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연을 보고 나서 일주일 동안 나의 상태-


나: 앱뮤신님 제게 이 공연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다시 느낄 수 있는 음반을 찾아주소서


앱뮤신: 이 돈 조반니가 너가 찾는 돈 조반니냐

나: 아닙니다. 제가 들은 돈조반니는 이렇게 부드럽고 예쁘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앱뮤신: 그럼 이 돈조가 너가 찾는 돈조냐.

나: 아닙니다. 제가 들은 돈조는 이렇게 가볍고 걱정 없지 않았습니다.


앱뮤신:  그럼 이 음반이 너가 찾는 음반이냐.

나: 제가 들은 음악은 이렇게 트릭이 많거나 소리가 화려하고 거칠지 않았습니다.


앱뮤신: 그럼 이 가디너가 너가 찾는 돈조냐.

나: 비슷하지만 이렇게 시대악기 향기가 강하게 나지 않았습니다.


앱뮤신: 그럼 남은 건 이거밖에 없구나

나: 이거! 이겁니다! 현대 악기로 연주하긴 했지만 딱 이런 느낌이었어요! 템포도 다르지만 저 현악기 긁는 소리가 찰지게 들리는 것! 금관이 튀지 않는 것! 마치 모든 악기가 타악기가 된듯한 리듬감!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의 늬앙스 대비! 




화룡점정. 이 공연을 보고 귀국할 수 있다니 여한이 없습니다.



원래 이 공연을 보러 갈 생각은 없었다. 오페라 베이스의 일정대로라면 슈투트가르트 - 바젤 - 칼스루에 였다. 칼스루에 지크프리트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라는 걸 알고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월요일에 무슨 작품을 볼지 한참을 고민하다 마지 못해 이 작품을 골랐다. 게어트너플라츠테아터는 뮌헨에서 두 번째로 큰 오페라 극장이지만 베를린의 도이체 오퍼 - 슈타츠오퍼의 관계에 비할 바는 아니다. 



돈 조반니 많이 봤는데 굳이 돈 조반니를 또 봐야하나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 본 오페라들 중 절반 정도는 아마 한국에선 초연도 안 됐거나 (잔다르크, 아라벨라, 한여름밤의 꿈, 줄리에타와 로메오, 스페이드의 여왕), 그게 아니면 공연 된 횟수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화란인, 지크프리트, 구레의 노래). <유쾌한 미망인> 역시 우리나라에서 그닥 자주 공연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돈 조반니>가 가장 흔해 빠진 작품일 테다. 유럽 공연으로 한정해도 이미 잘츠부르크에서 본 적이 있으니 굳이 돈 조반니를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오죽하면 비행기 날짜를 다시 바꾸는 걸 알아봐야하나 싶을 정도였다. 전체 일정 중에 가장 기대가 안되는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이 돈 조반니였다. 그래도 한 가지 믿는 구석은 퀴빌리에 극장이라는 점, 그리고 지휘자가 게엠데로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래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샤이보이의 예지력.jpg
코미셰오퍼라길래 연출을 기대하고 갔는데 정작 코미셰의 옛 게엠데 페트렌코를 보는 것 같았다.




아. 정말로 마음 속 깊이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다. 내가 그 동안 듣고 본 것은 유사 <돈 조반니>에 불과했다. 그냥 동굴 속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본 어떤 모페라 공연도 모차르트의 본질에 이 만큼 다가가지 못했다. 감히 야콥스의 <코지 판 투테> 역시 이 공연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말하고 싶다. 


지크프리트를 볼 때 까지만 해도,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한다고 역시 바그네리안은 바그너를 들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 날 돈 조반니를 보면서 나의 숨겨진 모덕 본능이 살아났다. 그렇다 내가 처음 클래식 들었을 때 나는 분명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했었다. 하지만 공연을 위주로 파고다니던 대학 이후 우리나라에서 공연하는 모차르트란 다 별볼일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모차르트와 멀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이 공연을 본 것이다. 오페라라는 장르는 돈 조반니에서 한번 완성되었으며 돈 조반니야 말로 가장 완벽한 오페라다.





사진으로만 보던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건물을 지나 퀴빌리에 극장으로 왔다. 옛날 극장이라 내부 시설이 허름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기우였다. 로비나 화장실이나 매우 깔끔하다. 


게어트너플라츠테아터 역시 당일 학생 티켓을 판매하지만 내가 이 공연을 볼까 고민할 때부터 이미 표가 대부분 나가 있었다. 일단 퀴빌리에 극장의 객석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오케스트라 피트와 같은 선상에 놓은 로게 좌석을 예매했다. 학생할인 50%를 받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다행히 예매에 성공했다.






퀴빌리에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여기에 온 걸 후회하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내 눈 앞의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그 동안 아름다운 극장들을 나름 가본 편이었지만 퀴빌리에 극장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냥 압도적이다. 젬퍼오퍼가 예쁘다고 하지만 사실 그 흰색 내부 장식은 좀 촌스럽게 느껴졌다. 작센에 대한 짜증도 한몫 했겠지만 너무 부담되는 올화이트 패션처럼 느껴졌다. 퀴빌리에 극장과 다투려면 가르니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퀴빌리에는 가르니에와 달리 매우 아담하다. <돈 조반니>가 초연되고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등장한 에스타테스 극장과 비교해볼 수 있겠는데 퀴빌리에 극장이 더 화려한 편이다. 특히 난 붉은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퀴빌리에의 화려함에 완전히 넋이 나갔다.


오케스트라 피트를 위아래로 내리는 장치도 없기 때문에 연주자들도 1층 객석을 통해 입장해야한다. 이어 지휘자 마르코 코민이 등장한다. 게어트너 플라츠 테아터의 게엠데로서 올리는 마지막 오페라다. 내 마지막 일정을 맡겨도 괜찮은 지휘자인지 열심히 뒷조사를 했었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오랜 기간 독일 극장에서 지휘자로 활동했다. 특이하게 왼손으로 지휘봉을 든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코민이 지휘봉을 들고 서곡을 시작했다. 첫 화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에너지와 정갈한 음색은 이 공연이 어떻게 끝날지 예고했다. 길게 끌기 마련인 첫 코드의 끝을 매정하게 잡아 끊었다. 원래 저음은 더 길게 남아있지만 이것까지 함께 끊어버리는 과감한 해석이었다. 코민은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음악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현대악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모두 시대연주 주법을 제대로 쓰고 있었다. 플루트는 둘 다 나무 악기를 사용하여 특유의 가벼운 음색을 냈고 팀파니 역시 시대악기를 사용했다. 호른과 트럼펫은 현대 악기를 사용하였는데 코민은 둘의 소리가 튀지 않게 시종일관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트럼펫은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필요한 순간에도 절대 튀지 않았다. 음악은 현악기와 목관의 생생한 질감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 점에서 코민의 연주는 가디너나 야콥스의 반주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 점에서 코민은 쿠렌치스와 매우 닮았다. 



이날 밤의 기적을 어떻게 묘사해야할까. 

지휘 보면대 위에는 두꺼운 베렌라이터 스코어가 놓여있었지만 지휘자는 스코어를 펼치지 않았다. 오직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가 나오는 1막의 돈나 안나의 아리아와 2막 돈나 엘비라의 아리아에서만 잠시 펼쳤다가 다시 닫았을 뿐이다. 레치타티보의 박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건 다른 음악을 외우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일임을 감안해야한다. 지휘자가 암보를 한다고 해서 다 좋은 공연도 아니고, 좋은 공연을 위해 암보가 필수인 것도 아니지만 암보와 공연의 퀄리티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거기다 교향곡도 아니고 오페라를 암보한다는 것은 훨씬 까다로운 일이다. 지휘자들이 협주곡을 암보로 지휘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걸 떠올리면 된다. 이날 덮어진 스코어는 지휘자의 자신감과 결의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계약 연장에 실패한 지휘자. 지휘자의 의지가 아니라 극장 측에서 거부한 것이니 짤린 셈이다. 이미 작년 12월에 새 게엠데가 정해져서 언론에도 공표됐다. 하필 공연을 보러가도 짤린 지휘자 공연을 보는구나 싶었다. 혹시 단원들이 제대로 안 따르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표정을 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단원들은 지휘자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베이스 주자는 단 한명이었지만 워낙 강렬하게 연주하여 총주에서도 저음이 뚜렷하게 잘 들렸다. 제대로된 모차르틀 연주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한명의 음색이 잘 살아있으면서도 음량이 부족하지 않아야한다. 


코민은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지도, 너무 느리게 잡지도 않았다. 느린 곡은 오히려 살짝 빠른 느낌으로 연주했고, 빠른 곡은 오히려 조금 천천히 연주했다. 자연스레 템포 변화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느끼는 곡의 속도와 분위기가 절대적인 BPM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민은 모든 프레이즈에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서정적인 부분은 단순히 템포를 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부풀어오르거나 살짝 느려지는 섬세한 프레이징으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빠른 템포로 유명한 “샴페인의 노래”는 거의 랩 배틀이라도 되는 냥 빠르게 달리는 걸 자주 볼 수 있지만 코민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급하게 가지 않았다. 대신 평소대로라면 트레몰로로 머물렀을 오케스트라의 짧은 음표들이 확실하게 튀어나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멜로디의 악센트를 확실하게 살려냈다. 마지막에 크레셴도 되는 저음의 활약도 훌륭했다.


하노버에서 본 공연이 가수의 탁월함과 레푸지치의 호방한 지휘 때문에 행복했다면, 이 공연에서는 마르코 코민의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완전한 이해,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아름다운 음향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짜릿했다. 코민에게 이 오페라의 단 한 프레이즈도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였다. 사제가 성경의 구절을 한줄한줄 천천히 몇 번이고 읽어보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 <돈 조반니>를 준비했을 테다.  


가장 특별한 점은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아주 높았다는 점이다. 가수 대신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모든 걸 만들어갔다. 마치 푸치니의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가수는 잠시 그 위에 얹어가는 느낌대로 말이다. 극장 음향 때문일 수도, 내 자리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 반주에 담긴 음악적 텍스트를 빠짐없이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1막의 바티바티에서 보통 첼로 오블리가토 소리만 찐하게 들리는 음반이 많지만 코민은 첼로 오블리가토를 전체 성부 중 하나 정도로만 처리했다. 대신 오케스트라가 내는 다양한 소리를 전달하며 그 동안 수없이 돈 조반니를 들으면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음표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1막의 피날레, 2막의 6중창과 피날레에서 분주하게 떨리는 현악기와 목관의 빠른 음표들은 성악가 없이 그 자체만으로 천지를 흔들어 놓았다.


가수가 뭐라고 노래하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돈 조반니 역의 가수가 목소리가 멋있지만 조금 바보같게 들리는 프레이징을 가끔 한다는 것, 돈나 안나가 감정 조절 안하고 아무렇게나 막 지른다는 것, 돈 오타비오가 고음역으로 넘어가는 파사지오에서 시종일관 깽판을 치고 있다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중요하지가 않았다. 캐스팅이 A팀이 아니라는 게 티가 나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가 오케스트라가 만드는 음악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가 써놓은 오케스트라 스코어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었다. 코민의 지휘 아래에선 화성을 연주하는 파트 역시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연출 역시 눈이 가지 않았다. 무대가 잘 안 보이는 것도 있었고 무대 연출도 특별해보이지 않았다. 첫장면에서 돈나 안나가 돈 조반니와 눈이 맞았다는 연출은 이제 진부한 수준이다. 전반적으로 확고한 논리와 해석보다는 약간 파편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살짝 나이브하게 진행하는 느낌이었다. 곳곳에 나름 웃음 포인트가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코민의 지휘에는 이미 연출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극이 다 담겨있었다. 가수와 살짝 엇나갈때마다 오케스트라에게 주의를 주면서 마치 아바도를 보는 듯한 우아한 동작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비팅으로 자신의 프레이징을 표현했다. 각각의 프레이즈가 어디로 향하는지 이 음표는 짧게 해야할지 길게해야할지, 어떤 악기가 두드러져서 나와야하는지, 그 모든 것이 지휘자의 눈과 손에 담겨있었다.


코민의 지휘를 보는 게 얼마나 행복했냐면, 1막 끝의 파티 장면에서 여성 연기자들이 상반신을 다 노출한 채로 등장했지만 무대에 눈이 안 갔다. 여자 가슴 따위는 지금 이 예술혼 충만한 지휘자의 모습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사실 코민의 지휘에 대단한 걸 기대하진 않았다. 모차르트 전문도 아니니 국오에서 듣는 그런 연주 정도나 기대했다. 유튜브에서 본 카탈로그의 노래를 반주하는 것도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쿠렌치스 같은 걸로 귀를 맞추고 갔다간 실망이 너무 클 것 같아서 예습용으로는 일부러 네제세겡의 음반을 골라 갔다. 네제세겡처럼 작은 편성으로 적당히 절충주의 느낌을 내며 둥글둥글 예쁘고 세련된 음악이 나오겠지 싶었다.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난 건 시대연주의 약동하는 해석과 현대 오케스트라의 날카로운 앙상블이 합쳐진 결정체 같았다. 1막의 피날레 앙상블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코민은 모든 음표에 숨을 불어넣었고 오케스트라는 기가막힌 앙상블로 지휘자를 쫓아갔다. 여러가지 음악이 정신없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모두가 각각의 프레이즈를 어떻게 연결시켜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쿠렌치스 음반에서야 겨우 들을 수 있던 광란의 앙상블을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휘자-오케스트라-가수가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칼같은 정확함을 보이면서 말이다. 코민의 지휘와 비교하면 야콥스의 음반은 오케스트라의 에너지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느낌이다. 야콥스가 보여주는 극적인 트릭은 없었지만 코민은 정공법 안에서 세세한 늬앙스의 변화를 주었다.



난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거 현실입니까. 모든 오케스트라 악기가 이렇게 뚜렷이 들리고 가수 목소리도 정확하게 잘 들리는 극장에서, 지휘자의 모든 손짓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이도메네오>가 초연되었던 극장에서 <돈 조반니>를 보는데, 반주 퀄리티가 꿈에서야 그리던 그런 퀄리티라니. 올해 쓸 운을 지금 다 여기다 쓰고 있는건가….

2막이 시작할 때 입장하는 코민. 찍은 사진 중 이날의 아우라가 가장 잘 담겨있는 것 같다.



2막 역시 훌륭했다. 첫 음표부터 상큼하게 시작했고 가수들의 상태도 1막에 비해 훨씬 괜찮았다. 돈 조반니의 목소리는 확실히 섹시하고 매력적이었고 레포렐로는 아주 모범적이었다. 돈나 안나도 정신줄을 붙잡고 조금 덜 오버했으며 엘비라는 Mi tardì에서 날카로움을 살짝 억제하여 아주 매력적인 노래를 보여줬다. 돈 오타비오의 Il mio tesoro는 내가 참 좋아하는 아리아지만 오늘 만큼은 아리아가 짤려서 기뻤다. 아무리 오타비오가 보기보다 부르기 어려운 역할이라 해도 그렇지 오늘 오타비오는 정말 아니었다.



마지막 기사장 장면은 역시 돈 조반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진짜 극장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지휘자가 계약 연장에 실패하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히나보다. 모차르트가 써놓은 모든 음표가 시퍼렇게 날이 서서 극장을 가득 매웠다.



마지막 장면이 다가올 수록 가슴이 아파왔다. 분명히 돈 조반니를 보다보면 중간 중간 지루한 장면이 몇개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조반니는 기사장의 무덤 위에 레포렐로 몰래 글씨를 써두고 예수상을 떼어내 마치 석상이 말하는 것처럼 장난을 친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처리하려나 싶었는데 여자 석상을 껴안고 와서 장난을 치다가 석상이 돈 조반니를 미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 조반니가 미쳐서 입에 권총을 넣고 쏘는데, 이 때 극장이 암전되며 무대에서 객석쪽으로 흰 조명만 잠깐 빛나기 때문에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줬다.



이 순간 끝났으면 극적으로 충격적이며 깔끔했겠지만 예상을 깨고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이 이어졌다. 평소에 이 장면은 짜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늘 만큼은 싫어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분위기가 교차하는 이 피날레 역시 음악적으로 보석같은 순간이었고, 코민은 이 에필로그의 당위성을 음악으로 증명해냈다. 아쉬움과 아름다움이 섞여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브라비시모 마에스트로.



공연이 끝나고 나서 마치 Pseudo-쿠렌치스의 음악을 들은 기분이었다. 다시 쿠렌치스의 음반을 들으면서 떠올려봤지만 pseudo-쿠렌치스라는 건 마르코 코민에 대한 모욕이었다. 쿠렌치스의 음반을 들어도 이날의 짜릿함의 그림자만 겨우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공연이 끝나니 가슴이 먹먹하고 넋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레지덴츠 궁에서 헤메다가 발견한 출연자 출입구에 찾아가 지휘자가 나오길 기다렸다. 나온 뒤에 고급 세단을 타고 가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편한 차림으로 혼자 걸어가더라. 정말 정말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다고 말하고 같이 셀카를 찍었다. 오늘이 독일에서 마지막 밤이었다고 하니 어디서 왔냐고 묻고 헤어지기 전 내일 잘 귀국하라는 말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게어트너플라츠테아터가 이런 지휘자를 내쫓아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찾아보니 이 오페라단이 콩라인 답게 오페레타와 뮤지컬에 집중하는데 코민이 오페레타 안하고 무거운 오페라들만 집중해서 교체하기로 했다고 한다. 아니 오페레타로 먹고 사는 극장에서 퍼셀 <아서왕>, 브리튼 <피터 그라임스>, 차이콥스키 <욜란타>를 올렸다는 거죠? 인터뷰를 찾아보니 자신은 극장의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 특히 오페라 분야에서 먼저 높은 퀄리티를 완성하는 걸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뮤지컬이나 오페레타를 하려고 했는데 이제 짤렸다고… ㅜㅜ



퀴빌리에, 돈 조반니, 마르코 코민. 세 가지 중 하나만 빠졌어도 이런 경험을 못 했을 테다. 마르코 코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잘 설계된 돈 조반니를 볼 수 없었을 테다. 퀴빌리에가 아니었다면 오케스트라 반주의 디테일을 들을 수 없었을 테다. <피가로의 결혼>이나 <코지 판 투테>였다면 이런 한 맺힌 카리스마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을 테다. 



이런 공연을 예매해놓고서 ‘아 제발 망하지만 말아라’라고 기대했다는 거죠. 공항으로 돌아가는 내내 돈 조반니만 찾아 헤맸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쿠렌치스 만큼 코민의 지휘와 비슷한 음반을 찾지 못했다. 두 연주가 디테일에서 꽤 다르지만 전체적인 늬앙스와 분위기는 매우 비슷하다. 이 모든 게 오페라베이스가 칼스루에 지크프리트를 월요일이라고 잘못 알려줘서였다. 원래대로 일요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지크프리트가 끝나고 바로 귀국했겠지. 이런 걸 행운이라고 하나보다.




돌아와서 나도 1일 1코민 하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팔만한 자료가 없다ㅋㅋㅋㅋㅋㅋㅋ 한달 1코민 하기도 힘들듯 

영혼까지 긁어모으는 중. 오페라 패션에 바이마르에서 2008년에 공연한 윌리엄텔이 있어서 주문했다.


현재 찾을 수 있는 영상 중 이 날의 <돈 조반니>의 향수를 그나마 느낄 수 있는 영상. 

현악기의 보잉, 각 성부가 동등하게 균형을 이루며 입체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 총주에서 칼로 자르는 듯한 어택. 


슈포어 콩쿨 우승자 안네 루이자 크람 반주 영상. 음 브루흐는 그닥 뛰어나지 않은 것 같다.


레포렐로 역을 맡았던 Matija Meic과 작년 야외 공연에서 연주한 영상. 야외 공연인데도 오케스트라 반주의 통통 튀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 가수 역시 아주 부포로서 아주 훌륭하다.


극장 홈페이지에 있는 돈조 오디오 녹음은 내가 들은 것과 너무 다르다. 실황빨이 있겠지만 음향 상태도 너무 다르고 연주퀄도 많이 다르다. 그러니까 절대 그거 듣고나서 쟤는 왜 이런 거 듣고 저리 호들갑이지ㅉㅉ 하시면 안됩니다.



얘 이제 실직자인 것 같은데 한국에서 데려와서 아무 오페라나 한번 해주면 안되나요 어어엉어엉ㅇ 아니 그냥 모차르트 교향곡 공연이라도 좋으니.... 



여러분도 이름 외워두세요. 마르코 코민Marco Comin입니다. 베네치아 출신입니다. 얼굴도 이탈리아인답게 잘 생겼습니다. 2018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니스 출신이라고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합니다. 빌러 & 모라비토 콤비의 돈 파스콸레 프리미어라는 알토란 공연도 맡았습니다. 가끔 지휘하다가 실수로 지휘봉으로 보면대 쳐서 깜짝 놀라는 귀여운 면모도 있습니다. 이제 좋은 자리 좀 얻어서 라디오 중계라도 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ㅠㅠ 

덧. 남은 공연중 절반 정도가 차기 게엠데인 앤서니 브라몰로 바뀌어있다. 원래 전체 공연을 코민이 맡기로 한 걸로 아는데, 어째서 코민 공연 뺏어가는 거죠!!! 다음시즌에 같은 극장에서 돈조 한다고 이번 시즌부터 뺏어가다니! 죽써서 개주는건가! 

덧2. 이 다음날 뮌헨에서 바티스토니 지휘의 라 트라비아타가 있었는데, 조르조 제르몽이 도밍고여서인지 표값이 너무 비싸고, 비올레타도 욘체바이길래 그냥 포기했다. 그러고 돌아왔더니 욘체바가 캔슬해서 담라우가 대타뛰었다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 담라우 비올레타를 눈앞에서 놓치다니...... 하지만 코민이 좋았으니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제 일정은 끝났습니다. 시간이 나면 정리글을 다시 쓰고 싶지만 일단은 바쁜 일이 많네요. 긴 글 읽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돈 조반니를 모페라 중에 제일 많이 본 것 같은데 아직도 돈조 블루레이가 4장이 쌓여있습니다. 그나마 두장은 이미 디비디로 본 거지만... 아마 일이 끝나고 다시 오페라 영상물 리뷰를 쓴다면 돈 조반니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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