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객석 표지모델은 쿠렌치스다. 멋지게 뽑혔으니 소장용으로 좋을 것 같아 한 권 구입했다. 그러고나서 안에 있는 한정호의 칼럼을 읽었는데 불쾌함이 매우 커서 글로 반박하고 싶었다.

 

글은 마치 쿠렌치스에 대한 호불호와 논란을 중립적으로 묘사할 것 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이 글은 쿠렌치스에 대한 조롱과 저열한 비판으로 가득차있다. 쿠렌치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하다. 그의 음악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 글은 여러가지 이유로 도를 넘었는데, 비판이 아니라 비하나 조롱의 수준이며 그 근거도 매우 빈약하다. 여기에 표지모델로 박아두곤 이렇게 무시하는 글을 올리는 객석의 의도가 뭔지 궁금하다. 나도 극혐하는 음악가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말도 블로그에 많이 올렸다. 하지만 만약 내가 기회가 있다고 해도  게르기예프나 플레밍 내한 프로그램에 그들을 까는 글을 쓰는 짓은 안 할 거다. 누군가에게 겔가와 플레밍을 소개해야할 일이 있다면, 왜 그들이 그런 입지를 다지게 된 건지, 남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나조차 인정하는 매력은 무엇인지 소개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렇지 않았다. 

글쓴이의 날선 조롱은 "클래식을 구원하겠다"라던 인터뷰를 소개한 뒤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노보시르브스크 오페라 극장, 페름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쿠렌치스가 감독으로 일군 성과는 철저히 본인을 엘리트로 놓고 단원의 노력을 '갈아 넣은' 산물이다. 페름에선 최장 14시간 리허설을 진행했는데 자유 진영에선 냉전 시기에도 불가능한 일이다. (후략)

(혹시나 귀찮은 저작권 이슈가 생길까봐 문단 전체를 옮기지 않겠음)

그러니까 쿠렌치스가 이룬 성과는 그의 음악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단원들을 '갈아 넣은' 산물이다라는 것이다. 너무나 우스운 말이지만 근거로 제시되는 건 최장 14시간이라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14시간을 리허설하면 쿠렌치스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 14시간을 들여서라도 완성하고 싶은 음악적 수준을 제시한 사람도 쿠렌치스고 그걸 달성하도록 단원들을 이끈 것도 쿠렌치스고 그렇게 오랜 리허설을 함께할 수 있는 단원들을 모은 것도 쿠렌치스다. "본인을 엘리트로 놓고"라는 말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어디 호텔에서 쉬면서 부지휘자 시켜서 연습 굴렸나? 자신이 지휘자고 음악감독이니 자기 기대치에 맞추기 위해 14시간이라도 리허설을  하는 것이 엘리트라고 하면 도대체 엘리트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쿠렌치스의 긴 리허설 시간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건 물론 가능하다. 한국 드라마 제작환경 처럼 예술적 성취를 명목으로 실제로 사람이 갈려나가는 현실을 정당화 하고싶은 조금도 마음도 없다. 하지만 최장 기록인 14시간 리허설을 가지고 그가 이뤄놓은 모든 성과를 깔아뭉개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일이다. 세계에서 이뤄지는 최고 수준의 작업 중에 하루 14시간을 한번도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는가? 한국 음악도들이 세계 콩쿨을 석권할 때 "타이거 맘이 자식을 '갈아 넣은' 산물이다" 라고 말할 것인가?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연구 성과를 만들기 위해 며칠동안 철야로 코딩하는 것도 교수님이 나를 갈아 넣은 산물인가? 사람들끼리 해커쏜으로 며칠 밤새가면서 아이디어 나누고 구현해내서 얻은 성과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갈아넣은 성과일 뿐인가?

만약 쿠렌치스가 자신이 새로 맡게된 기존 단원들을 저렇게 혹독하게 굴렸다면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지카 에테르나는 쿠렌치스가 직접 뽑고 창단한, 쿠렌치스와 함께하기로 합의한 단원들이 모인 일종의 스타트업이다. 나는 주 52시간 근로 의무를 지지하지만, 스타트업에서 자발적인 연장근무를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확신하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콩쿨을 준비하는 음악가나 실내악팀이 하루에 14시간 연습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인륜적이라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긴 리허설 시간에 합의한 단원이다 하더라도 실제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무리가 있는 작업이라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럴 줄 알고 들어온 단원들이니 문제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정호처럼 쿠렌치스의 성과를 "단원들의 노력을 갈아 넣은 산물"로 평가절하하고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면 14시간이라는 기록 하나를 딸랑 가져올 것이 아니라 실제로 리허설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말하고 이것이 과연 예술의 이름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인지 제대로 비판했어야 한다. 하지만 한정호에게는 그런걸 취재하거나 분석하고 비판할 능력이 없어보인다. 그저 남들에겐 불가능한 강도의 리허설을 진행할 수 있었으니 쿠렌치스의 모든 성과는 무효라고 외치고 싶을 뿐이다. 

가까운 예시를 들어보자자. 정명훈은 서울시향에 부임하고 모든 단원을 재 오디션 봤다. 덕분에 짤린 단원들도 매우 많았을 테다. 이런 방법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 과연 실력이 모자르다고 한 사람의 밥벌이를 끊는게 그렇게 정당한 일인지에 대해 누군가 문제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 계 인사 중에 이 글 처럼 '정명훈이 이뤄놓은 성과는 철저히 자신의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른 산물일 뿐이다'라고 비판하는 걸 본적이 없다. 그의 방식에 대해 비판할 순 있다하더라도, 그렇게 다 물갈이를 해서라도 아주 높은 수준의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것은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정명훈의 음악적인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임을 음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이 문단에 이외에도 등장하는  ' "클래식 음악을 살리겠다"는 감독이 자신들을 도구로 삼고자 할때 '나 "쿠렌치스는 본인의 이상 실현에 십분 활용한 셈이다"라는 말은 쿠렌치스가 자신의 단원들을 철저히 도구화 한 것처럼 묘사하는 인신공격에 가깝다.

 

그 다음 문단에는 이런 말이 있다.

"러시아 국적의 그리스인이 성악가에게 독어 딕션을 교정하는 체계가 자리 잡은 독일 악단은 현재 SWR뿐이다"

러시어 국적의 그리스인이면 성악가에게 독어 딕션을 교정하면 안 되나? 노래를 하는데 발음을 통한 음색이나 감정 표현을 지시하려면 당연히 딕션 지시를 할 수밖에 없다. 이게 무슨 SWR이 쿠렌치스에게 주는 특권인가? 성악가가 기분이 나쁘다면 또 모를까. 그렇다면 다른 독일 어떤 극장이나 오케스트라에서도 지휘자가 비모국어 발음에 대한 음악적 지시를 안한단 말인가?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문장이 등장한다.

쿠렌치스의 발톱이 드러난 건 2007년 베르디 '레퀴엠 부터다. (중략) 소련 시대에도 비정한 해석은 많았지만 작품 뒤에도 인간미가 그려지지 않는, 바싹 마른 결정체는 찾기 어려웠다.

2007년 베르디 레퀴엠이라. 쿠렌치스가 2007년에 공연한 베르디 레퀴엠에 대한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2007년 3월 20일, 리히터 탄생일 기념 공연에서 당시 노보시비르스크 극장 소속인 무지카 에테르나와 뉴 시베리안 싱어와 챔버 오케스트라인 무지카 비바, 모스크바 음악원 합창단이 함께 공연한 것이다. 이 공연의 디에스 이레가 유튜브에 올라와있다.

 

 

이 연주는 솔직히 녹음 상태도 너무 구리고 해서 내가 덕질하면서도 거의 안 들은 연주다. 하지만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글쓴이는 이 연주의 해석에 대해 논하고 "0.7배속에서 1.5배속을 수시로 오가는 '레퀴엠은' 무티의 그것에 없는, 말초 감각의 절정을 보였다." 라고 기술한다. 나도 모르는 쿠렌치스 밀녹을 소유하고 있는 걸까? 이 공연이 발톱을 드러낸 공연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걸까? 

2007년 베르디 레퀴엠이 아니라 2010년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 이라고 한다면 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알파에서 먼저 나온 퍼셀과 쇼스타코비치 음반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모차르트일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연도도 틀리고 뜬금없이 무티 까지 소환해서 비교하니 내가 모르는 베르디 레퀴엠 연주가 있나 당황했을 정도였다. 한정호는 모차르트 레퀴엠을 들은걸까 베르디 레퀴엠을 들은걸까? 객석 편집부는 이런 것도 확인 안 하고 뭐 했나 궁금하다.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쿠렌치스를 게르기예프와 비교한다. 맨손으로 지휘하고 스승이 같다는 점 이외에는 딴판인 이 두 사람을 말이다. 클래식 계에서 제일 리허설 안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랑 제일 많이 하기로 악명난 사람을 비교하다니 너무 우습지 않나. "그렇게 빚어진 관현악의 집단 기교는 놀랍지만,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거대한 감동과 거리가 먼 것도 비슷하다." 라며 겔가와 쿠렌치스를 깎아 내린다. 쿠렌치스가 관현악의 집단 기교라는 항목에서 겔가와 함께 묶이다니, 그저 웃을 뿐이다. 거대한 감동이 없다는 말은 뒤에 나오는 표현들에 비하면 차라리 주관적인 평이라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귀여운 축이다.

다음 문단에서는 겔가가 오페라에서 슈퍼스타를 기용하는 반면 쿠렌치스는 베테랑이나 무명 실력자를 중용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보면 마치 긍정적인 평가를 말하려는 것 같지만 그 뒤는 바로 이런 말이 이어진다. "전막에서 세계적 가수가 쿠렌치스를 가리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마치 쿠렌치스가 자기보다 더 돋보이는 존재를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다. 쿠렌치스가"개인의 어질리티를 허용한 사례"로는 바르톨리만이 예외였다고 말한다(본문엔 2019년 잘츠부르크라고 하는데 바르톨리랑 쿠렌치스가 함께 한 건 2019 루체른이었고 오페라 전막도 아니었다. 대충 쓰는 한정호나 확인도 안 하는 객석 편집부나...). 안나 프로하스카, 스테파니 두스트락이나 카리나 고뱅이 나오는데 이게 모차르트 레퍼토리에서 슈퍼스타 기용이 아니면 뭐지. 쿠렌치스가 하는 레퍼토리 중에 "슈퍼스타" 불러올 공연이 뭐가 있는가. 그럼 페름에서 네트렙코 불러올까? 가디너나 야콥스나 크리스티는 무슨 플레밍이랑 디도나토 불러서 모페라 하나? 

이 성악가 관련된 문단의 끝은 이렇다. 

전체적으로 쿠렌치스의 협연자 풀은 협소하다. 4월 도쿄 '합창' 공연에 테너 김우경이 캐스팅됐지만, 한국 연주자와 특별한 인연이 없고 아시아계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마치 아시아계 성악가는 일부러 뽑지 않는다는 뉘앙스다. 참고로 2019년 이도메네오에서 일리아 역할을 맡았던 가수는 중국인인 Ying Fang이다. 애초에 한번에 돌리는 레퍼토리 수가 매우 제한적인 쿠렌치스 입장에서 함께하는 협연자 풀이 좁은 건 당연하다.

뒤이어서 쿠렌치스가 페름에 정착하여 단원들을 이끌었고, 이 모습이 래틀이 버밍엄 심포니를 조련하던 방법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단에서 곧바로 다시 쿠렌치스의 성과를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쿠렌치스 이전에 아르농쿠르가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에서, 요즘은 프랑수아 자비에 로트가 레 시에클에서 추진하는 개념과 큰 차이는 없다. (중략) 쿠렌치스는 자신이 뭔가를 창조해낸다는 느낌에 몰입한다.

쿠렌치스의 방향이 아르농쿠르나 로트가 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은 그를 옹호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앞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한 문단을 써놓고 뒤이어서 이렇게 쓰는건 명백하게 쿠렌치스의 작업은 그렇게 새롭거나 신선한 것이 아니다 라고 까는 것일 뿐이다. 거기에 "자신이 뭔가를 창조해낸다는 느낌에 몰입한다"라니, 한정호는 "자신이 뭔가를 평가하고 깎아내릴 수 있다는 느낌에 몰입"하는 것 같다. 예술가가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걸 이렇게 비아냥 거리는 인간이 음악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니. 

그 다음 문단은 한 술 더 뜬다.

(전략) 스스로를 선대 작곡가의 심사를 정관할 자질이 있고, 그래서 자신은 포디움 위에서 읽는 존재일 뿐 아니라 '제2의 작곡가'라는 입장이다. 남들은 못 보는 걸 본다는 선민의식이 팽배하다.

이쯤에서 나는 거의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한정호는 스스로를 다른 예술가의 심사를 정관할 자질이 있고, 그래서 자신은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는 존재일 뿐 아니라 '제2의 한슬릭'이라는 입장이다. 남들은 보지 못 하는 음악가의 본질과 심리를 꿰뚫어본다는 선민의식이 팽배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는데, 예술가 중에 남들은 못 보는 걸 자신은 볼 수 있다 라는 자신감도 없는 인간이 있을까. 남들이랑 똑같은 수준만큼만 볼 수 있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예술가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런 예술가의 자신감이 선민의식으로 보이나보다.

이렇게 텐션을 끌어올려 마지막에는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다.

기존 고음악의 대가들이 일관된 학적 흐름을 유의하는 반면, 쿠렌치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노선에 기존의 학적 토대를 이기적으로 참고하는 수준이다. 겉으로는 교조주의지만, 내용상으로 후계자나 후대를 기약하기 어렵다. 쿠렌치스의 연주는 컬트적이지만, 영화 장르에서 컬트 무비가 어떻게 쇠락했는지는 음악가와 그 주변이 살필 만하다.

이 말은 얼마나 또 우스운가. 일관된 학적 흐름 운운, 학적 토대를 이기적으로 참고하는 수준 운운..

내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한창 파보 예르비 내한 공연을 찾아다닐 때였다. 예르비가 베토벤 교향곡 공연을 할때, 나는 음반에 사인을 받으며 궁금했던 것 하나를 예르비에게 직접 질문했다. 바로 7번 2악장 제일 마지막에 1바이올린이 피치카토에서 아르코로 바꾸는 것이 끝마디 픽업 4분음표 부터인지 아니면 마지막 마디 8분음표 부터인지에 관한 문제였다. 조너던 델 마의 베렌라이터본이 나오기 전에 거의 모든 지휘자는 (클라이버 부자 제외) 2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1바이올린도 4분음표부터 아르코로 연주했다. 하지만 델마는 베토벤의 악보를 비롯해 많은 기록을 살펴보며 베토벤이 쓴 arco는 명확하게 그 다음 마디부터 시작이며, 4분음표 부터 아르코를 지시한 것은 순전히 후대의 편집자라는 것을 밝혔다.

파보 예르비의 음반 내지에는 분명히 베렌라이터 스코어로 연주했다고 적혀있지만, 예르비는 이 2악장 마지막 마디에서 델마의 발견을 활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의 아르코를 사용했다. 난 왜 예르비가 그 지시를 베토벤이 쓴적이 없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연주했는지 궁금했다. 내 질문을 듣고 예르비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내가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하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무례한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푸틴 닮은 사람에게 그런 퉁명스러운 답변을 들었을 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을지 상상해보자.

 

작곡가의 처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당시의 연주 관습은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하고 공부하는 것은 분명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베토벤이 아르코를 4분음표가 아니라 그 뒤 음표부터 둔 것이 여러 사료를 종합해볼때 확실하다 하더라도, 4분음표에서 아르코를 할지 말지는 어느 것이 더 음악적이고 어떤 방식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효과에 부합하는지 생각하고 선택해야한다. 왜 델마를 썼어요? - 그게 좋으니까, 왜 그 부분은 델마를 안 따랐어요? -그게 좋으니까.

내가 HIP를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낸 연주가 설득력있고 기존의 연주보다 더 좋게 들리기 때문이지, 그것이 학술적으로 무결한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HIP가 의미를 갖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고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이 작품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대체 교조주의라는 것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인가? 한정호를 비롯해서 지휘자에게 악보 이외의 것을 금지해야한다는 무리의 사람들의 생각이야 말로 교조주의라는 말에 매우 부합한다. 그들은 악보가 의미하는 바,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 음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그 감정에 대해서는 관심없고 악보 그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들은 악보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의미, 작곡가가 정말로 표현하고 싶어했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교조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지휘자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음악학자도 아니다. "학적 토대를 이기적으로 참고"하지 않는 지휘자가 세상에 어디있는가? 그 수많은 베토벤 절충주의 연주에도 학적 토대를 이기적으로 참고했다고 비난할 셈인가. 현대 목관악기를 쓰면서 금관악기만 내추럴 악기로 쓰는 것도 이기적인 참고다. 현악기는 현대악기를 사용하면서 팀파니만 고전 모델을 사용하는 것도 이기적인 참고다. 베토벤의 메트로놈 마크를 어느 정도만 반영하고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도 이기적인 참고다. 비브라토를 적게 쓰지만 음고를 440헤르츠로 맞추는 것도 이기적인 참고다. 영화감독이 사극을 찍을 때 고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역사적 토대를 이기적으로 참고" 운운할 셈인가? 

 

음악학자들은 새로운 사실들을 상당수 밝혀냈다. 당대 사용하던 악기, 조율음고, 꾸밈음을 정박보다 먼저 연주해야하는지 정박에 오게 연주해야하는지, 다이나믹 표시는 어떤지, 바흐 합창단의 규모는 어떤지 등등 말이다. 하지만 어떤 지휘자나 음악가도 그런 학적 토대를 그대로 따야할 의무 따윈 없다. 리프킨 학설을 따르던 지휘자가 작품에 따라서, 연주에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는 건 '유연함'이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고 소리다. 귀가 있으면 제발 음악을 듣고 비판하라. 쿠렌치스가 모차르트 오페라 반주에 테오르보를 껴 넣어서 생긴 사운드가 어떻게 거슬렸는지를 까라. 쿠렌치스와 셀라스가 티토의 레치타티보를 잘라내서 극의 흐름이 어떻게 이상해졌는지를 까라. 쇼스타코비치의 주법을 다르게 해서 어떻게 쇼스타코비치가 처음 생각했던 효과가 반감되었는지를 까라. 

 

마지막 문단 역시 저주로 끝난다.

손쉽게 클래식 음악의 위기를 단정하고, 메시아도 편리하게 찾아보려는 시대의 게으름은 '가짜 베토벤' 행세를 한 사모라고치 마모루 사건을 낳았다. 무엇이 다른지 숙고하지 않고 정통과 이단, 사이비를 구획하면 늘 쿠렌치스는 열광 아니면 혐오의 존재에 머무른다.

갑자기 정통과 이단, 사이비가 등장한다. 글쓴이가 쿠렌치스를 혐오한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러면 글쓴이도 정통과 이단, 사이비를 무엇이 다른지 숙고하지 않은 채로 구획했다고 자기 고백하는 건가?

 

쿠렌치스 까는 글들 많이 봤다. 티토 리뷰에서 모차르트의 작품을 훼손시켰다며 쿠렌치스의 오페라라며 별점 2점 주는 것도 봤다. 그 글은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구체적인 이유라도 제시한다. 하지만 이 글에는 그런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모차르트인지 베르디인지도 모를 레퀴엠이 인간미 없고 바싹 말랐다라고 말하는 건 차라리 귀여운 편이다.

 

객석이 이렇게 질 떨어지는 기사를 커버 스토리로 내놓을 지 몰랐다. 점점 사정이 안 좋아지고 글 퀄리티도 떨어져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 수준이구나 실감했다. 한국 음악가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외국인에게는 사정없는, 한정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방의 조직이 음악계의 중심부로 나가려는 의지"인가? 

 

나도 공연보고 음악가들 더럽게 깐다. 근데 나는 내 돈 내고 실망해서 깐다. 하지만 한정호는 소개해달라고 돈 받고 청탁받은 글에서 일방적으로 비난한다. 난 한정호가 쿠렌치스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객석의 이름으로 쿠렌치스를 소개하는 한국어 아티클이 궁금하기 때문에 구입한 것이다. 객석이나 저자나 이런 수준의 글로도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예술가들의 인기에 기생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거기에 나는 공연을 보면서 보고 들은 것으로 비판하지만 한정호는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창조해낸다는 느낌에 몰입", "선민의식이 팽배", "이기적으로 참고"라는 둥 인상비평만 할 뿐이다. 심지어 글 초입을 보면 쿠렌치스를 실연으로도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선민의식이 팽배하고, 자신이 수준높은 비판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 몰입하고, 교조주의에 빠진 글 역시 돈 주고 샀다. 그러니까 난 이 글을 깔 권리가 있다. 한정호도 내 글을 까고 싶으면 만원 정도 입금하고 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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