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많이 보지 않았다. 기억으로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 파파노 지휘 공연 영상과 대구 오페라하우스에서 캐슬린 김이 출연한 공연을 본 것이 다였다.

그렇다고 내가 로시니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로시니 페스티벌 블루레이도 어느 정도 모으고 있다. 생각해보면 유독 로시니 작품들이 꾸준히 발매가 되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구입한 건 샤브란의 마틸데, 오텔로, 바빌로니아의 치로, 이집트의 모세, 체네렌톨라 정도이고 그 외에 오리 백작, 시지스몬도,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등을 보관함에 넣어두고 입맛 다시고 있는지 오래다.

이 영상은 내가 처음으로 구입한 이발사 블루레이다. 프레스토에서 유니버설 세일을 할 때 구매했다. 찾아보니 지금까지 나온 게 총 세 종인데, 앞서 언급한 ROH는 비교적 최근에야 블루레이로 발매됐다. 파르마 극장은 표지부터 구려보여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휘를 맡은 잔루이지 젤메티(그냥 생각난 거지만 Gian은 지안이 아니라 잔으로 발음한다) 는 처음 접한 지휘자였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에 상당한 내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로시니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가벼운 깔끔함을 잘 살려낸다. 백작이 세레나데를 부를 때 기타를 직접 연주하여 반주하는 것 역시 인상깊다. 그 장면을 보고 생각난 건데 플로레스가 기타 치면서 베사메무초를 부른 영상이 있던데 언젠가 자기가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해도 멋질 것 같다. 다만 파파노에 비교하면 드라마틱한 박력을 살려내진 않았다. 1막 피날레의 경우 파파노는 벼락 같이 몰아붙이는데 그런 맛은 없었다. Largo al factotum 역시 깔끔하지만 조금 심심한 느낌이었다.


플로레스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내가 플로레스에게 감탄한게 ROH 이발사 영상을 보면서였다. 이 노래가 아름다운지는 모르겠는데 이 사람의 목소리가 아름답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접하는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노래를 감탄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리 요즘 시대가 테너 기근이라고 하지만 벨 칸토에 있어서 플로레스는 과거의 어떤 가수 부럽지 않은 존재이다. 딱히 내가 과거 가수들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이발사에는 명곡으로 꼽히는 아리아가 참 많지만 난 그중에서도 백작의 마지막 아리아 중 스트레타인 Ah il più lieto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이걸 실연에서 플로레스 말고 하는 가수가 있을련지. 대구에 갔을때도 기대했건만 역시나 안했다. 플로레스가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경이와 감탄 그 자체다.

로지나 역의 마리아 바요도 처음 보는 소프라노였는데 (사실 테아트로 레알 팔리아치 영상에서 봤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Una voce poco fa 부터 대단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저음에서 살짝 콧소리가 섞여서 첫인상은 안 좋았지만 고음역에서는 아주 맑고 안정적이며, 그 콧소리 역시 적당한 개성으로 들리기도 해서 만족스러웠다. 소프라노 용 아리아인 Ah se è ver che in tal momento 역시 빼어난 콜로라투라 기량을 뽐내며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스파뇰리의 피가로 역시 ROH 영상에서 보았지만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음색의 피가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첫 아리아는 굳이 오버하지 않고 세련되게 처리했다. 스파뇰리의 목소리는 거친 느낌 없이 매끈하면서도 꽉 차있는 안정된 목소리인데 살짝 달달한 매력이 있다. ROH 영상에선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해서 잘 몰랐지만 살짝 푸치니를 연상케하는 상당한 미남이다. 

바르톨로 역할의 브루노 프라티코는 의외의 발견이었다. 정말 바소 부포에 딱 어울리는, 진지한 역할은 절대 못맡을 것 같은 목소리와 덩치에 걸맞지 않은 앙증맞은 연기까지 일품이었다. 어려운 아리아 역시 훌륭하게 소화해낸 것은 물론이다. 아주 어린애 같은 머리를 했는데, 바르톨로에서 어리광 피우는 꼬마아이 느낌 까지 잘 나타냈다. 걷는 폼에서는 영락없는 악덕 노인을 흉내내며 말이다. 2막에서 자기도 아리아 한곡을 부르겠다며 가사의 이름을 로지나로 바꿔 부르는 대목은 정말 바소부포가 이렇게 귀여울 수 있구나를 잘 보여준다.

바질리오의 루제로 라이몬디는 대단한 베이스이지만 나이를 속일 순 없었다. 목소리가 상당히 쉬어서 답답했다. 유튭에서 아바도의 지휘로 같은 곡을 부르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더 가슴 아프다.


사실 이발사에서 중요한 건 보통 이 다섯명 뿐이지만 베르타가 상당히 훌륭했다. 난 베르타가 아리아가 있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게 다 음반을 별로 안 들어서다. 노래도 훌륭하지만 반주도 곡의 귀엽고 생기있는 맛을 잘 살려냈다. 


연출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가수 개개인의 연기지도도 훌륭하고 사랑이 승리하면서 흑백 세계가 다채로운 세상이 된다는 점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동식 벽조각으로 끊임없이 무대위의 공간을 변형하는 것도 좋았는데 실제 공연장에서 볼때를 상상해보면 영상에서 볼 때는 효과가 좀 죽은 것 같다. 전체적인 배경을 세비야 느낌이 나게 잡은 것도 좋았다. 세비야에 가보기 전에는 세비야가 유럽의 여느 도시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세비야는 정말 아주 독특한 도시다. 이 공연에서는 복장이나 건물 양식 등에서 세비야의 특징들이 잘 드러났다. 아쉬웠던 건 1막 피날레가 그다지 유기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군인들이 지하에서 올라오는 형태를 취한 이유를 모르겠다. 로지나의 가발이 너무 안 예쁜 것도 단점이다. 


특이하게도 보너스 다큐가 74분이나 수록돼있다. 공연 제작 과정을 담은 16분 정도의 영상, 그리고 나머지는 출연진들이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이다. 제작 다큐를 보면서 10월달에 갔다 온 테아트로 레알을 영상에서 다시 보는 게 반가웠다. 연출 리허설 과정이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연출가가 정말 정신 나간 사람 처럼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가수들과 함께 연기했다. 작품 소개 다큐는 길이에 비해 딱히 영양가 있지는 않았다. 지휘자나 연출가의 코멘트는 흥미로운 게 몇개 있었지만 가수들의 코멘트는 뭐 사실 다 뻔한 거 아니겠는가. 인물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은 있을 줄 알았는데 새로운 내용이라고 할 건 별로 없었다.


다시 ROH 파파노 영상을 봐야 결정할 수 있겠지만 이발사 대표 영상으로 추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파파노가 좀 더 드라마틱한 지휘를 했고 젤메티는 깔끔하다. ROH는 연출이 좀더 아기자기하고 동화 같은데 비해 테아트로 레알은 세련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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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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