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하위호환 작품


한스 피츠너의 이름을 처음 들은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말러나 슈트라우스에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였을까. 지휘자로 녹음한 음반도 종종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츠너는 여러모로 최근 언급한 부조니와 비교할만 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대 작곡가인데 피츠너는 진성 꼰대 게르만이고 부조니는 이탈리아 - 독일의 혼혈이다. 둘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와 파우스트 박사는 작곡년도가 각각 1917년, 1924년으로 비슷한 편이며 모두 작곡가 본인이 리브레토를 썼다. 부조니가 혼란스러울 만큼 다채로운 작법을 보여주는 반면 피츠너의 음악어법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피츠너는 동시대 작곡가랑 사이가 안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부조니를 싫어했다데, 리스트와 베를리오즈를 지지한다는 게 이유였다. 팔레스트리나의 초연 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는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성을 극찬하면서도 동시에 피츠너의 인간성은 매몰차게 공격했는데, 부클릿의 글을 읽어보니 심각한 꼴통 게르만이다. 독일 만세를 외치면서 독일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외국인, 특히 유대인을 싫어하였으며 재즈를 활용했다는 이유로 힌데미트나 바일을 깎아내렸다. 인간성이 너무 더러워서 심지어 게슈타포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같은 사람도 피츠너를 싫어했다니 말 다했다.


오페라 팔레스트리나는 트리엔트 공의회 의결에 따라 교회에서 다성음악이 금지되는 걸 팔레스트리나가 기가막한 다성 미사 곡으로 구원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내를 잃고 절필한 팔레스트리나에게 추기경 보로메오가 와서 다성음악을 구원할 미사를 부탁한다. 팔레스트리나는 거절한다. 갑자기 조스캥 데프레 같은 이전 음악가들의 영혼이 나타나 팔레스트리나에게 미사를 쓰라고 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다음엔 천사들이 나타나며 죽은 아내의 영혼도 나타나 함께 노래를 한다. 팔레스트리나는 미친 듯이 곡을 써내려간다. 1막 끝. 2막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보여준다. 2막 끝. 3막 팔레스트리나의 미사 공연이 끝나고 교황이 만족하며 나름 해피 엔딩


1막을 볼때는 잘 몰랐지만 2, 3막을 다 보고나면 이 리브레토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단 3시간 짜리 오페라에서 2막은 1시간 정도인데, 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실제로 미사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건 5분이 될까말까다. 당연히 2막 내내 타이틀롤 팔레스트리나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3막은 30분 가량으로 상당히 짧은데, 실제 미사 장면이 나오는게 아니라 미사가 끝난 뒤 사람들이 팔레스트리나 만세를 외치는 장면부터 시작하기에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


반대로 1막의 경우는 영화에서 자주 볼 법한 시나리오의 전형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로 위기에 빠진 다성음악! 이 다성음악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천재 작곡가 팔레스트리나 뿐. 하지만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하여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는데... 과연 보로메오 추기경은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농담이 아니라 사실 이 오페라에서는 팔레스트리나 만큼이나 보로메오 추기경이 더 비중이 높다. 일단 세 막 다 등장하는 인물이 보로메오 밖에 없다. 바그너 오페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위장 선발'을 보고 자연스레 한스 작스나 구르네만츠를 떠올릴 것이다. 1막에서 팔레스트리나를 설득하고 협박하는데 실패했다가 3막에서 팔레스트리나의 성공을 보고 눈물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완벽하게 구르네만츠를 떠올리게 한다.


바그너와 공통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피츠너는 바그너 특유의 설명충 독백을 한껏 활용한다. 1막에서 보로메오가 팔레스트리나에게 "교황이 어쩌구저쩌구 해서 다성음악이 어쩌구저쩌구 그래서 너가 어쩌구저쩌구"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바그너 스타일 독백이다. 이런 독백들이 꽤 자주 나오는데, 문제는 피츠너의 재능이 바그너의 재능만 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피츠너의 관현악은 상당히 아름답지만, 노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가곡도 많이 남겼는데 뭐가 문제일까? 어떻게 한 번 들은 것으로 판단하겠냐만, 아마 가사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노래 대부분이 상당히 느린 템포의 독백류인데 가사의 리듬이나 운율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독일어 자막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운율이나 발음의 통일감 등을 느껴보려고 집중해서 들어보아도 그런 걸 찾기 어려웠다. 실제 리브레토를 훑어보아도 바그너의 리브레토를 읽을 때 느껴지는 운율을 찾아보기 힘들다. 차라리 슈트라우스처럼 리브레토가 인물끼리 주고받는 대화 위주였다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피츠너는 본인이 리브레토를 쓰면서도 바그너를 따라갔다.


하지만 리브레토에 담겨있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주의깊게 다룰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상 1막 끝에서 미사를 작곡하는 순간 극은 결말에 다다른 셈인데, 피츠너는 다른 방식으로 극을 진행해나간다. 특히 2막 트리엔트 공의회는 1, 3막과 거의 분리되는 독특한 부분이다. 이 장면에서 다성음악 미사는 그저 이 부분이 오페라 안에 들어가기 위한 핑계라고 할만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당시의 정치적인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오만한 스페인 백작, 스페인으로부터 가톨릭 주도권을 얻어오려는 독일 추기경들, 으르렁거리는 이탈리아 추기경,  신교들이 판치는 곳이라 무시당하는 프라하 추기경, 분위기 파악 못하고 끼어드는 촌뜨기 주교, 이상한 이야기나 하는 아시리아 족장, 이 모든 사람을 주관해야하는 교황 특사 까지. 논쟁은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병사들을 데려와 발포하여 진압하는 것으로 끝난다. 한 마디로 개판이다. 


피츠너는 왜 이 이야기를 오페라에 집어 넣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예술의 형태를 규정하는 인간들의 끔찍한 실태를 고발하고자 하는 것일까? 한명씩 말하지 않고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면 난장판이 되는 공의회의 모습에서 오히려 다성음악의 한계를 지적하는 걸까? 너무 나간 발상일지도 모르지만, 극중에서도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팔레스트리나가 완벽한 다성 음악 미사를 선보이면, 우리 모두 단성으로 동의할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저렇게 많은 의견을 하나로 통합한 음악의 위대함을 역설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과연 팔레스트리나는 성공했는가? 그의 제자 실라는 1막에서부터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데, 결국 스승을 떠나 피렌체로 갔다는 것이 3막에 밝혀진다. 오페라는 팔레스트리나가 아내의 초상화를 보고 조용히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명가수의 화려한 피날레와 상당히 대비된다. 미사의 성공에도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막에서 팔레스트리나가 작곡을 하게되는 과정 역시 주목할만 하다. 권력자의 설득과 협박, 선배 예술가들의 부탁에도 팔레스트리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지언정 자신의 영감에 명령을 내릴 순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천사의 음성, 아내의 음성만이 팔레스트리나를 움직였다. 피츠너가 생각하는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그가 평소에 독일 음악 전통에 오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걸 생각하면 Meister들의 부탁을 거절하는 팔레스트리나의 모습은 상당히 의외다.


피츠너의 음악은 1917년에 작곡된 오페라 치고 귀에 참 편안하다. 첫 전주곡을 보면 영화 사운드트랙을 듣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언제나 선율적이고 아름답다. 오케스트라 지휘 경험도 많은 작곡가 답게 오케스트레이션도 훌륭하다. 악기 편성을 화려하게 쓰는 것은 아니지만 바그너 - 브루크너를 잇는 독일적인 음향을 추구한다. 종종 나오는 실내악적 편성 역시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듬은 굉장히 단조로운 편이다. 악보를 보아도 리듬구조는 브루크너에 비해서도 단조롭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공연은 꽤 훌륭하다. 연출은 좀 아스트랄 하지만 가수들의 노래가 빛난다. 보로메오 역의 팔크 슈트루크만을 비롯해 2막에만 등장하는 모로네와 루나 백작에 미하엘 폴레와 볼프강 코흐가 나온다. 이 세명이 압도적으로 노래를 잘한다. 팔크 슈트루크만은 리세우 반지 보탄을 보며 노래를 썩 잘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이 공연에서는 그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슈트루크만이 이렇게 깊고 안정되며 꽉찬 소리를 내다니. 아주 훌륭하다. 미하엘 폴레야 내가 항상 극찬하는 바리톤으로 이번에도 역시 훌륭한 노래를 들려준다. 지루할 수 있는 2막의 공의회 토론 장면을 완벽한 카리스마로 압도한다. 볼프강 코흐는 그때 그때 실망과 만족을 오가는 가수인데 이번에는 매우 만족이다. 사실 루나 백작의 분량이 굉장히 적은 편이지만 그 작은 분량으로도 존재감을 나타낸다. 재수없고 오만한 스페인 공작을 아주 잘 표현해낸다.


타이틀 롤을 맡은 크리스토퍼 벤트리스는 파르지팔 덕에 매우 익숙하고 팬심도 있는 테너지만 이 공연에 후한  평가를 주긴 어렵다. 비브라토가 과하며 불안하다. 원래 팔레스트리나 역할이 불안한 인물이라지만 타이틀 롤로서 구심점을 만들지 못한 점은 아쉽다. 그외에 교황 특사 베르나르도 노바제리오 역의 John Daszak의 경우 독일어 딕션이 구려 아쉽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가수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모두들 꽤 긴 독창이 들어있어 비독일어권에서는 작품 상연을 엄두도 못낼 것 같다. 합창단은 연습할 시간이 없었는지 곳곳에서 불안한 편이다. 


시모네 영의 지휘는 처음 들어보는데, 무난하지만 번뜩이는 순간을 발견하진 못했다. 오케스트라 음향은 잘 뽑아내는데 극적인 클라이막스가 탁월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듣고 있는 음반이 키릴 페트렌코 지휘라 아쉬움이 좀 생긴지도 모르겠다.


글 머리에 바그너 하위호환이라고 썼지만 물론 이 작품만의 매력도 있는 편이다. 달콤한 화성과 종교적인 광휘를 품고 있는 부분이 꽤 많지만, 그런 것을 듣고자 오페라를 보기에는 복잡한 리브레토가 단점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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