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인드본이 퍼셀의 음악으로 들려주는 한여름밤의 꿈


MDT에서 오푸스 아르테 떨이를 했고, 난 닥치는 대로 집었다. 이 요정 여왕 역시 그때 산 블루 레이다. 프레스토 클래식에서 눈팅할 때 그라모폰과 비비씨 선정 딱지가 5개나 붙은 걸 보고 놓치면 안되겠다 싶었다. 퍼셀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디도와 에네아스 정도 밖에 없기에 비슷한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건을 받아서 플레이 타임을 확인하는 순간 내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228분?? 너 바그너세요?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좋은 블로그를 소개해줬다. 오페라 영상물 보기 전에 예습을 하는 편은 아닌데 이번에는 글을 꼼꼼히 읽어봤다. 여기 다른 글들도 참 좋던데 언제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요정 여왕에 대해서 당연히 알아야하지만 몰랐던 정보 첫 번째.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음악이 만들어진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퍼셀 말고 멘델스존, 브리튼이 있으니까. 올해 런던에 갔을 때 셰익스피어 글로브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중 하나가 한여름밤의 꿈이었다. 하지만 난 학회 발표를 준비하겠다고 공연을 놓쳤다. 요정 여왕을 먼저 봤더라면 학회 발표를 어버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연극을 보러 갔을 텐데.


두 번째. 이 작품은 마스크Masques 혹은 세미 오페라로 분류한다. 그라우트에서나 읽었던 장르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작품에서 연극과 음악은 거의 완전히 분리된다. 한여름밤의 꿈의 내용은 전문 배우들이 맡고, 각 막의 연극 뒤에 음악(마스크)이 붙는다. 그러니까 징슈필이나 오페라 코미크 처럼 대화체 대사가 이따금 등장하는 게 아니라, 매 막마다 15~20분 정도 연극을 하고 연극이 끝나면 음악이 시작한다. 이 때 음악은 연극의 내용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그 장면에 어울리는 상징적인 내용을 노래한다. 예를 들자면 2막에 티타니아가 잠드는 장면에서 밤, 미스테리, 비밀, 잠이라는 인물들이 나타나 노래한다. 


당시 잉글랜드 세미 오페라에서는 노래하는 모든 인물이 초자연적이어야 하는데 예외로는 목가적인 인물, 아니면 술에 취한 사람은 괜찮다고 한다. 이걸 통해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오페라를 보면 꼭 지적하는 "왜 말로 하면 될 걸 다 노래로 하는거죠"라는 태클이 매우 유서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초자연적이거나, 목동이나 술주정뱅이 정도는 돼야 무대에서 말 대신 노래를 하는게 말이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오페라에서 노래해도 되는 인간은 술취한 인간 정도라니, 아래 격언을 17세기 영국인들도 이미 알고 있던게 틀림 없다. 

No good opera plot can be sensible, for people do not sing when they are feeling sensible.” - W. H. Auden, Time, December 29, 1961. 



링크한 글에도 설명돼있 듯이 이 작품을 요즘 시대에 온전히 올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여러 오페라르 보았지만 이렇게 연극과 음악이 완전히 분리가 된 작품은 처음이다. 비슷한 예시라면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초판본을 들 수 있는데, 그건 그래도 연극과 오페라가 분리돼있다. 하지만 요정 여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과 음악이 분리된 채로 함께 진행된다. 게다가 아리아드네와 달리 음악의 내용이 자체적으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음악을 거의 극에 딸린 부수 음악 정도로 볼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연출가 조너선 켄트는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잘 해결했다. 음악의 순서와 대사를 어느정도 손보았지만, 그건 당대에도 당연한 관습이었을테니 문제될 게 전혀 없다. 극의 내용과 동떨어진 중국식 정원 같은 것도 적당히 삭제했다. 이 작품에 중국식 정원이 등장하는 건 순전히 메리 여왕이 중국 도자기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악사에서 어른의 사정으로 작품이 이상하게 망가지는 꼴은 항상 있어왔지만 이건 좀 너무 쌩뚱맞다.


연출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일차적인 이유는 연극 파트가 사람을 흡입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에 당황한다. 징슈필 생각하면서 저러고 몇분 뒤에 음악이 시작하겠지 기다리는데 기약이 없다. 그리고 이 구조에 익숙해지면 그 둘이 주고받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바로크 오페라에서 레치타티보로 뻔한 이야기 전개하고 결국에 각잡고 아리아 부르는 거 생각하면 차라리 아예 분리시켜버리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보여준다. 시대순서가 반대지만. 뻔한 레치타티보 대신 연극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건 훨씬 즐겁다. 레치타티보는 말 그대로 연기하듯이- 인데, 연기하는 것 같지 않은 레치타티보를 듣는 것보다 배우들이 곱씹어 발음하는 대사를 듣는 게 진짜 레치타티보다. 단어 하나하나의 발음과 말의 리듬, 얼굴 표정 까지 모든 게 훌륭하다. 영국 연극의 클라스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냥 오페라 보지 말고 연극 덕질이나 할까는 마음도 살짝 들었다.


연극을 어느정도 온전한 형태로 보존한 것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한여름밤의 꿈은 줄거리만 겨우 아는 정도였는데 작품의 주요 장면이 모두 포함돼있기 때문에 연극 한편을 다 본 듯한 착각을 준다. 오페라를 보면 연극이 덤 1+1 행사! 데이빗 파운트니 연출의 90년대 ENO공연은 연극을 완전히 삭제하고 한여름밤의 꿈 등장 배역들이 아리아를 맡는 형태로 개작했다는데, 그렇게 삭제하기엔 연극이 너무 아깝다. 대사가 셰익스피어 원전과 다른 부분이 많다곤 하지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절대 수준 떨어지지 않으니까.


여기에 곳곳에 미치도록 웃기는 장면들이 들어있다. 극중극을 준비하는 아재들의 유머는 킥킥댈 수 밖에 없다. 퍼셀이 나중에 추가한 술취한 시인의 노래를 배우인 보텀에게 준 것 역시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언급한대로 연극과 음악이 거의 완전히 분리돼있지만, 이렇게 둘이 가끔 만나는 순간은 황홀하다. 마스크에서 종종 등장하는 빵터지는 연출 역시 어떤 희극 오페라보다도 뛰어나다. 관객을 웃길 수 있는 연출은 훌륭한 연출이다. 


반주는 크리스티 지휘의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우리 시대 진정한 바로크 거장'이라는 진부한 말을 써볼까 하다가, 문득 지금 시대에 진정한 바로크 거장이면 솔직히 인류 역사에서 제일 뛰어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대연주로 생기넘치는 음향을 뽑아내는 실력, 생동감 있는 프레이징을 조탁하는 실력, 무엇보다 가수가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반주 실력까지 바로크와 그 이전 오페라를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야콥스가 아르모니아 문디에 묶여 영상물이 별로 없는 반면 크리스티는 이것저것 많이 내주시니 감사할 따름.


인터뷰에서는 크리스티가 악보를 어떻게 연주용 관현악을 편곡했는지 설명한다. 사용 판본은 퍼셀 협회에서 Bruce Wood와 Andrew Pinnock이 출간한 것이라고 하는데, 퍼셀 협회에서 출간한 판본의 관현악 완성도가 어떻게 되는지, 앤드류 피녹과 트레버 피녹은 무슨 관곈지 괜한 궁금증이 생겼다.


가수진들도 훌륭하다. 문제는 가수의 역할이 이름도 애매모호하고 죄다 뒤죽박죽이라 누가 누군지 기억이 안난다는 거다. 그래도 한명 꼽자면 비밀과 아담 역을 맡은 에드 라이온Ed Lyon을 언급하겠다. 아름답고 편안하게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퍼셀의 음악은 단정하며 투명하다. Word painting의 예시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흥겨운 노래는 있을 지언정 화려한 노래는 없다. 헨델 보다는 몬테베르디와 가깝다. 상대적으로 아담한 오케스트라 편성 역시 색다른 매력이다. 느린 아리아는 디도의 애가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아리아에 쉽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는 건 세미 오페라의 큰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극의 플롯과 음악이 분리되면서 음악이 극과 결합될 때 얻는 시너지를 상당 부분 잃는다. 기존 오페라 어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왜 갑자기 쟤네들이 나와서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이해가 갈리 없다. 듣는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꽤나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커튼콜 때 오페레타 마냥 마지막 합창 They shall be as happy as they're fair를 모두가 함께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배우들 까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부르는 그 장면은 이 작품 피날레의 이상적인 실현이라 할 만하다. 


새로운 오페라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정 여왕을 보면서 내가 봐온 오페라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깨닫는다. 그라모폰과 BBC의 영국 몰아주기를 감안하더라도 싹쓸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음악극이라는 분야에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역사적인 가치를 발굴해냈다. 이런 것이야 말로 뛰어난 예술적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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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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