까지 가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일단 뛰쳐나왔다. 뉘른베르크 극장을 찾아갈 다음 기회가 언제일 지 모르는 일이다. 


애플 뮤직으로 <슈가>의 브로드웨이 레코딩을 들으면서 갔다. 학회 일정 때문에 잠도 부족하고 발표도 끝나 긴장이 풀려 졸음이 쏟아졌다. 심지어 아직 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음반이 끝나버렸다! 이 뮤지컬에서 음악이 한 시간도 안 나온다는 말인가. 그럼 나머지 한 시간 반 동안 독어 개그를 알아먹어야 하는 셈이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저녁 식사 장소로 돌아가는 경로까지 알아봤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트램에서 내려 슈타츠테아터를 찾아갔다. 


멀리서 본 모습.

뉘른베르크에는 이런 성곽이 참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티켓을 사려고 하는데 뉘른베르크에는 당일 학생 티켓이 없다! 그저 당일에는 40% 할인만 해줄 뿐. 맨 앞에서 볼 생각에 설레고 있다가 당황했다. 티켓 남은 현황을 보고 2층 (로게) 사이드 좌석 중 뒷열을 달라고 했다. 가장 싼 티켓 중 하나다. 직원 분은 거기 있으면 무대가 잘 안 보인다며 4층을 추천해줬지만 내가 그냥 로게 뒷열을 주라고 했다. 어차피 그 구역 1열이 다 비어서 메뚜기 뛸 생각이었다. 할인 받아서 11유로 정도 줬다.


저녁을 못 먹었으니 간단하게 요기할 거리를 찾고 카페인도 섭취해야했다. 주위에 아무리 둘러봐도 간단한 간식 거리 파는 곳이 없어서 당황하던 차에 주유소를 발견했다. 그 전날 학회 저녁에서 같이 이야기하던 오스트리아 친구가 유럽에선 주유소에 가면 모든 걸 판다는 이야기를 해준 게 기억이 났다. 들어가보니 정말 거의 편의점 같은 곳이었다. 



간단하게 먹고 극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뮤지컬이라서 그런 지 전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극장 내부는 적당히 아담한 사이즈에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모습이었다. 


메인 라운지가 꽤 넓은 편이고 발코니와도 이어져있다.

인터미션 중 발코니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로비는 대충 이런 느낌.


로비에 있는 글룩 동상. 



앉은 자리는 대충 이런 뷰. 




가장 괜찮은 사진인 듯!




지휘자가 들어오는데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사람과 좀 달랐다. 확인해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아주 적은 수의 현악기와 색소폰, 트롬본, 트럼펫, 호른, 드럼 세트 등이 있었다. 색소폰 주자가 세 명이나 되고 종류도 다양했고, 세트 드럼이나 베이스도 재즈 스타일이라 저 사람들은 다 객원인가 싶었다. 그런데 색소폰 주자들이 중간에 클라리넷으로 바꿔 부르는 걸 보고 흠칫했다. 아 저 사람들 지금 다 진짜 슈타츠테아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구나ㅋㅋㅋㅋㅋ

오케스트라 피트. 트럼펫 셋, 트롬본 둘, 호른 한명이었다. 목관은 모두 클라리넷 & 색소폰이었던 듯?



뉘른베르크 필하모니 단원들이 대충 서울시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이런 단원들이 반주하는 뮤지컬을 언제 볼 수 있겠는가! 오리지널 재즈 빅밴드가 아니니 정통 재즈 느낌은 없다고 해도 어차피 내가 재즈를 모르는데 뭐. 금관도 씬나고 세트 드럼도 너무 튀지 않고 전체가 잘 섞였다. 극장 오기 전까지만 해도 졸려 죽을 것 같았지만 신나는 연주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프로그램에 영어 시놉시스가 있어 극의 내용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뮤지컬은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 “Some Likes It Hot”(뜨거운 것이 좋아)을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두 남자 재즈 뮤지션이 갱단의 범죄를 우연치 않게 목격한 뒤 갱단의 추격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여장하고 여성 재즈 밴드에 들어가서 겪는 일을 다루고 있다. 한 남자는 재즈 밴드의 보컬인 ‘슈가’와 사랑에 빠지고 다른 한 명은 여장을 하며 새로운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며 나이든 부자와 사랑에 빠진다. 이 나이든 부자가 모든 것을 포용ㅎ며 마지막에 하는 대사가 참 유명한데, 59년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히 선구적인 셈이다. 뮤지컬은 13년 뒤인 1972년에 초연되어 내용이 유행에 뒤쳐진 뒤라 별로 흥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출은 다채로운 무대 변경과 적딩한 몸개그, 귀여운 안무들로 채워진 고전 뮤지컬 연출이었다. 적당한 수위의 섹드립들이 들어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즐겁게 했고 마지막의 명대사는 독어가 아닌 영어로 했다.


주역 배우들은 모두 전속 가수가 아닌 뮤지컬 배우였지만, 늙은 부자 오스굿 역할에는 나이든 테너가 등장했다. 중간에 엔리코 카루소 드립칠 때 Ridi pagliaccio!와 Vincero!를 열창하여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슈가 역의 가수는 노래도 참 잘했지만 두 남자 주인공 역은 노래를 잘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 했다. 


오페라 극단이 뮤지컬을 올린다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생각하기 힘든 일이지만 독일 극장에서는 일상이다. 다양한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할 수 있는 공연이기도 하지만 공연 퀄 자체도 참 신경을 많이 쓴다. 뮤지컬이라고 해서 대충 공연한다는 인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뮤지컬 공연에 오케스트라 반주가 나온다고 하면 초라한 편성이거나 대부분 오브리 연주자로 채워지는 게 보통이며 지방 시향에서 이런 고전 뮤지컬을 공연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국립오페라단이나 대구 오페라하우스 같은 곳에서 마이 페어 레이디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작품을 올리는 것도 환영받지 못할 테다. 오케스트라 반주의 고전 뮤지컬은 뮤지컬 팬이나 오페라 팬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인 듯 하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공연한 <쇼 보트>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선 즐거운 저녁이었다. 언젠가 우리나라 오페라단도 이런 뮤지컬을 공연할 여유가 생기면 좋겠지만, 너무 큰 바람인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트램을 타러가기 전 급하게 찍은 샷. 찍고보니 기울어져있다. 놓쳐서 아쉬운 아틸라를 계속 광고하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