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레만 무영녀 2회차
원래는 다른 오페라를 보러가려고 계획했다. 슈타츠오퍼는 많이 봤으니 테아터 안데어빈이나 폭스오퍼도 한번 가봐야하지 않겠나. 안데어빈 공연은 없었지만 폭스오퍼 지옥의 오르페가 있길래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틸레만 무영녀를 보고나서 이건 꼭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처음엔 입석표를 한번 노려보려고 했다. 빈 관광의 필수 코스 중 하나라는 슈타츠오퍼 입석 관람! 네이버에서 검색했을때 오페라 입석표 정보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경우는 빈 빼면 생각도 못할테다. 그냥 여행객들도 사는데 내가 안해보면 섭하지 않나. 더 나이들기 전에 한번 해봐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틸 무영녀처럼 현지 관객들도 많이 찾는 공연 같은 경우면 입석을 구하려면 3~4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했다. 여기에 공연 4시간 동안 서서 보기? 내 척추의 모든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고도 남을 시간이다.
마지막까지 입석 고민을 안 한건 아니었다. 다만 예상치 않게 다른 학회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가 마침 빈에 출장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연락을 해서 만났다. 그 친구도 만만치 않은 클덕이라 혹시 무영녀에 관심이 있진 않을지, 같이 기다려서 입석표를 한번 사보는 로망이 있진 않을지 머리속에서 행복회로를 돌려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출장나온 사람한테 3시간 + 4시간을 서서 보내자는 걸 제안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나간 일인 것 같아 그냥 포기했다. 마침 슈타츠오퍼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지나가면서 얼핏보니 이미 수십명이 입석 티켓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두번 해본 솜씨들이 아닌듯 모두 간단한 간이의자에서 캠핑용 의자까지 주닙물도 다양했다. 그냥 곱게 돈 내고 볼게요…
공연은 매진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진리가 있으니 공연은 돈이 없어 못보는거지 티켓이 없어 못보는게 아니다. 공연 시작 30분 전까지도 암표상들이 극장 근처에 있다. 다들 현란한 말로 괜찮은 자리라고 말하지만 이제 대충 몇번 봤으니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쁜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꼭대기층 사이드 시야 장애석을 두배 정도 가격을 주고 산것 같다. 말이 두배지 뭐 50유로나 됐으려나. 박스석 뒷열에서 듣느니 어차피 한번 본 연출 소리나 제대로 듣자고 고른 좌석이었다.
Hörplatz, 그러니까 음악만 들을 수 있는 자리를 앉아본건 거의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정도 수준의 시야장애석이 존재하지 않고 유럽에 왔을 땐 굳이 돈 아끼겠다고 이런 자리 앉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아주 싼 가격의 자리고 앞으로 몸을 아주 많이 숙여야 겨우 틸레만이 보일랑 말랑한 자리이다 보니 그냥 편하게 등받이에 기대고 음악만 들었다. 슈타츠오퍼는 자리마다 프롬프터가 달려있는데 마침 내 옆자리가 비어서 독어와 영어 두개를 각각 켜놓고 볼 수 있었다. 그러게 있자니 집에서 혼자 대본 보면서 음악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발 밑에서 슈타츠오퍼가 라이브로 연주하고 있다. 빈에서는 슈타츠오퍼가 우리집 스피커?!
나는 조금은 그래도 보이는 자리였지만 나보다 더 사이드 좌석은 아예 스코어를 펼쳐놓고 볼 수있도록 라이트도 설치돼있다. 이런 자리는 보통 음대생들이 와서 듣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기서 악보 펼쳐놓고 보시더라. 이것이 말로만 듣던 빈할배 빈할매 클라스인가… 어차피 빈 슈타츠오퍼 연출이야 특별한거 없이 고만고만한 수준이니 그냥 초연하게 싼 가격으로 매일매일 음악감상하러 오는 느낌으로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틸레만의 반주는 터트릴듯 말듯 사람을 안달나게 만들었고 가수들의 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잘 들렸다. 이렇게 잘 세공된 슈트라우스 오페라 반주를 다시 듣기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 간주 부분에서 조금씩 쌓아올리다가 터뜨려줄 때 얼마나 큰 해방감과 짜릿함이 찾아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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