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에 게시한 글.

이후 비공개로 돌렸지만 기어이 고소까지 날렸다길래 다시 공개로 전환. 




종종 들려서 눈팅만 하던 BBfan님 블로그에 사건이 생겼다. 

한줄 요약하면 칼럼니스트 김인겸 씨가 쓴 베레조프스키 내한 리사이틀 프로그램 노트에 BBfan님 블로그 내용이 여기저기 무단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공개 항의 했는데 김인겸 씨는 해명 대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댓글을 단 상태.

자세한 내용은 BBfan님 본인이 자세하게 써두셨으니 직접 들어가서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냥 눈팅만 하던 곳이었지만, 블로그도 하고 돈받고 프로그램 노트도 써본 입장에서 남일 같지가 않더라. 거기다 예전에 조교할 때 학생들 발표 표절 문제로 한번 난리를 친 적이 있어서 더욱 그렇다.

논란에 대한 내 생각.

일단 칼럼니스트가 블로그 글을 읽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본인이 직접 쪽지에서 인정했었다.

법알못이지만, 연구실에서 음악 표절 관련 내용을 다룬 적이 있어서 대충 아는 건 있다. 표절이 성립되려면 표절 대상이 되는 저작물을 실제로 접근하였을 가능성이 있나도 중요하다. 일단 이번 사건에서 해당 칼럼니스트가 팬블로그 글을 읽었다는 건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이다.


무단 인용되었다고 주장하는 문장들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가?

너무 잘 알려져있는 사실, 혹은 누구든 할 수 있는 흔한 생각에 대해 자신의 저작권 혹은 창의성을 주장할 순 없을 테다. 문제가 된 부분이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나 의견이라 이런 문제 제기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면 될 일이다.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소개글들을 가지고 오면 된다. 하지만 그런 반론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단 인용되었다고 주장하는 문장들이 실제로 그 블로그에서 인용된 것인가?

다르게 말해서 '당신 블로그 보고 쓴 내용 아닙니다'라고 반박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직접 프로그램 노트 전문을 읽지 못했지만 BBfan님이 인용한 내용들은 모두 자신의 블로그에서 인용된 내용이라고 주장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아마 칼럼니스트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 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꽤 있다. "베레조프스키가 스카를라티를 처음 연주한 것은 2015년 5월 그르노블에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라는 부분이 그렇다. BBfan님은 친절하게도 원문 링크 까지 걸어뒀으니, 자신도 원문을 보고 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잠깐 찾아봐도 BBfan님이 인용한 원문의 텍스트 말고 다른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진짜 그 공연을 하긴 했는지, 프로그램이 뭔지도 못 찾겠다. 공연장 홈페이지 MC2에 가봐도 기록이 없다. MC2 페이스북에 공연 일주일 전에도 홍보문구를 쓴걸 보니 공연을 하긴 한 것 같은데 (http://www.mc2grenoble.fr/Mc2-spectacle/Musique/Scarlatti-piano-ou-clavecin-/p7c3sc607.html 라는 주소가 있지만 지금은 그냥 현재 공연 리스트로 리다이렉트 된다. 찾아보니 2015/2016 시즌까지만 남아있고 그 전 시즌부턴 홈페이지에 안 남겨 놓은듯), 공연의 형식이나 토론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칼럼니스트가 쓴 대로 앙타이와 베레좁이 정말 같은 곡을 번갈아 쳤는지도 당연히 찾기 어렵다. 자신이 직접 조사하여 알아낸 사실이라면 그 소스를 공개하면 될 일이다. 뭐 '그 공연 정보를 처음 읽은 건 그 블로그가 맞지만, 그래도 직접 더 여러가지 소스를 체크해봤다'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원문도 안 찾아보고 재인용하는 꼴이다. 


가장 심각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건 스카를라티 세 곡을 연달아 연주하는 걸 "마치 고전 소나타의 3악장 구조를 연상케 하는 선곡이다" 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일단 이 문장은 앞선 그레노블 공연과 달리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베레좁의 프로그램에서 저런 의미를 밝히는 건 분명히 한 개인의 해석이다. 

중요한 점은 그 해석이 충분히 독창적이라는 점이다. BBfan님은 베레좁스키가 유독 두번째 소나타를 느리게 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이를 위해 악보의 빠르기 말이 알레그로 아사이, 알레그리시모라는 것, 그리고 다른 연주자는 같은 작품을 훨씬 빠른 속도로 친다는 것을 보여줬다.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베레조프스키의 선곡 의도를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이 일반적으로 누구나 유추하거나 생각해낼 수 있는 내용인가? 최소한 베레좁의 연주와 다른 사람의 연주를 모두 들어보고 템포를 비교하지 않고서는 주장하기 힘든 내용이다. 왜냐면 칼럼니스트가 써둔 대로 E장조 g단조 D장조를 연주했다고 써놨을 때, 저 조성 관계에서 고전 소나타 3악장을 연상하는 건 소나타 구조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레좁스키의 연주가 3악장 구조를 연상시키는 건 그가 두번째 곡을 특별히 매우 천천히 쳤다는 '연주의 해석' 때문이지 칼럼니스트가 쓴 대로 "선곡"과는 거의 무관하다. 선곡만으로 3악장 구조가 연상되려면 조성관계나 작품의 빠르기말이 소나타 3악장 구조와 유사해야한다. 그게 아니니 저 해석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거리가 멀고, 때문에 저자 본인의 해석 근거를 분명하게 설명했어야만 한다. 


이런 표절, 혹은 무단 인용에서 최종저작물이 충분히 논리적이며 객관적 사실이 모두 부합했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해석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라고 항변해볼 수 있겠지만, 이게 안 되면 변명의 여지가 더 줄어든다. 이전에 내가 겪은 수업에서 표절 논란이 황당한 수준이었던 것은 원저작의 실수 까지 똑같이 따라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번 일에선 오히려 부분만 겹치면서 허점을 보였다. 베레조프스키가 연주하는 스카를라티 소나타 세 곡이 어째서 3악장 소나타를 연상시키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음악적으로 논리에 맞지 않는 글을 써놨다. 만약 BBfan님과 같은 근거를 들며 설명했다면 "나도 베레좁 연주를 직접 듣고보니 그런 느낌을 받아 그렇게 쓴 것이다"라고 주장할 여지라도 있었을 테다. 세 작품을 의도적으로 빠름 - 느림 - 빠름으로 연주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 정도 연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꽤 많다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근거까지 다 차용해서 나름의 논리를 갖췄다면 베낀 부분은 늘어날 지언정 오히려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생겼을 테다. 정말 우습게도, 결과만 쏙 빼서 가져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공연 예정 1년 전에 쓰인 공연 기획 글을 바탕으로하여 그 기획을 기정사실로 쓴 것 역시 인용하면서 생긴 틈이라고 보인다. 정보를 옮겨 적으면서 그 내용을 상당히 신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그 공연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토론도 했는지를  (물론 BBfan님의 글 이외의 출처에서, 공연 이전이 아닌 이후의 소스로) 밝혀내는 건 그 사실을 적은 김인겸 씨 몫이다. 


또 한가지, 인용 사실을 밝힐 기회가 있었는데도 밝히지 않아 보인다는 데에서 고의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르노블 공연의 내용에 대한 것이 인용을 밝힐 필요가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도움을 받았냐는 질문에 "베레조프스키의 스카를라티 소나타 공연 기록 등"에 관한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점에서 "프로그램 노트에 무슨 레퍼런스냐"라고 변명할 수 없다. 관례상 따로 출처표기는 하지 않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연락했을 때 까지 구체적인 정보 인용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인용을 못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안했다고 봐야 한다.


더욱 화가 나는 건 김인겸 씨가 이 일을 공개 항의한 BBfan님은 물론 관련 글에 댓글을 단 사람까지 다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우리나라 명예훼손법이 사실을 적시한 것도 처벌할 수 있고, 칼럼니스트 직함 달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문제면 자신의 명예와 직결되는 일인게 당연하다. 하지만 무단 인용 피해자가 쓴 글이며 프로그램 노트라는 예술, 문학 저작물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며 표절 사실에 대한 논의는 공익적 목적이 크니 당연하니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이 마땅하다.


프로그램 노트를 쓰다보면 과연 내가 새로운 지식,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인가 고민하게 된다. 인터넷 검색해서 짜깁기 하는 게 아니라 악보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는지, 아니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그 중 한정된 글자수 안에서 독자에게 꼭 필요한 정보만 연결시킬 수 있는지 말이다. 

 음악 칼럼니스트라면 당연히 소스를 철저하게 확인해야한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이런 식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우리 음악계에서 칼럼 쓰는 사람 중에 음악학, 혹은 그에 준하는 다른 학술 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샬리아핀이 보리스 고두노프 초연을 맡았다는 말이 프로그램 노트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건 기본적인 사실관계 체크도 하지 않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사실도 틀린 내용은 심지어 출판된 책에서까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스트라빈스키 작품에 대해 직접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스트라빈스키가 영국의 한 코미디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일화의 근거가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한참 해맸었다. 직접 소스를 확인하지 못한 내용을 글에 끼워넣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지고 신빙성있는 객관적 사실에서 출발해 그 정보를 잘 편집하고 자신의 생각을 넣는 것이 음악 관련 글을 쓰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다. 무엇이 진짜 사실이고 무엇이 자신의 생각인지 항상 되돌아봐야한다. 


 블로그로 후기를 쓰는 열심히 쓰는 것도 최소한 블로그에 쓰는 글들은 내가 미약하나마 생산해 낸 새로운 정보와 의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렇게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가 있는 블로그들을 좋아한다. 요즘 들어 피아노 음악을 잘 안 듣다가 BBfan님 블로그를 통해서 피아니스트의 개성과 매력이 무엇인지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그런 가치있는 콘텐츠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화가 난다. 법적 대응이라고 재갈을 물리겠다는 발상은 더 치가 떨린다.


이 일이 널리 퍼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시는 것 같으니 꼭 널리 퍼뜨리고 공론화시켜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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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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