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빅 극장 아니야
런던, 파리 처럼 덩치만 큰 극장 아니야, 작아서 더 위대한 극장.
취리히를 한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과, 굳이 거기까지 가야하는 마음 둘다 있었다. 영상물로 봤을 때 취리히 실망스러운 게 여러번 있었으니 말이다. 좋은 극장이지만 베를린, 뮌헨, 빈과 같은 극장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덴바덴 근처 중 공항이 있으면서 이날 오페라를 하는 곳은 여기와 바젤 정도가 있었다. 저번에 못간 바젤도 궁금했지만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취리히부터 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사실 취리히는 나에게 패배의 아이콘 같은 곳이다. 2014년 여름 축제 순례하고 다닐 때 루체른에서 잘츠부르크를 가기 위해서 루체른 - 취리히 - 뮌헨 - 잘츠부르크 기차를 타야했다. 루체른-취리히 기차에서 종착역에서 알아서 깨워주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푹 잠에 들었고 정신이 들었을 때 그 기차는 취리히에서 다시 루체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취리히에 갔지만 당연히 나는 기차를 놓쳤고 결국 100유로가 훌쩍 넘는 가격에 새 기차표를 끊고 공연도 일트로바토레 2막 피날레에 겨우 들어갔다.
그 때 기차를 놓치고 스스로의 멍청함을 자책하면서 취리히 역에서 두시간 정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시간 동안 결국 기차역을 나가지 못하고 취리히는 조금도 보지 못했다. 나에게 취리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똑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고 다시 찾아갔다.
취리히 오페라하우스는 학생을 위한 당일 티켓이 있다. 심지어 이 학생 할인에는 나이제한도 따로 없다. 전석 20프랑이니 2만원 정도의 가격이다. 원래 최고등급 좌석이 200프랑이 넘는데 티켓가격이 이 정도 높은 극장 중에서 당일 학생티켓을 파는 곳이 얼마나 있던가. 뮌헨은 30세 이하 할인이 있는 경우가 따로 있다고 알고, 베를린은 내가 갔을 땐 최소한 이 정도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런던 파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취리히도 주말 공연은 대부분 매진이라서 학생할인을 받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연출가는 러시아 연출가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로, 러시아에서 ㄱ택 연금을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연출도 가택 연금 당한 상황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무슨 고스트 연출왕이냐.. 이 사람이 연출한 것을 직접 본것은 없지만 유튜브에 클립으로 올라온 코미셰 오퍼 이발사 같은 경우 굉장히 재밌어 보였다.
엄청난 똘끼가 느껴지지 않는가. 같은 날 바젤에서 하는 이발사가 바로 이 프로덕션이라 살짝 고민했었다.
여기에 지휘가 오타비오 단토네. 아무래도 바로크 오페라 쪽을 훨씬 많이했지만 최근에 모차르트 오페라도 손대고 있다. 가수들은 아는 사람이 없지만 뭐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코지를 마지막으로 본게 국오 사태 때였으니 이제 제대로된 공연으로 상처를 치유받고 싶었다. 어라 그런데 피오르딜리지가 국오 때랑 같은 가수네….? 이렇게 기억 폭행이 조금씩 시작되고…
공연 시작 전에 영 좋지 않은 일들이 몇개 있었다. 당일 학생 티켓은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한 1시간 정도 전에 갔던 것 같다. 사람들은 10~20명 남짓 있었다. 줄을 서고 기다리다가 30분이 지나면 번호표 기계에서 번호를 뽑을 수 있고 그러면 순서대로 표를 사는 형태였다. 그렇게 잘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새내기 정도로 보이는 젊은 학생들 20명 정도가 우르르 몰려와서 내 앞에 서기 시작했다. 뭐지??? 새치기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스위스 사람들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인가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뭐라뭐라 이야기 하더니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그러니 학생들은 선생님이 자기들 대신 줄을 서줬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교사에게 이 사람이 따졌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교사는 요지부동이었다. 한가지 이해하는 건 너 차례까지 표 구할 수 있는거면 문제 없는거 아니냐 였다. 아니 줄 순서에 따라 내 자리가 달라지는데 이게 무슨 개소리세요;; 어찌어찌 그 분과 그 교사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고 어안이 벙벙해하고 있는 나를 위해서 영어로도 상황을 설명해줬다. 원래 자기가 직접 다 와서 기다리는게 기본인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나에게도 말했다.
당장이라도 가서 교사와 학생들에게 이게 스위스 사람들의 방식이고 시민의식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스위스 세금으로 꿀빨려고 기다리고 있는 내가 스위스 사람들한테 뭐라고 할 권리가 있나라는 생각과 혹시나 어느 방식이로든 싸움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뭐 내가 스위스 세금으로 혜택받는건 맞지만 그래도 이 오페라 하나 보겠다고 지금 취리히에 뿌리고 다닌 돈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못 따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06 월드컵 때 스위스에 대한 분노가 다시 떠올랐다. 하여간 애들 오페라 보여준다고 단체관람하는게 사람 민폐끼치는 건 어딜가나 비슷하나보다.
내 자리가 만약 1층이 아니기만 해봐라 부들부들부들 하며 티켓을 샀지만 다행히도 10열이었다. 어차피 앞에 줄이 꽤 있어서 1열 볼건 포기했기 때문에 10열 정도는 20프랑 주고 보기에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데, 극장 관계자인 듯한 사람이 무대 위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무언가 공지할 내용이 있다는 건 언제나 영 좋지 않다. 독일어라서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대충 돈 알폰소 역 가수가 아파서 대타를 구했는데 도저히 연기까지 연습할 시간은 안 돼서 옆에서 보면대 놓고 노래 부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온전한 코지 한번 보겠다는 게 그렇게 욕심인겁니까ㅠㅠ
그렇게 공연이 시작됐는데 직접 본 모차르트 오페라 중 가장 뛰어난 연출을 경험하게 됐다.
무대를 1층과 2층으로 나누어 극 내내 특별히 무대장치를 옮기지 않고도 1층과 2층을 번갈아가며 사용해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을 만드는 연출이었다. 서곡 동안 1층에서는 남자들이 헬스를 하고 2층에서는 요가와 유산소운동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무대를 보아하니 만약 1열에 앉았으면 목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2층 장면을 아예 못봤을지도 모르겠다. 하 스위스 학생들이 내가 너무 앞에서 볼까봐 걱정돼서 새치기를 해준거였구나….
내가 아주 좋아하는 스타일의 연출이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연극적 탄탄함. 체르냐코프나 슈투트가르트 연출이 연상되는 색감과 연기 스타일이었다. 오페라가 진행되면서 이게 다가 아니구나라는 걸 알게됐다.
연출이 범상치 않아지는 장면은 바로 두 남자가 군대로 떠나는 장면이었다. 페란도와 굴리엘모는 군대를 가는 것 같더니 아예 관속으로 들어가고, 관은 바닥에 들어가고 군인들이 나와서 조화를 들고오고 바닥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더니 다시 군인들이와서 유골함을 건네줬다. 이 모든게 그 짧은 음악에 좌르르 연달아서 나오는데 사람들 다 키득키득 거리고 난리가 났다. 군대 보내랬더니 아예 관뚜껑을 박는 컨셉이라니.
그런데 이 컨셉이 그냥 개그 장치 정도가 아니라 이 연출의 핵심이었다. 페란도와 굴리엘모는 군대에 끌려간 정도가 아니라 군대에 끌려가서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페란도와 굴리엘모가 서로 상대방의 연인을 유혹하는게 아니라, 아예 다른 남정네들을 고용해서 유혹하는 셈이다.
군대에 끌려간 연인을 기다리는것과 죽은 연인을 기다리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먼저 피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가 마음을 돌리는 것이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에야 죽은 애인을 위해 평생 수절할 각오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오래갈 수가 없다. 반대로 이런 식으로 까지 자신의 여자친구를 시험하는 페란도와 굴리엘모는 원래 설정보다도 더 나쁜놈이 된다. 도대체 자기 연인들에게 얼마나 큰 정절을 기대하는 것인가? 데스피나의 역할 역시 배신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여성해방을 부추길 뿐이다. 구혼자로 나서는 남자는 중동계 수염을 가진 미남 배우들이 대신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코지의 이야기가 매우 간소화된다. 두 커플의 뒤바뀌는 로맨스가 사라지고, 오직 두 여성이 어떻게 새로운 남성의 등장에 반응하는지만 초점을 맞춘다. 원래 짝보다 피오르딜리지-페란도, 도라벨라-굴리엘모 짝이 잘 어울린다던가 하는 가능성을 싹둑 잘라냈다. 둘은 마치 고스트 연애왕이라도 된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구애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대신 노래를 할 뿐이다. 커튼콜을 할 때에도 피오르딜리지-굴리엘모, 도라벨라-페란도가 함께 입장했다.
아리아를 처리하는 디테일도 좋았다. 두 남자가 떠난 뒤 도라벨라가 부르는 아리아는 말그대로 지랄발광이었다. 괴로워서 정신이 나간 것 처럼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더니 하이힐을 천장에 꽂아버릴 정도로 발길질을 하질 않나 물을 얼굴에 끼얹질 않나, 벽에 가서 머리를 박질 않나. 객석에선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데스피나의 1막 아리아에서는 군인들이 여성들에게 환호하는 영상 자료라던가 여성에게 허락된 것은 Kinder Küche Kirche 밖에 없다는 흑백 영상을 보여줬다. 페란도가 un aura amorosa를 부르는 장면은 코지에서 극이 멈춘다는 의미에서 가장 아리아다운 순간일 텐데 이 때 돈 알폰소가 아예 마이크를 주고 발라드 가수 마냥 부르게 조명까지 신경써준다. 이런 센스 완전 내 스타일이다. 두 여자가 남자의 구혼에 망설이면서 유골함을 안 보이는곳으로 치우거나 껴안는 장면 일종의 만화같은 과장으로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할 수 있었다.
알폰소를 설명하려는 노력 역시 있었다. 1막 초반에 내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2층의 여자들로 초점이 옮겨질 때 1층에서는 돈 알폰소가 확인하는 예전 문자 메세지가 프로젝터로 나온다. 알폰소의 여자친구가 자신의 형제와 바람을 폈다는 내용이다.
보러 가기 전 프로덕션 리뷰를 찾아보았을 때 섹스와 함께하는 코지라는 말이 있길래 뭐 코지가 그럼 그렇지.. 수준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수위가 상당히 높았다. 사실 노출이 정말로 연출의 핵심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관객들을 유입시키려는 시도인지는 모르겠다. 남자 가수를 벗겨선 어차피 돈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건지 몸좋은 남자 배우들이 대신 벗었다.
연출의 하이라이트는 피날레였다. 관뚜껑에 못 까지 박은 두 남자 주인공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만들것인가? 죽은 사람이 갑자기 파티에 입장하며 주인공들을 얼어붙게 만든다.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오인데?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들은 화음이 쿠와와와ㅘㅇ 나타났다. 바로 돈 조반니 서곡 화음이자 피날레 석상 입장의 화음이었다. 코지 피날레가 역시 다른 두 작품에 비해선 별로 재미가 없지하며 긴장 놓고 있던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함께 두 남자가 석상이라도 되는냥 등장했고 합창단은 혼비백산 해서 도망쳤다. 이 돈조반니 음악은 생각보다 더 길게 이어졌고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켰다. 뒤이어 다시 코지의 음악으로 돌아왔지만 이 꿈도 희망도 없는 파국적인 상황을 벗어날 순 없었다.
연출이 가장 좋았지만 다른 것도 대체로 훌륭했다. 일단 워낙 홀이 작고 좋아서 음향적으로 충만한 경험이었다. 이 정도 작은 홀은 독일에서도 몇번씩 가보았지만 이 정도 높은 퀄리티의 가수와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취리히 극장은 아주 특별한 위치의 극장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수준의 캐스팅일 때 취리히 오페라하우스가 줄 수 있는 경험은 바스티유나 코벤트 가든 따위에 비할 수 있는게 아니다.
단토네의 반주는 폭발적인 맛이 있었다. 놀라울 만큼 깔끔하고 강한 포르테 소리를 내줘서 속이 뻥 뚫리는 듯 했다. 다만 섬세한 터치라던가 깔끔하고 강한 총주 이외의 매력은 조금 아쉬웠다.
가수들이 모두 모범적인 모차르트 노래를 들려주는 와중에 피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는 너무 성량을 과시하며 부르는 편이었다. 물론 그 가공할 성량이 한두번 극적인 수단으로 포인트를 찍어주긴 했지만 중간중간에는 너무 힘이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는 장면이 꽤 있었다.
다시는 취리히를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유럽에 다녀왔는데, 후기를 적당히 메모해둔건 있지만 아직 다 쓰지 못해 틈나는대로 올릴 예정입니다.
'2019 '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슈트라우스 - 그림자 없는 여인 (만하임 국립극장) (0) | 2020.01.27 |
---|---|
2. 라모 - 빛의 소리 (쿠렌치스 & 무지카 에테르나 @ 바덴바덴 축제극장) (1) | 2020.01.27 |
3. 베르디 - 라 트라비아타 (LA 오페라) (2) | 2019.11.03 |
2. 메레디스 몽크 - 아틀라스 (LA 필하모닉 @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0) | 2019.11.03 |
1. 롱비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 (0) | 2019.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