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구입한 오페라 중에 가장 손이 안가던 오페라를 잡았다. 처음 보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건 고역이다. 오페라란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 것인지 매번 새롭게 느끼게된다. 그 중에서도 헨델의 오페라를 보는 건 나에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테아트로 레알에서 알치나를 관람하기 위해서 빡세게 예습한 이후로 헨델 오페라의 맛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오페라 까지 처음부터 즐길 수 있는 자신은 없었다.


여느 오페라 세리아처럼, 리브레토는 중요하지 않다. 줄거리를 대충 요약하면 롬바르디에 베르타리도라는 왕과 로델린다라는 왕비가 있는데 그리모알도가 반란을 일으켜서 베르타리도가 도망쳤다가 왕비를 구하러 다시 몰래 돌아오더니 그리모알도가 자기 신하 가리발도에게 배신당해서 죽을 뻔한 걸 살려줘서 해피 엔딩을 맞는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베르타리도가 자신이 죽었다고 소문낸 뒤에 몰래 돌아와서 어떤 묘수를 쓸까라는 기대했는데 그런 거 없다. 치밀하게 준비한다더니 그냥 노래로 신세 한탄하다가 자기 여동생을 만나고 자기 부인도 만나는데 만나서 키스하자마자 그리모알도한테 들킨다.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처음듣는 아리아들을 끊임없이 듣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더 끔찍한 건 플레밍이 타이틀 롤이라는 것이다. 아 왜 나는 플레밍이 나오는 블루레이를 산 것인가. 그냥 헨델 오페라 중에서 유니버설에서 나와 값이 싸고 안드레아스 숄이 나온다고 해서 샀다. 사실 플레밍이 나온다는 사실을 자각한 건 블루레이를 받아본 다음이었다. 세상에 블로그 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플레밍 메트 공연만 세 편을 봤다. 누가 보면 내가 플레밍 팬인 줄 알겠다. 보면서 주위에 플레밍 팬이있다면 도대체 어디가 좋은건지 묻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따지고 싶었다. 데보라 보이트가 '헨델의 오페라를 메트 같이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올릴 수 있는건 플레밍 처럼 다양한 오페라 장르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가수 때문이죠'라고 말하는 게 너무 가증스러웠다. 플레밍의 비브라토는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왜 프레이즈 끝마다 비브라토로 밀어서 소리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뺨 때리는 것도 밀어서 때린다. 아 보는 내내 이건 내가 쓸데없는 편견이 있어서 그런 거다, 플레밍은 미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소프라노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봐도 소용이 없다. 3막에서 눈물 까지 흘리면서 아리아를 부르는데 난 도대체가 감흥이 없다. 

빈 슈타츠오퍼 알치나를 볼 때 하르테로스가 과연 바로크 아리아를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걸 기억한다. 야구는 잘하는 사람이 잘한다고, 노래 역시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거다. 하르테로스 정도가 되면 자기 메인 레퍼토리가 아니더라도 클래스를 보여준다. 그런데 플레밍은 슈트라우스 빼고 맘에 드는걸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 


하지만 플레밍을 빼면 상당히 괜찮다. 바로크 가수가 카운터 테너 두명 밖에 없는 캐스팅인데 안드레아스 숄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사실 어떻게 들으면 너무 비어있는 소리인데, 정말로 하늘에 떠있는 것 같은 신비한 음색이다. 첫 아리아가 정말 훌륭하다. 아마 메트에서 노래하기에는 성량이 좀 작지 않을까 싶다. 메트 반지 프리카로 봤던 스테파니 블리트는 걱정했던 것보다 비브라토 없이 잘 찌르면서 불러주고, 우눌포 역의 카운터테너도 훌륭하다.


하지만 가장 빛나는 건 그리모알도 역의 조셉 카이저다. 최근 본 카프리치오에서 플라망 역할을 맡았는데, 알슈보다 헨델을 더 잘 해석해낸다. 정말로 인물과 아리아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보여줘서 처음 듣는 음악인데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첫 아리아는 왕의 여동생인 에두이제에게 부르는 노래인데, 자기가 예전에 고백했는데 너가 받아주질 않았다면서 화를 내는 장면이다. 다 카포 아리아에서 중요한건 수없이 반복되는 가사들을 어떻게 다르게 처리할까인데, 카이저는 이 장면에서 에두이제에게 분노와 원망을 각기 교차시켜 보인다. 내 고백을 거절하다니 나쁜년!과 어떻게 날 거부했느냐는 원망. 거기다 표정 까지 완벽하다. 가사의 전달이나 목소리 연기까지 아주 훌륭하다. 2막 아리아에서도 사랑에 빠진 악역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휘자 해리 비켓은 메트 오케스트라를 가지고도 나름 바로크의 맛을 만들어냈다. 서곡에서부터 현대 오케의 밋밋하고 부드럽기만 한 음색이 단점으로 작용하지만 이후 반주에서 포인트를 충분히 잘 살려낸다. 같은 음형이 반복될 때 에코효과로 처리하거나 세번 반복될 때 크레셴도로 강조하는 것 역시 정석적으로 잘 표현해준다. 


작품 자체에서 몇가지 흥미로운 점은 2막 끝에 두 주인공의 듀엣이 나온다는 점이다. 세상에 오페라에 듀엣이 나온다는 게 무슨 신기할 일인가 싶지만 줄리오 체사레에도 2번만 나오고 알치나에는 한 번도 안나온다. 뭐 듀엣 자체가 나온다는 게 특이하다기 보다는 듀엣의 전주가 느리고 어두운 분위기로 처음 듣는 순간부터 그 전의 아리아들과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마치 알치나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가 전주부터 심상치 않듯, 이 노래 역시 그렇다. 

그리고 3막에 가서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가 등장하는데 굉장히 효과적이다. 왜 다른 레치타티보를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적이다. 글루크의 아콤파냐토는 아무래도 극 중 계속 나오다보니 비교적 단조로운 패턴도 많이 나오는데 헨델은 극적으로 중요한 장면에만 아콤파냐토를 썼으니 더 튀는 것도 있다. 

이탈리안 리브레토를 켜고 봤는데 조금 다른 장면들이 있었다. 1막 9장이 삭제되어 11번 그리모알도의 아리아 Se per te giungo a godere 가 없다. 21번 베르타리도의 아리아가 삭제되고 대신 그 앞에 에두이제의 아리아가 들어간 듯 하다.


연출은 별거 없다. 딱 메트 청중의 수준에 맞다. 돈 많이 썼다.


메트에서 헨델을 이정도 했다면 나름 선방한 거지만, 바로크 단체의 공연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난 정말로 플레밍의 헨델은 반대하고 싶다. 미국은 물론 영국 아마존 리뷰들마저 플레밍을 칭찬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그냥 내가 막귀라고 생각해야겠다. 로델린다 블루레이가 이것 뿐이라는 게 슬프다. 찾아보니 아르농쿠르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한 공연이 dvd만 출시됐다. 그것도 타이틀 롤에 다니엘레 드 니스가 나온다! 2011년 공연인데 왜 블루레이로 안 나오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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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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