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브리튼의 걸작과 글라인드본의 만남.


브리튼의 오페라는 다른 작곡가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다루는 내용이라든지, 음악적인 어법이라든지 말이다. 그래서 블루레이로 나온 브리튼 오페라 작품은 거의 대부분 챙겨보았다. 빌리 버드는 발매된지 비교적 오래된 블루레이라 최근 오푸스 아르테 떨이 기간에 구입해서야 겨우 보게 되었다. 


빌리 버드 작품 자체에 대한 내 인상은 상당히 독특했다. 보통 처음 보는 오페라에서 재미를 느끼는 걸 별로 기대를 안하는 편인데, 빌리 버드는 놀라울 만큼 흡입력을 갖추고 있다. 일단 음악 어법이 브리튼의 오페라 중에서도 귀에 편안한 편이며, 오케스트라 규모도 상당히 크다는 점에서 피터 그라임즈와 비슷하다. 둘 다 바다와 배 이야기라는 공통점도 있고. 오페라 전체가 배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배경도 흥미롭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하며 생긴 범선에 대한 로망이 남아있는 내겐 더더욱 그랬다. 곁다리로 빠지자면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처음 첼로를 배우겠다고 생각한 것도 이 영화에서 러셀 크로우와 폴 베타니가 바이올린 첼로 듀엣을 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여기에 나온 모바협이나 보케리니는 여전히 많이 좋아한다.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영국 전함이 프랑스 전함을 추격하는 와중에 생기는 일이라는 점에서 빌리 버드가 바로 이 영화와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완전히 똑같기 때문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여기에 빌리 버드는 허만 멜빌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스토리라인이 아주 훌륭하다. 브리튼의 오페라 중에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든가 나사의 회전 처럼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많지만 빌리 버드는 그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쉽고 명확한 편이다. 여기에 리브레토 역시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인 E.M. 포스터가 맡았다. 갈등 구조가 뚜렷하고 상징적인 요소보다는 실제 선상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상업 영화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 음악까지 브리튼 답지 않게 강렬하다. 챔버 오페라를 많이 남기고 그나마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쓴 피터 그라임즈 역시 가장 유명한 네 개의 바다 간주곡을 생각하면 브리튼 하면 투명하고 명상적인 음색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물론 격정적인 음악도 있는 편이지만 빌리 버드는 그것보다도 더 거친 느낌이다. 하지만 빌리 버드에서는 거친 해군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처음 선원들이 부르는 합창은 고통스런 바다 생활이 느껴지는데 마치 흑인 영가의 느낌이 난다. 이 선율이 버드의 처형 이후 선원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다시 등장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소름이 돋는 장면이다. 특히 2막 초반부의 전투 준비 장면은 오페라에서 등장하는 가장 훌륭한 전투 음악이라고 평하고 싶다.


뱃사람 + 군인이라는 극마초적인 배경 때문에 오페라에는 남자만 등장한다.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오페라가 내가 본 것 중에 라흐마니노프의 '인색한 기사' 밖에 없었는데 그건 등장인물이 아주 적은 오페라기라도 하지, 빌리 버드는 규모가 상당히 큰 오페라다. 그나마 청년 장교들 역에 보이 소프라노가 등장하긴 하지만 비중은 미미한 편이다. 남자만 수십명이 모여서 5주 동안 리허설 했을 거 생각하면 합창단원 한테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이 외에도 빌리 버드가 부르는 아름다운 선율도 많이 등장한다. 버드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다른 인물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노래를 부른다. 버드의 매혹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이 노래들은 처음 듣기에도 아주 아름다운 노래들인데, 특히 버드가 마지막에 감옥에 혼자 갇혀 노래하는 장면은 브리튼 특유의 아름다움이 물씬 묻어나오는 장면이다.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인데 연주 까지 훌륭하다. 타이틀 롤을 맡은 바리톤 자크 임브라일로Jacques Imbrailo는 연기나 노래나 어디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톤이면서도 아름다운 미성을 갖춘 가수다. 악역 클래거트 역을 맡은 필립 엔스Phillip Ens는 첫 등장부터 좌중을 사로잡는 진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잔혹함 그 자체라고 할만한 목소리이기에 역할에 아주 적합한 목소리라 몰입하여 들었다. 이상하게도 마지막에 야유를 받는데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비어 선장 역의 존 마크 에인슬리는 뛰어난 브리튼 테너지만 이 역에 아주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브리튼 역할과 달리 선장으로서의 카리스마나 리더십도 함께 보여야하는데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모습만 부각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끊임없이 고민하는 면모는 잘 드러났다.


연출은 전통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다. 연출가 마이클 그란데지Michael Grandage는 원래 연극 연출가로 이번이 오페라 데뷔였다고 한다. 실제 18세기 함선의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무대, 영화를 보는 듯한 디테일한 의상, 무대를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섬세한 연기지도 까지 모든 면에서 흡족했다. 무대는 글라인드본 오페라하우스의 층계 구조를 그대로 연장하여 홀 자체를 전함의 내부로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특히 연기 지도가 훌륭했는데, 빌리 버드가 말을 더듬는 장면이나, 비어 선장이 승진 이야기를 꺼내는 줄 알고 신나하는 모습, 클래거트의 허위 고발에 억울해하는 모습까지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완성도 높은 연기를 보여줬다. 클래거트의 사악하며 변태적인 표정 역시 압권이다. 합창단원 한명 한명의 연기 지도도 훌륭했는데, 빌리 버드를 교수형하기 위해 밧줄을 붙잡고 있는 선원들의 비극적인 표정과 자세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길 만한 장면이다.


마크 엘더의 지휘도 깔끔하며 시원스럽다. 글라인드본이 1981년 한여름밤의 꿈 이후로 30년만에 올리는 브리튼 작품이라고 하는데 역시나 글라인드본 답게 기대만큼 완성도 높은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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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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