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과 불의 노래.


흐보로스톱스키와 쿠라의 대결. 흐보의 타계 소식을 듣고 나서 꺼내본 영상이었다. 


일라이저 모신스키는 국립오페라단에서도 연출을 선보인 적이 있다. <돈 카를로>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았는데 둘 다 실망스러웠다. 단순한 미장센만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인데 예산 탓인지 의상이나 무대 퀄리티가 구려 기본적인 매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연출에서는 모신스키가 어떤 느낌을 추구하는지 잘 보여준다.


흐보를 보기 위해 꺼내들어서 더 그런지 몰라도 이 작품에선 유독 그가 빛난다. 미장센이 흐보를 위해 맞춰져 있는 느낌이다. 파란 제복에 은발 머리를 휘날리는 흐보와 빨간 셔츠에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쿠라가 명확하게 대비된다. 얼음과 불의 대결 같다. 캐스팅의 무게감 역시 이 둘에 맞춰져있고 레오노라는 떨이같은 느낌을 준다. 

그 중에서도 유독 흐보가 빛나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칠흑같은 어둠 때문이다. 이 어두운 배경 앞에 흐보가 등장해서 노래하면 마치 모든 배경이 흐보의 은발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여기에 엘지 OLED 액정의 힘이 더해지면 그 시각적 대비는 정말 압도적이다. 올레드로 사면 검은색이 정말 빛없음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오페라 보기 딱이겠다 싶었는데 그걸 이 영상에서 체험했다. 흐보의 은발을 감상하기 위해서 올레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홍보멘트 같지만 진심이에요.


흐보하면 오네긴이지만, 하필 흐보의 오네긴을 내 첫 오네긴으로 봤기 때문에 그게 잘 하는 건지 어떤 건지 별 생각이 없었다. 그 뒤로 르네 플레밍을 보고싶지 않아 봉인해두느라 흐보의 오네긴 영상을 아직 다시 보지 못했다. 그 뒤로 내가 오페라 덕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로는 그럴싸한 흐보 영상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됐다. 그래서 흐보가 얼마나 대단한 가수인지 내 스스로 감탄할 기회가 얼마 없었다.

이 영상은 흐보의 전성기를 담고 있다. 빛나는 은발은 물론이고 더 없이 건강한 목소리, 거기에 압도적인 호흡을 갖추고 있다. 오페라 가수로서 완벽한 피지컬을 갖춘 셈이다.

첫 소절은 Il balen / del suo sorriso / d'una stella / vince il raggio! 이다. 이걸 보통 (1,2)  (3 + 4) 로 둘둘 쪼개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 흐보는 sorriso d'una stella까지를 크레셴데로 더 이어버리면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노래 시작에 자신의 호흡을 백분 활용하여 도전적인 프레이징을 만드는 게 특징인데, 뒤 이어지는 카발레타 Per me, ora fatale는 아예 네 마디 전체를 한 호흡으로 불러버린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저 인간은 언제 숨 쉬나, 이 노래가 어디까지 가나 땀을 쥐게 만든다. 여기에 폭발적인 가사 처리, 폭넓은 다이나믹 까지, 흐보가 왜 동시대 가장 뛰어난 바리톤 중 한명으로 꼽혔는지 볼 수 있다. 


쿠라 역시 최근에 비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이 보인다. 화끈한 소리와 연기는 여전한데, 최근에 비해서 훨씬 밀도 있고 초점이 맞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립오페라단 파르지팔의 쿤드리로 출연했던 이본 네프가 아주체타를 맡았고, 쿠라의 어머니 역을 맡기에 너무 젊어보인다는 것을 빼면 괜찮다.카를로 리치의 지휘도 깔끔하다.  레오노레를 맡은 베로니카 비야로엘Veronica Villarroel의 노래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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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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