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아쉬운 가수진.


뒤카를 한곡갑 작곡가라고 부른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마법사의 제자는 누구나 알지만 그것 말고 뒤카의 다른 곡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테다. 왜 그런가 잠깐 찾아보니 뒤카가 자기 비판에 강한 사람이라 작품이 맘에 안든다고 폐기시킨 게 대다수이기 때문이란다. <아리안과 푸른 수염Ariane et Barbe-bleue>은 다행히도 뒤카의 자아 비판을 통과해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본 작품이다.

(Ariane을 아리아느, 아리안느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실제 발음나는 것이나 표기법 상이나 아리안이 맞다.)


이 작품과 연관된 오페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가 바로 버르토크의 <푸른 수염의 성>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작품 모두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있는 <푸른 수염>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푸른 수염이라는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마을의 처녀 한명을 강제로 데려다 결혼한다. 하루는 푸른 수염이 외출하면서 성의 열쇠를 부인에게 주면서 어떤 방이나 들어가도 되지만 지하에 있는 방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동화의 당연한 수순으로 부인은 호기심을 못 이기고 지하의 방에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푸른 수염의 전부인들의 시체가 있다. 지하 방에 들어갔다는 걸 안 푸른 수염이 부인을 죽이려고 하지만 부인의 형제자매들이 와 푸른 수염을 죽이고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메테를링크의 이야기는 지하 방에서 시체들 대신 감금당한 전 부인들을 만난다는 것으로 바꾸었다.<푸른 수염의 성>과 차이점은 나도 아직 안 봐서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바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다. 일단 드뷔시와 뒤카의 음악이 비슷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두 작품 모두 메테를링크의 희곡에 기초했다. 뒤카의 작품의 경우 리브레티스트를 적을 때 아예 메테를링크라고 쓴다. 누가 메테를링크 작품 아니랄까봐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온다. 작품에 나오는 푸른 수염의 전부인 중 한명의 이름이 멜리장드다. 처음에 봤을 때는 노린건가 싶었는데, 나 같이 확신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뒤카는 친절하게 멜리장드가 처음 노래할 때 드뷔시 <멜리장드> 모티프를 깔아준다.

위키에 따르면 초연은 1907년 오페라 코미크에서 했으며 1908년에는 쳄린스키의 지휘로 빈 폭스오퍼에서 상연됐다고 한다. 빈 공연에서는 신빈악파 삼총사가 참석하여 호평을 보냈다고 한다. 오페라 코미크와 폭스오퍼라니, 애초부터 왕관을 쓰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작품이었나보다.


작품은 상당히 흥미롭다. 처음에 신부로 결정된 아리안과 그의 유모가 마차를 타고 푸른 수염의 성으로 가는데, 영지 농부들이 불길한 예감을 노래로 부른다. 이 노래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게 느껴진다. 스릴러 영화의 배경음악을 듣는 것 같이 분위기가 확 살아난다.

1막에서 각각의 방을 열 때마다 보석이 쏟아지는 장면에서 음악의 효과도 탁월하다. 반짝이는 보석에 어울리는 음악이 하나하나 나오는데, 뒤카가 음악으로 극적, 회화적 묘사를 하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결국 아리안은 마지막 열쇠로 지하의 방을 연다. 이 순간 푸른 수염이 성에 돌아온다. 푸른 수염은 아리안에게 실망하며 분노하지만 아리안은 당당하게 맞선다. 푸른 수염이 아리안을 감옥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농부들이 성에 쳐들어온다. 하지만 아리안은 푸른 수염이 아직 자신을 해하지 않았다며 돌아가라고 한다. 결국 아리안은 자신이 선택해 지하에 들어간다. 


1막과 달리 2막과 3막에서는 메테를링크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메테를링크는 아리안이 지하에서 푸른 수염의 전부인인 다섯 여자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했다. 이 다섯 명은 탈출하려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다 실패했다며, 무엇보다 그건 "금지돼있기 때문에" 못 나간다고 말한다. 푸른 수염이 금지한 것을 어겼던 죄로 지하에 갇힌 부인들이 금지되었다는 이유로 밖에 나가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안은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 다섯 명을 데리고 탈출한다. 

3막에서 아리안과 여자들은 푸른 수염 성의 로비에 도착한다. 푸른 수염이 자신의 부인을 죽이는 것 때문에 화가난 농부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성을 습격해 푸른 수염을 사로잡아 여자들에게 바친다. 아리안은 푸른 수염의 결박을 풀어주고 다른 부인들은 푸른 수염이 숨을 멎을 때 까지 간호한다. 아리안이 다른 여자들에게 함께 이 성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는다. 결국 아리안이 자신의 유모와 단 둘이 성을 나가며 오페라가 끝난다.


주체적인 아리안과 구속에 적응해버린 다른 여자들이 대비를 이룬다. 특히 여자들이 푸른 수염을 돌보며 아무도 성을 나가지 않는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이게 그 뭐 스톡홀롬인가 뭔가 하는 신드롬인가요?? 원래 동화에선 살해당했던 전부인들이 사실은 무기력하고 푸른 수염의 구속을 받아들이고 자유를 두려워한다는 점 때문에 여혐 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또 주인공인 아리안은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아리안 역시 푸른 수염에 대해 상당한 동정심을 보인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완벽한 가해자인 푸른 수염이 부인을 삐뚤어진 방향으로 사랑하는 듯한 캐릭터가 되었다. 


연출은 클라우스 구트가 맡았다. 사실 구트의 색채보다 작품의 색채가 워낙 강렬한 편이라 구트의 연출이 특이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2막에서 갇혀 지낸 여자들을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들 처럼 표현했고 1막과 3막의 무대 역시 병원의 흰 병동을 연상케한다. 

지휘는 서울시향 지휘도 종종 왔었던 스테판 데네브가 맡았다. 뒤카 오케스트레이션의 신비로운 색채를 잘 살려낸 반주다. 

문제는 주연 아리안을 맡은 잔미셸 샤르보네Jeanne-Michéle Charbonet다. 이 가수는 끔찍한 바그너 소프라노라도 되는 냥 폭넓은 비브라토를 앞세워 음표를 과장되게 부른다. 다른 오페라를 이렇게 불러도 듣고 있기 힘들텐데 이 작품에서는 더더욱 치명적이다. 가사의 섬세한 느낌은 다 사라지고 귀를 괴롭히는 음표만 남을 뿐이다. 유튜브 트레일러 잠깐 다시 가져오는 순간에도 노래를 듣기 싫어서 꺼버렸다. 

아리안과 푸른 수염이라 푸른 수염의 비중도 있을 것 같지만 푸른 수염은 그냥 거의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푸른 수염 역에는 조세 반담José van Dam이 나온다. 공연이 있었던 2011년에 이미 70세가 넘은 나이였으니 노래를 제대로 부르는 게 불가능했을 테다. 하지만 타이틀에 나오는 역할임에도 1막에 잠깐 등장하는 걸 제외하고는 노래 파트가 전혀 없다. 극장 측에서는 레전드 가수 이름 팔아먹고 가수 입장에서는 쏠쏠한 알바 뛰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유모 역으로는 파트리샤 바르동이 나온다. 오히려 바르동의 노래가 가장 괜찮다.


작품 자체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캐스팅이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 한글 자막까지 달려나왔는데..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도 잘 뽑아준 드 비이의 음반이 있으니 오디오는 이 쪽으로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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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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