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사 새옹지마.


엘프필하모니에서 공연이 끝나자 부랴부랴 지하철 역으로 돌아갔다. 하노버로 가는 기차가 1시간 남짓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날 오후에 어떤 공연을 보느냐 고민을 많이했다. 구레의 노래가 아침 11시니 오후에 공연을 하나 더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 셈이다. 하지만 공연이 1시 15분이 넘어서 끝나기로 예정돼있었으니 갈 수 있는 도시는 베를린과 하노버 정도였다. 베를린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은 래틀이 지휘하고 베스트브룩이 주연을 맡는 슈타츠오퍼의 <카탸 카바노바>가 있었고 네제세겡이 지휘하고 디도나토가 노래를 하는 베를린필 공연이 있었다. 하노버에서는 화란인을 공연했다. 공연 일정 짜는 고민을 많이 들어준 클덕형은 무조건 디도나토라면서, 디도나토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봐야하지 않겠냐며 강력하게 뽐뿌를 넣었다. 하노버 오페라는 20년 뒤에도 있겠지만 20년 뒤의 디도나토가 지금 디도나토일 것 같냐 라는데 나도 할말이 없더라.


하지만 결국 하노버로 정했다. 베를린은 가본적이 있으니 안 가본 곳에 대한 욕심이 컸다. 거기다 하노버는 구자범 지휘자가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극장이다. 한창 까들이 성행할 때 슈타츠테아터 하노버 홈페이지에 들락날락하면서 정보 검색하느라 홈페이지도 괜히 정이 가고 익숙하더라. 그리고 어떤 수준의 극장인지 내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기대가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지휘를 맡은 이반 레푸지치Ivan Repušić는 하노버의 새로운 게엠데로 뽑혀 16/17시즌 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그가 부임후 첫 공연으로 올린 작품이 바로 이 화란인이다. 감독 취임 시즌이니 당연히 자신있는 작품을 골랐을 테고 그만큼 공도 많이 들였을테다. 원래는 9월에 마농레스코를 올리기로 했지만 아파서 캔슬되고 2월에 화란인 프리미어로 게엠데 취임 이후 첫 오페라 공연을 올렸다. 공연의 성공은 공연 단체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이냐보다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한 공연이냐로 결정되곤 한다. 여기에 이 날은 화란인의 이번 시즌 마지막 상연이었다. 멋지게 대미를 장식하고 싶을 테니 긴장감도 높을 것 같았다.

유튜브에 클립이 많지 않지만 이 레퀴엠도 잠깐 들어보았지만 괜찮았다.


하지만 오페라를 보러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함부르크에서 하노버로는 기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데, 이전까지의 여정에 비하면 많이 짧은 편이라 여차하면 입석으로 가면 된다는 생각에 좌석 예매를 안 했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의 기차역이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피난민 열차가 따로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방황하는 한국인의 신세란 어쩔 수 없다.


도착해서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공연은 6시 30분에 시작이었고 학생석은 30분 전부터 판매였다. 하노버 극장은 기차역에서 매우 가깝고 숙소와도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원래 하노버 궁전이라도 관광하려고 했지만 이미 구레의 노래를 볼 때부터 몸에서 카페인을 갈구하고 있었다. 무조건 자야했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마음은 약간 우울했다. 일단 엘프필 공연이 끝나고 일종의 허무함이 몰려왔다. 원래 공연을 보고 나서 페북에 자랑질 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기분도 안 났다. 완벽한 음향과 독창자로 구레의 노래를 들었다며 내 인생 공연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봤자 직접 본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아무도 태클은 못 걸겠지만, 없는 감동을 지어내서 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여기에 공연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피난민 열차타고 다시 생전 처음 보는 도시로 와서,  여친님께 한 소리 듣고 쓰러져 잤다가 비몽사몽 일어나서 극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목요일 저녁에 도착해 목금토일 4일 동안 공연을 8개 보고 9개 째 보러가는 순간이었다. 이런 일정을 소화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구레의 노래를 듣고 나서 현자타임이 왔다. 여기에 아라벨라에서 음향과 반주에 대한 실망도 있고, 함부르크 오퍼에서 느낀 연출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내가 너무 무리해서 돌아다니느라 공연을 봐도 감동을 못 받고 있는 건 아닌지, 겨우 공연장에서 인증샷 찍고 깃발 꽂으러 돌아다니고 있는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슈타츠테아터로 걸어갔다. 이날 아침에 엘프필하모니 앞에서 티켓 구하고 씐나서 엘프필 사진찍겠답시고 핸드폰을 들어올렸다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셔츠에 쏟아버렸다. 화장실에서 대충 비누로 닦긴 했지만 냄새가 심하더라. 우울한 기분도 날릴 겸 시원한 흰색 셔츠로 갈아입고 나갔다.




슈타츠테아터는 오래 전부터 있던 건물인 티가 확 났다. 오페라베이스에서 보던 그 하노버 극장이 내 눈앞에 있었다. 


공연 일정을 짜면서 티켓을 예매해야할지 학생할인으로 살지 일일이 티켓 판매 상황을 보며 결정했다. 제일 놀랐던 게 하노버 공연 티켓값이 상당히 비쌌다는 점이었다. 최고가가 130 유로였다. 함부르크나 라이프치히보다 더 비싼 가격이다. 브라운슈바이크나 칼스루에 극장이 비싼 티켓이 40유로 남짓인 걸 생각하면 하노버는 원래 잘 사는 동네인가 싶었다.

뭐 티켓가격이 저렇게 비싸도 자리가 남으면 다 학생할인으로 파는 거니 잔여 좌석 상태를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기쁜 마음으로 박스 오피스에 갔다. 가서 당당하게 학생 티켓을 한 장 달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직원 분이 오늘은 안 된다고, 이번 공연은 reduced ticket 이 없다고 알려줬다. 순간 멘붕. 분명히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설마 그 창렬한 가격으로 진짜 봐야하나? 혹시 이 직원이 내가 외지인이라고 거짓말 하는 건가 쓸데없는 의심까지 생겼다. 이거 보러 하노버까지 온건데 안볼 순 없었다. 가장 싼 티켓이 47유로고 그 위에는 70유로였다. 47유로 좌석을 하나 달라고 해서 티켓을 샀다.


극장을 나오니 안 그래도 우울한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아 내가 하노버 까지 와서 바가지 쓰고 가는 건가. 마! 내가 프랑크푸르트도 11유로에 보고! 라이프치히도 20유로에 보고! 함부르크도 15유로에 보고! 1층에서 다 봤는데! 하노버에서 제일 안 좋은 3층 사이드 자리를 47유로 주고 보라 이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형 말 듣고 베를린이나 갈 걸 궁시렁 거렸다. 배는 채워야해서 근처에 간단하게 파는 집이 없나 둘러보는데 일요일이라고 가게들이 다 닫았더라. 역 근처 광장에서 핫도그를 파는 집이 있길래 핫도그와 페트병 네스티를 샀다. 벤치에 앉아 먹으려는데 핫도그를 놓을 곳이 마땅히 없어 네스티를 다리사이에 끼고 뚜껑을 돌렸다. 하지만 다리로 누르는 압력 때문에 네스티 뚜껑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왔다. 기분 좋자고 갈아입었던 흰색 셔츠와 바지에 네스티가 잔뜩 묻었다. 설상가상으로 핫도그는 케첩 범벅이었고 먹고 있으니 손은 완전히 지저분해졌다. 옷에 음료수를 쏟고 손에 케첩을 묻혀가며 핫도그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내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보였다.


 이 와중에 어떤 독일 남자가 다가오더니 벤치 앞에 있던 맥주병을 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바라본다. 뭐지 안 그래도 기분 나쁜데 지금 시비 거나 했는데, 다른 벤치가 가득차있는데 내가 벤치 한가운데서 네스티 쏟은 자리를 피한다고 쩍벌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비켜줄 수 있냐는 의미였나보다. 옆사람이 비켜주니 그곳에 앉아 나에게 시덥잖은 말을 건다. 나는 거의 넋이 나가 있는 상태라 영어도 안 떠올랐고 그 사람도 영어가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나를 놀리려는 생각은 전혀 아닌 것 같고, 그냥 낮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나보다. 내가 오페라를 보러가야한다고 하니, "어 그게 나 아는데 그 플리..뭐 홀랜..." 오늘 하는 오페라 제목을 알고 있다니 괜시리 사람이 괜찮아보였다. 구레의 노래에 나오는 광대 클라우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상한 날이었다.  어느 것 하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날이라고 해야할까. 음료수를 두 번이나 옷에 쏟았고, 기차는 입석으로 고생해가며 왔고, 아침에 본 공연은 실망이었고, 당연히 떨이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공연은 제 값내고 제일 구석에서 봐야했다. 인생의 패배자 처럼 핫도그를 먹고 있는데 술취한 외국인과 대화까지 해야했다. 객석에 들어가기 전에 프로그램을 사려고 하던 와중에 3.5유로를 잘못 알아들어 3유로만 냈더니 아저씨의 띠꺼운 표정을 받아야했고, 내 가방을 보관소에 맡기고 와야한다는 이야기도 훈계조로 들어야 했다. 정말로 안 풀리는 날이다.


로비는 화이트톤으로 단아한 매력이 있다.

이제 공연만 남았다. 이것까지 망하면 내가 왜 베를린을 놨두고 하노버에 왔을까 후회하며 현자타임이 올 것 같았다. 

극장은 말굽형태였고 내 자리는 4층 사이드의 가장 끄트머리였다. 객석은 텅 비어있었다. 역시 가격이 창렬이니 아무도 안 오나보다. 이렇게 자리가 많이 빈 건 처음봤다. 이거 곧 망하는 극장 아닌가 불안해졌다. 

옆에 있던 할머니들은 공연이 시작하려하니 중앙으로 메뚜기 하시더라. 나도 옮길까 고민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차라리 좋았다. 오케스트라가 잘 내려다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뭐 될대로 되라지.



지휘자가 입장하고 불이 꺼짐과 동시에 서곡이 시작됐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인터넷 기사에서 레푸지치의 반주가 폭풍같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워낙 폭풍우가 많이 나오는 홀랜더다보니 의례껏 하는 호평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 날까지 본 다른 공연과 달리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완벽히 호흡을 공유하며 혼연일체가 돼있었다. 해석 상의 독특한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케스트라가 이 음악을 어떻게 연주해야하는지 정말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폭풍을 묘사하는 현악기의 패시지는 확연한 다이나믹 차이를 보여주며 꿈틀댔다. 어느 단원도 트레몰로를 대충연주하지 않고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금관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튀어나왔고 목관은 차분하게 템포를 가져가며 부드러운 음색을 마음껏 뽐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 음악이 본디 이래야만 한다는 듯 명징한 표현을 통해서 흘러갔다.

서곡이 끝나고 곧바로 막이 올랐다. 달란트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가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동안 돌아다니면서, 역시 실연에서 가수 목소리 안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냥 방에서 영상보는 게 최고인가 살짝 회의감이 들었었다. 그런데 하노버 극장은 달랐다. 울림이 많고 고급진 음향은 아니었지만 마치 6~70년대 라이브 오페라 레코딩을 듣는 느낌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작게 연주하는 것도 아닌데 가수들의 소리가 아주 뚜렷하게 들렸다. 여기에 달란트는 성량이나 딕션이나 표현이 모두 빼어났다. 

조타수는 달란트에 조금 못 미쳤지만, 뒤이어 등장한 홀랜더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거친 목소리와 산적같은 머리카락이 전형적인 홀랜더의 모습이었다. 트레일러에서 본 대머리 가수는 목소리가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가수는 내 기준에서 비브라토가 살짝 심하다는 걸 빼면 부족한 게 전혀 없었다. Die Frist ist um에서부터 가사에 적합한 표현을 훌륭하게 선보였다.

모든 부분이 잘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레푸지치와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포인트를 딱딱 짚어주면서 극을 끌고 갔다. 어느 하나 지루하거나 의미없이 흘러가는 부분이 없었다. 어떤 모티프가 나와도 확실한 늬앙스로 표현됐다. 거의 매순간이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합창단은 인원이 특별히 많지 않았지만 선원들의 합창에서 필요한 날것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글을 읽는 분들이 왜 연출 이야기가 전혀 안나오는지 궁금해하실 테다. 오페라를 보는데 연출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을 정도였다. 물론 연출이 평이했던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음악이 완벽한데 연출이 다 무슨 소용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내가 오페라 헛들었구나 싶었다. 


2막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여성 합창단 역시 탄탄한 앙상블을 보여줬다. 여기에 젠타는 또 얼마나 놀랍던지! 바그너 소프라노인데도 절제된 비브라토와 고귀한 음성을 가진 가수였다. 레가토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능력에 매력적인 음색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까지 했다. 젠타의 발라드는 마법에 빠진 듯 한 음성에서부터 사납게 쏘아붙이는 부분까지 엄청난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매 절의 시적마다 등장하는 고음은 짧고 정확하게 찔렀으며 빠른 부분에서 딕션의 거친 느낌을 활용하는 것 까지 탁월했다. 구원의 모티프에서는 벨벳같은 레가토를 선보여 황홀경을 선사했다. 발라드의 마지막 코다는 너무 오버하지 않으면서 담담한 심정으로 숭고한 용기를 가지고 노래하는 듯 했다.

에릭 역시 등장하는 첫 소절에서부터 깜짝 놀라게 했다. 아니 뭐지 이 이상적인 에릭은??? 젊은 헬덴테너역으로 딱 적합하게 목소리 질감이 적당히 거칠면서 쓸데없이 무겁지 않았다. 에릭이 비중이 크지 않고 전통적인 헬덴테너의 영역과도 좀 달라서 어중이 떠중이가 맡는 경우가 있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 제발 노래 좀 더 불러주세요!!! 젠타한테 애걸하기도 하고 쏘아붙이기도 하는데 이미 감정 과잉 상태인 에릭의 모습을 노래로 잘 표현했다.


배가 도착하고나서 여성 합창이 퇴장 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 부분이 특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레푸지치는 이 노래를 마치 도니체티나 로시니의 합창이라도 되는 냥 맛깔나게 살려냈다. 합창단의 오밀조밀한 앙상블이 분명하게 부각되며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스릴을 줬다. 


모든 독창자가 이렇게 잘 해내는데 걱정할 게 뭐가 더 있겠는가. 모든 순간이 너무 보석 같아서 이 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기록해놓고 우울할 때마다, 공연 보러가는 것에 현자타임이 올 때마다 되돌려보고 싶었다. 내가 이런 공연을 봤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 레푸지치는 이 작품에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적인 면모를 적극적으로 끄집어내었으며, 어디 한군데 변태같은 면모가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해냈다. 단순한 리듬 조합들을 맛깔나게 살려내고 선율을 풍성하게 살려낸 것이다. 아주 대단하거나 별다른 해석이 없어도 프레이징을 확실히 하고 오케스트라와 가수 간의 앙상블을 이끌어내는 것만으로 완전한 순간이 다가왔다.


홀랜더와 젠타의 황홀한 듀엣이 끝나고 달란트가 입장할 때 나오는 행진곡 풍의 음악은 어찌나 리드미컬한 지 얌전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주위에 아무도 없겠다, 내가 느끼는 격렬한 감정들을 몸의 자세로 온전히 다 드러냈다. 물론 그렇다고 이상한 짓을 한건 아닙니다 읍읍 

3막의 합창도 제대로 박살냈다. 하노버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가히 일류 오케스트라의 수준이라고 할만 했다. 이 부분에 담겨있는 선원들의 거친 에너지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유령선 합창은 아쉽게도 합창단의 부족으로 녹음된 소리를 스피커로 틀었다. 천장에서 유령들의 합창이 나오는데 이렇게 나올 때마다 지휘자가 왼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지휘했다. 대구 오페라 하우스의 악몽이 떠오르나 했지만 스피커 소리가 그렇게 조악하진 않았고 천장에서 들리니 독특한 공간감이 생긴 것은 좋았다. 또한 지휘자가 이어폰으로 소리를 확실히 들으면서 지휘했기 때문에 앙상블도 엇나가지 않았다.


에릭의 애걸과 홀랜더의 마지막 비장한 한마디 모두 멋있었지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젠타의 마지막 대사 "Hier steh ich, treu dir bis zum Tod!" 였다. 젠타는 이 폭풍같은 피날레에서 단 두 줄의 대사로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한다. 이 마지막 대사 중 treu에서 뻗어나가는 고음은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쥐어짜내는 고음이 아니라 제대로 걸려서 완벽한 공명으로 난 소리였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 나오는 이 음표 하나는 마치 내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넋이 나가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 그저 경이감에 차서 무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음표 하나에 담긴 수많은 감정과 노력과 감동이 음표의 길이만큼이나 늘어뜨러졌고 그 짧은 순간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완벽한 공연을 끝내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3층 어디선가 한이라도 맺힌 듯한 브라보가 나왔다. 아저씨 마음이 내 마음입니다. 박수를 치며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가수들이 하노버에 있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바이로이트에서 젠타 부른 리카르다 메르베스도 괜찮지만 이런 압도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바이로이트는 이런 가수 캐스팅 안 하고 뭐하는 걸까. 유럽 오페라 극장들도 결국 실력 순이 아니라 이름값으로만 캐스팅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연출을 짚어보자면, 배경을 쇼핑몰 이면서 동시에 크루즈의 일부처럼 보이게 했다. 유령선의 선원들은 마치 박물관에서 튀어나온 인간 처럼 보인다. 젠타를 고스 족으로 설정한 것 역시 '젠타 정신병자설'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조타수를 제2의 홀랜더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1막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에서 조타수는 여자 마네킹을 마치 겁탈하려는 듯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나서 마네킹을 집어 던져버린다.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여지지 않을때 폭력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남의 인상을 주었다. 재밌는 건 이 3막에서 다시 등장한 조타수가 유령이라도 된 듯 선원들이 조타수를 전혀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젠타가 홀랜더를 구원하고 '지하'로 내려가고 구원의 모티프가 나올 때 조타수는 성모 마리아 마냥 스카프를 두른 마네킹을 껴안고 있다. 조타수가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죄로 홀랜더와 똑같은 저주를 받았으며, 결국 자신이 모욕한 여성의 용서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직도 빈번한 어떤 나라에서도 꼭 필요한 연출이었다.

컨셉도 괜찮았지만 합창단의 안무도 정말 좋았다. 음악에 잘 어울리는 귀여운 안무를 넣어 음악의 에너지와 잘 어울리며 흥을 돋구었다. 공연을 보기 전에 읽었던 리뷰에서 연출을 많이 까놔서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아무리 까여도 독일 연출은 기본은 한다. 연출가 베른트 모틀은 1세대 바그너 지휘자인 펠릭스 모틀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모든 게 엉망인 하루였지만, 이 홀랜더가 구원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해가며 독일을 돌아다니나 하는 회의가 들었을 때, 이런 공연을 하나 보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깨달았다. 티켓값 47유로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공연인 줄 알았다면 100유로를 받는다고 해도 지갑을 열었을 테다. 


행복한 마음으로 극장 앞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렇게 완벽한 공연을 보고나서 맛없는 음식을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복한 여운을 만끽하고 있다가, 그래도 젠타와 홀랜더 이름은 기억해놔야지 싶었다. 이런 가수면 앞날이 창창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프로그램을 열고 캐스팅을 확인하는 순간 말 그대로 내 눈을 의심했다. 

네??????????? 

어이고 내가 요새 오페라를 하도 많이봐서 헛것이 보이나.... 무슨 젠타에 카밀라 닐룬트 같은 소리를..... 그리고 토마스 J 마이어는 이틀전에 라이프치히에서 만드리카로 봤는데요ㅋㅋㅋㅋ 뇌에서 이틀전 캐스팅 이름을 합성했나... 

그런데 다시 봐도 카밀라 닐룬트에 토마스 마이어다.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유튜브 트레일러에서 본 젠타와는 체형부터 다르긴 했다. 거기다 홀랜더를 다시 떠올리니 그제 봤던 만드리카랑 똑 닮긴 했다. 그냥 독일에서는 저런 산적 같은 헤어스타일이 흔한가 보다하고 아무 생각 안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 정도로 같을 리가 없다.

캐스팅 이름을 구라로 써놓진 않았을 거고, 내 눈의 착각이 아니라 분명하게 인쇄돼있었다. 거기다 노래를 다시 떠올려보면 그건 분명 바이로이트 급 노래였다. 그렇다. 방금 본 젠타는 카밀라 닐룬트였고, 홀랜더는 3년전 바이로이트 텔라무트로, 2년전 신국립극장 홀랜더로, 그리고 이틀전 만드리카로 봤던 토마스 마이어가 확실했다.  "바이로이트는 저런 가수들 안 데려가고 뭐하냐"라고 한탄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바이로이트 주역 가수들있던 거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하노버 전속 가수 대신에 저 두 사람이 나온 걸까?? 주역들이 아파서 대타를 급하게 구했는데 저 사람들이 ok 한건가?  설마 한국에서 까탈스러운 오페라 덕후 한명 온다고 특별 캐스팅이라도 해준건가


너무 궁금해서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답이 나왔다. Festlicher Opernabend (축제의 오페라 밤) 라는 제목으로 하노버에 특급 가수들을 불러서 공연하는 날이 있는데, 그게 하필 딱 오늘이었던 거다. 생각해보니 구자범 지휘자님이 한겨레에 쓰던 칼럼에서 호세 쿠라와의 공연이 바로 이런 Festlicher Opernabend였다. 티켓값이 130유로에 육박하고, 학생 할인도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아니 학생할인 없다고 대답할 때 오늘은 특별공연이라고 말해줬으면 내가 그렇게 우울하진 않았을 텐데... 



알고보니 홈페이지 일정에도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냈었다. 오페라베이스만 보고 결정하느라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은 한번도 안 읽은것이다. 

카밀라 닐룬트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하노버 슈타츠오퍼의 전속가수로 활동한 바 있다.




함부르크 구레의 노래가 아니었으면 라이프치히 <무영녀>를 보겠다고 마음 먹었을 테고 이 화란인을 놓쳤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가노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이 나를 하노버로 인도하는 큰 그림이었던 셈이다. 

침대에 누으니 자꾸 공연이 생각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하노버는 이런 극장이었다.



덧: 같이 돌아다니던 후배에게 하노버 극장 짱짱이라고 꼭 보라고 추천해줬다. 그래서 오늘 <운명의 힘>을 보러 갔는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은 하노버 극장은 거짓말처럼 진짜 폭풍우에 고통받게 되고.... 1부가 끝난 뒤 극장에 물이 새서 로비까지 물이 꽤 차올라 공연이 취소되었다고 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도대체 건물이 어떻게 되면 비가 새지ㅋㅋㅋ 유럽에선 오페라 극장에서 우천취소가 일어납니다! 독일 할아버지 할머니들 빡쳐서 소리지르면서 항의했다고ㅋㅋㅋㅋㅋㅋ 이런 불상사를 막고 오페라 문화 발전을 위해선 돔극장 도입이 시급합니다!  

인간은 운명의 힘을 이길 수 없고 예술은 자연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바그너적인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하노버 극장이다. 홀랜더 공연할 때 서곡에서 진짜 천장에서 빗물 떨어졌으면 간지 폭발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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