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그리모 피아노 리사이틀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출연
엘렌 그리모
기간
2013.01.29
가격
-
글쓴이 평점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8번 A단조

베르크 - 피아노 소나타 op. 1

(인터미션)

리스트 - 피아노 소나타 B단조

버르토크 - 루마니안 민속 무곡

(앵콜)

쇼팽 - 새 연습곡 1번

라흐마니노프 - 회화적 연습곡 op. 33-9

글루크/스감바티 - 오르페오와 에우리데체 중 멜로디



엘렌 그리모의 두번째 내한 공연. 아직 후기를 작성하진 않았지만, 올해에만 그리모의 공연을 두 번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리사이틀이 두 번째였고, 첫 번째는 도쿄 산토리홀에서 NHK 심포니와 데이비드 진만과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공연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보는 공연은 원래 서울시향의 바그너로 계획되었지만 공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리모의 리사이틀이 올해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본 첫 공연이 되었다.


산토리홀에서 첫 공연, 예술의 전당에서 첫 공연을 같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본다는 생각에 공연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거기다 그리모가 입은 옷 또한 산토리홀에서의 공연과 똑같은 것이었다. 익숙한 광경이 다시 한번 오버랩되었다. 자주색 화려한 중국 풍의 셔츠에 깔끔한 검은색 바지였다. 


프로그램은 그리모의 앨범 레조낭스에 수록된 전곡이었다. 이렇게 리사이틀을 앨범 그대로를 옮겨놓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앨범 자체의 구성도 흔치 않은 선곡이다. 모차르트의 가장 독특한 피아노 소나타인 A단조로 시작해서 베르크, 리스트의 하나 뿐인 피아노 소나타들, 그리고 끝으로 버르토크의 소품 무곡집 까지. 이들이 어떠한 레조낭스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서로 함께 공명하는지 느끼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으로서만 보자면, 모차르트의 A단조 피아노 소나타는 모차르트 소나타를 잘 안 듣는 나도 자주 들을 만큼 친숙한 곡이다.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는 조성진과 아믈랭의 리사이틀 때 메인 곡이었기에 어느 정도 아는 곡이었고 버르토크의 루마니안 민속 무곡은 2012 대관령국제음악제를 시작한 곡이니 모를 수가 없는 곡이다. 베르크의 소나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내게 친숙한 곡이었다.


모차르트의 연주는 음반과 흡사했다. 몰아치는 듯한 1주제, 한없이 섬세해지는 루바토의 경과구 등은 내 귀를 바로 사로잡았다. 이러한 해석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개성 넘치는 연주라면 언제든 환영이었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곡을 해석하는데 두 가지 방법의 장점을 교묘하게 모두 챙긴 것 같은 연주였다. 이 두 가지 방법이란 우치다나 피레와 같이 전통적인 섬세한 해석, 그리고 최근 포르테피아노 연주자들이나 굴드와 같은 강렬한 해석이다. 그리모의 스타일은 일견 모차르트에게 너무 강렬한 해석인 듯 싶지만 대담한 루바토로 섬세한 부분들 조차 놓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연주가 굉장히 변화무쌍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반복이 많은 이 소나타에서 지루함을 덜어주고 곡에 집중할 수 있는 연주였다.


베르크의 소나타는 공연 전에 많이 듣고 갔음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었다. 무조 음악 작곡가의 조성 음악이라는 점에서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그리모는 이 곡에서도 섬세함을 유지하다가 필요할 때는 충분히 감정을 끌어올리며 자신감 넘치게 연주했다. 자신만의 확고한 해석이 있는 듯한 연주였다. 이전에 듣고 간 굴드의 연주보다 좀 더 전달력이 있는 느낌.


인터미션 중에는 피아노를 새로 교체했다. 무대에 피아노가 두 대 있길래 공연 중 사고를 대비한 여분인가 했더니 조율 상태가 다른 피아노를 각각 1,2부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피아노 음향판에 조명이 심하게 반사되서인지 합창석 관객을 위해 따로 커버도 씌웠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2011년 조성진 IBK 챔버홀 리사이틀, 2012년 아믈랭 성남 콘서트홀 리사이틀 때 들어본 곡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리모의 연주까지 총 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마음 속에서 비교하게 되었다. 리스트의 강렬한 인상이라고 함은 IBK챔버홀이란 좁은 공간을 터트려버릴 것 같은 기세의 조성진 군의 연주가 강하게 박혀 있었고, 이 난곡을 기교적인 완벽함으로 승부하는 걸론 아믈랭이 있었다. 과연 그리모가 들려주는 리스트는 어떨까. 일단 첫 주제의 제시부들에서 파워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여성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타건' 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진부하고 낡은 생각에 기초한 것인지는 아르헤리치, 리시차, 그리모 등 여러 여성 연주자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모의 장점은 바로 넓은 폭의 감정 변화에 있었다. 이는 단순히 다이나믹의 변화 뿐만 아니라 템포의 변화도 포함한 것이다. 중간 부에서 이런 감정 변화 부분을 너무나 잘 살려주면서, 강렬하게 공격하는 부분이 아닌 서정적인 부분이 오히려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부분이 아쉬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아믈랭의 리사이틀 후 내가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를 따로 들은 적이 없으니 이 곡에 대한 이해가 변하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그리모의 연주는 이 소나타의 숨겨진 매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왜 그리모가 세계 정상급의 피아니스트인지 알 수 있는 연주였다.


리스트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버르토크의 곡은 아무래도 앵콜과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그리모의 내한 공연을 갈지말지 고민하던 순간, 크레디아 사이트에서 홍보 용으로 걸어둔 영상에서 이 루마니아 민속 무곡이 흘러나왔었다. 이 곡이 가진 독특한 매력 때문에 예매를 결심했던 것 같은데,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레퍼토리가 아닐텐데 이 곡 특유의 발랄함과 서정성이 가득 묻어나온 연주였다. 


앵콜은 3개를 연주했는데, 그 중 글루크의 멜로디가 가장 인상 깊었다. 화려한 테크닉의 소유자이지만 그녀의 매력은 바로 섬세한 멜로디 프레이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연주가 끝나고 사인회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인회에 줄을 많이 서는 것을 고려한다 해도 꽤나 긴 줄이었다. 그리모는 일일이 모든 사람에게 고개를 들며 악수를 청해줬다. 사인 받으며 도쿄에 있던 공연도 봤다고 하니 두 번이나 와줘서 고맙다고 대답해줬다. 원래는 NHK 심포니의 팸플릿을 들고가서 사인을 받으려고 했는데 아침에 방을 나오면서 챙기지 못해 결국 서울에 가져가지 못 했다. 이 부분은 지금도 정말 아쉽다. 그래서인지, 내가 말로 그 점을 설명했을 때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준 게 좀 더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