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 슈투트가르트.


오퍼 슈투트가르트는 꼭 가보고 싶은 극장이었다. 올해의 오페라 극장으로도 자주 선정되었고 국내에서 파르지팔을 초연한 로타 차그로세크가 게엠데로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상물이 많지는 않지만 슈투트가르트 반지의 경우 아주 독특한 연출과 차그로세크의 투명한 반주가 인상적이었다.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은 오펀벨트에서 올해의 프로덕션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이다.


게엠데인 실뱅 캉브를랭과 예술감독인 요시 빌러 & 세르조 모라비토의 콤비로 <스페이드의 여왕>을 이번 시즌에 새롭게 올리는 공연이었다. 당연히 기대 1순위.



학회가 끝나고 느긋하게 가려다가 기차 시간을 1시간 정도 착각해 큰일 날 뻔 했다. 다행히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연 1시간 전에 슈투트가르트 역에 도착했기 때문에 캐리어를 끌고 곧장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내가 좀더 머리가 좋았다면 갈아입을 옷가지만 챙기고 캐리어는 기차역 코인 락커에 넣어놓고 다음날 찾아갔을 텐데,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



오퍼 슈투트가르트 역시 당일 학생 티켓을 판매한다. 대충 1시간 전쯤 가야지 하고 바로 갔더니 공연 20분 전부터 판매한다더라. 캐리어를 맡겨놓고 주위에서 간단한 간식을 사먹고 극장에 들어갔다. 할머니들이 자기 표를 팔려고 말을 걸었지만 학생 티켓은 깡패다. 10유로에 90유로 정도 가격의 4열 티켓을 구매했다. 이렇게 싼 티켓을 구할 때 마다 짜릿하다. 독일 국민의 세금으로 오페라를 보는 이 기분.


발코니



슈투트가르트 오퍼는 신궁전과 붙어있다. 주말 동안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체육 축제가 한창이라 공원이 부스로 가득차있었다. 1층과 2층의 로비는 상당히 쾌적한 편인데 3층 4층은 약간 칙칙한 느낌이었다. 높으신 분들 드나드는 곳과 서민들 드나드는 곳의 장식이 다른가보다. 


내부는 상당히 고급스럽다. 보라빛의 무대 커튼도 인상적이고 어두운 실내 톤이 안정감을 주었다. 천장 그림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있는 극장이다. 





차분한 서곡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슈투트가르트의 피트는 지휘자가 인사를 할때도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깊은 곳에서 퍼져나오는 오케스트라 소리는 어두웠고 부드러웠다. 


이윽고 막이 올라가고 무대가 드러났다. 불규칙한 형태의 목조 구조물로 이루어진 회전 무대였다. 벽면 중 일부는 오퍼 슈투트가르트의 로비를 연상케하는 민트색 계통의 색상이었으며 그 앞에 극장 좌석이 놓여져 있었다. 무대의 구조물은 상당히 높은 곳 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등장인물들은 위아래를 복잡하게 오가며 무대를 아주 폭넓게 활용했다.


빌러 & 모라비토 콤비가 초점을 맞춘 것은 사회에서 소외되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톰스키 일당은 껄렁한 동네 청년들로, 찐따인 게르만을 괴롭힌다. 고양이 그림으로 가득찬 원피스를 입고 있는 리자 역시 자신의 결혼을 질투하는 폴리나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 때 폴리나 역 가수의 썅년 연기가 진짜 일품…. 왕년에 껌좀 씹어본 분인 것 같았다. 여백작 역시 그저 왕년에 잘 나가던 히스테릭한 할머니로 주위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다. 


이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1막의 어린이 합창 장면에서도 왕따 당하는 아이를 한 명 넣는다. 간단한 장치이지만 이 연출을 관통하는 중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게르만은 일종의 히키코모리 변태로 보인다. 하악하악 나의 리자 쨩 훔쳐 볼거라능! 내 리자 쨩 절대 남에게 줄 수 없다능! 

그래서 밤 중에 리자를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아예 칼을 들고 위협한다. 정신나간 변태 스토커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런 변태를 또 사랑하는 리자 역시 보통 미친 게 아닌 것 같다.  왕따 당하는 사람으로서의 동지 의식이라도 느낀건가. 히키코모리 남주와 왕따당하는 순진한 여주의 사랑. 뭔가 일본 만화에 나올 것 같은 설정 같다. 아 전 일본 만화 별로 안 봤습ㄴ


제일 골 때리는 부분은 바로 게르만과 여백작의 관계다. 여기서 빌러와 모라비토는 아주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사랑에 빠진 세 번째 남자가 너에게서 세 카드의 비밀을 강요할 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라는 예언에서,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여백작에게 사랑에 빠졌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차이콥스키가 의도한 내용은 그게 아니겠지만, 이 연출의 게르만은 그렇게 이해한다. 그래서 여백작을 찾아가서 직접 몸으로 유혹한다! 물론 히키코모리라 섹시한 유혹은 아니고 역시나 칼 들고 찾아가서… 늙어버린 여백작은 게르만의 구애에 희열을 느끼며 복상사한다. 문자 그대로 복상사였다. 홀로 외롭게 잘 나갈 때 만났던 과거의 남성을 한 명씩 읊던 여백작에게 참 잘 어울리는 결말 아닌가.



여백작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엘리베이터 느낌의 상자를 타고 나온다. 밑에 바퀴가 달린 전화부스 느낌인데 거의 자동차에 가까운 크기다. 게르만은 죽은 여백작을 다시 이 상자에 태우는데, 마지막에 게르만이 죽고 난 뒤에는 여백작과 리자가 나타나 게르만을 이 상자에 태우고 무대를 한 바퀴 돈다.


그 외에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것 같은 연출 장치가 눈에 띄었다. 1부의 끝과 2부 시작 전에 일부러 막을 그대로 열어놨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공연이 끝나면 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연장, 혹은 그 자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테다. 리자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자살할 때 내는 끔찍한 비명 소리 역시 베리스모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2막에 나오는 극중극은 여흥으로만 들어간 줄 알았는데, 이를 폴리나가 ‘사랑 대신 돈을 선택한 리자’를 조롱하는 연극으로 해석했다. 극중극에서 클로에는 돈많은 플루토 대신 다프니스를 선택하는데, 현실의 리자는 반대인 셈이라는 것이다. 옐리츠키는 이 연극이 자길 비웃는 지도 모르고 다프니스를 선택한 클로에에게 박수를 치고 있고, 폴리나의 조롱을 이해한 리자는 화가 나서 눈치없는 옐리츠키의 뺨을 때리는 것도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캉브를랭의 지휘는 안정적이었고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고급스러웠다. 특별히 신선한 해석은 없었지만 작품에 담긴 극적인 힘과 선율미를 한껏 잘 살려낸 모범적인 연주였다. 슈투트가르트 합창단은 연기력도 많이 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가 일품이었다. 물론 노래도 탁월했다. 이런 저런 연기를 하느라 정신이 사나울 법도 한데 앙상블이 무너지지 않았다. 합창이 상당히 자주 나오는데 매 순간 소리가 깨지지 않으며 뚜렷한 소리를 냈다. 


전속 가수로만 캐스팅하는 극장의 경우 주역과 조역 간의 격차가 작을 수 밖에 없다. 좋게 말하면 조역들이 다 잘하고, 반대로 말하면 주역이 돋보일만큼 뛰어나지 않는다. 게르만과 리자, 톰스키가 특히 훌륭했으며 여백작이나 옐리츠키는 조금 아쉬운 편이었다. 체칼린스키를 비롯한 톰스키 일당들은 오히려 작은 파트였지만 참 잘해줬다.


기대했던 만큼의 대박 공연은 아니었지만 어느 하나 흠잡을 것 없이 안정적인 공연이었다. 극장 내부에서 느껴지는 차분하며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닮아있는 공연이었다.



여기가 국발의 본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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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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