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바덴에서 기획한 세 번의 쿠렌치스 공연 중 가장 티켓이 덜 팔린 공연이 이 공연이었다. 나 역시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무리를 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있었다. 쿠렌치스가 이 곡을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공연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쿠렌치스가 직접 초연했고 그 뒤로 계속 들고다니는 곡이니 뭔가 믿을만한 작품이라는 기대는 했지만 순전히 팬심으로 고른 공연이었다.
라모 공연에서 아쉬움이 남아 나는 왜 이 멀리 여기까지 왔는가. 이 공연할 때가 딱 빈필이 내한해서 틸레만이랑 내한 공연할 때였다. 이 공연 보겠다고 이것저것 든 비용을 생각하면 빈필 서울공연 대구 공연 모두 R석으로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틸레만의 브루크너 8번은 역시나 다들 엄청난 명연이었다고 떠들썩했다. 친구들은 편하게 빈필 보고 있는데 나는 이 음향 구린 홀에 와서 뭘하고 있는걸까? 현타가 씨게 올 수밖에 없었다.
현자타임은 언제나 더 좋은 공연으로 해결된다. 유튜브를 보고 단순한 합창 공연 정도를 예상했지만 역시 쿠렌치스였다. 마치 종교작품의 무대 연출 버전 처럼 이 합창곡에 경건하고 신비하면서도 강렬한 연출을 더했다.
이 작품은 죄수들이 쓴 프랑스어와 러시아어 시에 노래를 붙인 곡이다. 30여개가 넘는 곡으로 구성돼있고 기악 반주는 아코디언이나 첼로 오블리가토 등 대체로 매우 제한적이다. 아예 반주 없이 아카펠라로 부르는 곡들도 많고 간혹 타악기를 동반한 밴드 풍의 반주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공연의 주인공은 합창단이었다. 필립 에르상은 앙드레 졸리베의 제자이자 조성음악을 쓰는 작곡가다. 에르상의 음악은 선율이 확실하면서도 조금씩 생경한 느낌을 추가해내는 작곡가였다.
이 공연을 어떻게 말로 옮겨야할지 모르겠다. 좌절, 분노, 희망, 종교적 귀의, 조롱, 체념, 모든 복잡한 감정이 다 섞여있었다. 기억하기에 사랑 노래는 없었던 것 같다. 성가 스타일의 노래에서부터 러시아 민요풍의 노래, 그리고 민중 가요 풍의 스타일까지 다양한 음악의 연속이었다. 위에 독어 영어 자막을 뛰워줬지만, 시의 내용을 영어자막으로 재빠르게 캐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눈앞에서 쿠렌치스가 지휘하고 있는데 자막 볼 시간이 어디있는가?
첫 대형부터 범상치 않았다. 합창단이 쿠렌치스를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둘러쌌다. 조명과 연기가 어우러져 동굴에서 비밀 종교집회라도 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러더니 합창단이 원형으로 돌질 않나, 학익진 마냥 쫙 펼치질 않나, 무대 위를 미친듯이 뛰어다니질 않나, 갑자기 무대 앞 끝까지 나와서 일렬로 노래를 부르질 않나, 무지카 에테르나 특유의 에너지를 무대 위에서 쏟아냈다. 첫 공연할 때는 얌전히 서서 했지만 투어를 돌면서 계속 발전시켰나보다. 셀라스 같은 연출가가 따로 손을 봐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선이나 대형이 음악과 잘 어우러져 대단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쿠렌치스도 합창단과 함께 이동하면서 지휘했다. 합창단 모두가 무대 앞으로 뛰쳐나와 일렬로 서서 관객을 바라보고 노래를 할 때 쿠렌치스도 합창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객석을 보고 노래하며 팔을 높이 들어 지휘했다. 그런 모습을 이 공연이 아니라면 언제 볼 수 있겠는가. 쿠렌치스가 오케스트라를 컨트롤하는 능력도 탁월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사람 목소리를 다루는 능력이 더 특별하지 않을까. 쿠렌치스와 합창단은 서로 아주 강렬하게 연결된 느낌이었다. 쿠렌치스의 맨손 지휘를 가장 섬세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이 이 무지카 에테르나 합창단일 테다.
공연 내내 음악과 연주와 연출에 압도됐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옮겨갔다. 처음 듣는 형태의 이 음악이 어떻게 이렇게 가슴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작품 속에 극적인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음악에는 분명한 감정의 드라마가 있었다.
곡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언제 끝나버릴지 노심초사하면서 마무리를 지켜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천천히 침잠하며 차분해지는 진행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곡의 마무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주었다.
숨죽이는 침묵이 있고나서 관객 모두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비록 가사를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했지만 어떤 예술은 이해하지 못 하더라도 압도시키고 감동을 준다. 이 공연이 그런 종류의 것임을 관객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제발 이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길 바랄 뿐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선물과 편지를 챙겨 백스테이지에 전달했다. 이제 새로운 공연장에 가도 백스테이지 찾는 게 어렵지 않다. 공연이 끝나고도 미리 백스테이지 출입구에 가서 기다렸는데 다행히 사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도쿄나 오사카 때와는 달리 이 정도 인원이면 분명 받을 수 있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기다리는 와중에 작곡가 필립 에르상이 먼저 나왔다. 프로그램 북에 사인을 받으며 꼭 음반이나 영상으로 작품을 발매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도 그러고 싶다며, 초연 때에 비해 훨씬 공연 퀄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기다리니 직원들이 사인을 받는 대신 절대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미리 공지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쿠렌치스의 대기실에 가서 사인을 받았는데, 책상에 이콘이 가득해서 대기실 자체의 아우라가 특별했다.
재킷들이 검정색이 많아서 일부러 은색 네임펜을 챙겨갔는데 하필 안 나오더라 ㅁㄴ아;럼나ㅣ얼아.. 그 순간 얼마나 멘붕이었는지... 다들 사인받기 전에 사인펜 확인은 꼭 하세요ㅠㅠ 다행히 다른 펜으로 받긴 했지만 검은색이라..
선물이랑 편지 보냈다고 하니 편지 잘 읽었다고 Thank you for your words라고 말해줬다. 한국 친구들이 많아서 이번에 한국 가는거 기대된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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