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인공이 드디어 약물복용 혐의에서 벗어났.

한창 뜨거운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2015년 바이로이트에서 상연된 카타리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이 이야기가 모두 사랑의 묘약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요약된 줄거리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받아들인다. 묘약이 끼어듦으로써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한낱 동화나 전설 쯤으로 치부하곤 한다. 내가 조교를 맡았던 과목의 학생들도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

틀렸다. 대본이나 음악이나 명백하게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미 오페라 시작 전부터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묘약 모티프는 시선Look, Glance 모티프의 변형일 뿐이다. 이졸데가 탄트리스를 찔러 죽이려다가 눈이 맞는 순간 이미 둘은 말 그대로 눈이 맞았다. 

배리 본즈와 박태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약물은 모든 이야기를 헛되게 만든다. 약물이 들어갔다는 걸 아는 순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진실이 아니라 허구로 받아들인다. "그거 약 한 거잖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모든 행동은 그저 약으로 설명될 뿐이다.


카타리나 바그너는 이 작품에서 묘약을 없애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낳는지 훌륭하게 표현해낸다. 1막에서부터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관계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브랑게네와 쿠르베날은 둘을 말리기 바쁘다. 그 유명한 묘약 장면에서 두 사람은 묘약을 마시지 않고 손에 부어버린다(스포일러라 생각해 쓰지 않을까 했는데 이미 표지부터가 그 장면이다). 약을 마실 듯 안 마실 듯하다가 결국에 버려버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꼈다. 묘약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승리했다. 이제 이 오페라는 '하녀의 선택 때문에 실수로 묘약을 마셔버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미친 듯이 서로를 갈구하는 두 연인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사랑은 우연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2막과 3막의 그 모든 비극이 고작 묘약 하나 때문에 생겼다면 너무나 허무한 일이다. 

이제 2막 부터는 묘약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 아니라 용감한 선택의 결과다. 카타리나 바그너는 여기서 한 술 더 뜬다. 2막 전체가 처음부터 마르케와 멜로트의 덫이라는 걸 보여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를 껴안는다. 그리고 자신을 비추는 저 감시 조명을 바라보며 사랑을 노래한다. 단순히 사랑의 열병에 빠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 거짓된 빛의 세계에 있는 인간들에 대한 자부심 넘치는 선언이다. 원래 연출이라면 두 사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덫에 걸려든 거겠지만, 이제는 사랑을 위해 제 발로 죽음에 걸어 들어간다. 술 취한 심신미약 상태에 저지른 잘못이라고 변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렷이 알고 있다. 사랑의 묘약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비장미가 있다.

묘약이 없으면 묘약에 관련된 대사는 다 어떻게 하고? 물론 몇몇 대사는 묘약 없이는 어색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잃는 것보다 얻는게 더 많으면 되는 법. 2막에서 브랑게네가 모두 자기 탓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이졸데가 '너는 사랑의 신을 모르는구나'라고 하는 부분은 원래 묘약에 취한 사람이 현실을 부정하는 답답한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3막에서 트리스탄은 자신이 마신 묘약을 저주한다. 이 장면은 마치 '칼레의 시민'을 보는듯 했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지만, 그 고통의 무게에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묘약이 들어갔다면 그저 괜한 묘약을 원망하는 장면이었겠지만, 묘약이 없으니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고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지막에 마르케가 브랑게네로부터 묘약 이야기를 다 들었다며 "내가 전에 이해하지(fassen) 못했던 것들이 이제 명확하게 드러났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이 재미있는데, 오히려 2막 트리스탄의 "was du frägst, das kannst du nie erfahren(당신이 물어본 걸 당신은 절대 알지 못할 것입니다)"이 명백해진다. 마르케의 대사가 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것이 명백하기에, 그 대사가 힘을 잃고 트리스탄의 대사가 강조되는 셈이다. 아마 이 점을 의식했는지 유독 트리스탄의 2막 대사가 강조된 느낌이었다. 이 연출을 보고 이 두 대사의 아이러니함을 발견했는데, 마르케는 이해했다고 하지만 트리스탄이 말한 건 경험하다는 뜻도 있는 erfahren이다. 빛의 세계에 있는 마르케는 절대로 그런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 연출이 만들어낸 아주 재미있는 효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막의 플롯이 사실상 한단계씩 앞당겨진다는 것이다. 1막의 둘은 이미 사랑에 빠져있다. 1막 내내 브랑게네와 쿠르베날은 이 연인을 말리기 위해 고생한다. 1막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답답하게 츤츤대는 장면이 이젠 서로 사랑한다는 걸 차마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긴장감을 준다. 2막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 시작할 때부터 둘의 관계는 마르케와 멜로트에게 발각된 것처럼 표현된다. 마르케의 부하들이 이졸데와 트리스탄을 이 방에 직접 데려와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것이 발각되고 행복한 시간이 끝나버린 3막의 황폐한 분위기가 이미 2막에 드리운다. 그러므로 3막은 새로운 이야기를 할 여지가 생긴다. 트리스탄은 그토록 원하던 죽음, 밤의 세계에 도착해 자신의 처지를 절규한다. 그는 빛에 대항해 자신의 사랑을 밝혔고 이젠 끔찍한 비극만이 남아있다. 후술하겠지만, 카타리나는 이 3막 1장에서 트리스탄은 이미 죽어있거나 혹은 가사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기존의 3막의 피날레는 극적으로 재회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결국 함께 죽음의 세계로 간다는,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카타리나는 꿈도 희망도 없는 그 처절한 파국을 끌어낸다. "이건 너희들이 선택한 일이었고, 그 끝은 절대 아름답지 않단다"라는 듯.


카타리나의 이번 연출은 '명가수'에 비하면 상당히 얌전한 편이다. 예상한 대로 공연이 끝나고 부잉도 별로 나오지 않는다. 명가수 마지막 화음이 끝나자마자 폭발하던 야유와 대비된다. 

사실 처음 표지를 보고 좀 당황했다. 어두운 공간에 채도가 낮은 복장의 두 주인공이 서있는 모습은 1980년대 공연 같다. 작품 전반적으로 빈티지한 효과들이 사용된다. 3막의 환상 장면은 마치 사진으로만 보던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을 보는 느낌이었다.

극의 전체적인 해석을 전달하는 방법 역시 세련된 편이다. 1막에서는 계단을 통해 에셔를 연상케하는 미로를 만들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서로 떼어놓으려는 쿠르베날과 브랑게네의 연기는 극에 상당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압권은 이졸데가 트리스탄을 만나기로 결심하는 장면. 오케스트라의 상향 스케일과 함께 이졸데가 다리를 타고 순식간에 윗층으로 올라가며 쿠르베날과 브랑게네에서부터 떨어진다. 음악적으로도 묘한 일치감을 주며 쿠르베날과 브랑게네가 닿을 수 없는 분리된 공간으로 차원 이동해버린다는 개념 역시 이야기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2막에서도 단순하지만 공간을 잘 활용한다. 브랑게네와 쿠르베날은 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벽의 돌출물을 잡아보지만 모두 떨어져나간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조명을 피해 커튼을 치고 어두운 공간속에 숨는 것은 밤에서 느끼는 아늑함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한다. "O sink hernieder Nacht der Liebe"의 느린 듀엣은 아예 무대 뒤쪽, 마르케와 멜로트를 향해 부르는 것으로 표현한다. 사랑의 속삭임은 여기서 빛을 거부한 사랑의 선언이 된다. 상당히 거대한 프로젝션을 활용해 두 남녀가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틸레만은 인터뷰에서 "결과를 모른다면 O sink hernieder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결과를 확연히 보여주는 무대에서는 음악이 전혀 다르게 들린다.  3막 쿠르베날 장면에서는 무대를 극단적으로 좁게 활용한다. 공간을 추상화시켜 회상이나 환상 장면처럼 느껴지는 걸 의도한 듯하다. 


또한 조명의 활용이 매우 적극적이다. 오페라 내내 낮과 밤, 빛과 어둠의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조명 자체가 이야기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카타리나는 이 작품이 정말로 빛과 어둠에 대한 것임을 체감시키게 만드려는 듯 조명을 과도하게 조절한다. 1막에서는 조명을 밑에서 높은 곳으로 비춰 마치 배우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처럼 표정을 강조한다. 2막에서는 연인을 훼방놓는 빛으로 누구나 소름끼칠 듯한 강렬한 하이라이트를 사용한다. 2막과 3막에서 완전한 어둠을 만들어놓는다. 그동안 어두침침한 연출은 많았지만 이렇게 사람이 안보일 만큼 어두운 것은 흔치 않다. 아마 직접 보는 사람 중에 너무 어두워 불만이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싶다. 3막 트리스탄의 독백이 끝나고 이졸데가 들어오는 장면에서 무대가 암전되는데, 트리스탄의 독백이 어쩌면 이미 트리스탄의 무의식 속에서 진행된 것이고, 그가 진짜로 죽음을 통해 완전한 밤의 세계로 갔다는 걸 암시한다. 이를 통해 앞서 언급한 3막  3막 마르케와 멜로트 일행이 도착하는 장면에서 갑작스레 무대가 환해지는데, 아마 직접 극장에서 본 사람은 상당히 눈이 부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런 극단적인 조명은 오케스트라 피트 조명을 신경 안써도 되는 바이로이트에서만 가능할테다.


쿠르베날과 브랑게네의 캐릭터를 살리려고 노력한 점 역시 돋보인다. 1막에서부터 둘을 뜯어말리기 위해 육체적으로 고생하며, 브랑게네는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는 오해 때문인지 신경쇠약에 걸린 듯하다. 3막에서 트리스탄이 쿠르베날한테 갑질하는 장면에서 쿠르베날이 스트레스 받는 것 역시 사실적인 표현이다. 솔직히 누가 봐도 트리스탄이 좀 심하잖아... 마지막에 거의 모든 인물이 죽고, 이졸데는 마르케에게 끌려간 뒤 트리스탄 옆에 브랑게네만 남은 것 역시 흥미롭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잘못된 죄책감을 느끼며 말이다. 살아남은 브랑게네가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 아닐까.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간혹 컨셉이 과하다든가 동선이 자연스럽지 않다든가 하는 느낌이 있다. 3막에 빈티지 느낌 나는 이졸데 환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아니다. 동선이 어색한 부분 예시를 들자면, 2막 2장 마지막 듀엣 "So stürben wir"에서 철창 구조물을 너무 오랫동안 써먹었다. 대충 결국에 둘이 저기 안으로 들어갈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음악에 맞춰 동작을 너무 늘어뜨려놔 보는 게 너무 답답했다. 발퀴레로 치면 어차피 제가 노퉁 뽑을 거 아는데 10분동안 노퉁 박혀있는 나무만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냥 뽑아 뽑으라고!!!


음악 역시 훌륭하다. 틸레만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점점 더 틸레만 특유의 변태 같은 감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의 뚜렷한 색채가 줄어든다는 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싫었던 나 같은 사람은 환영할 일이다. 틸레만의 음악을 묘사하라고 한다면, 야들야들한 음색으로 소리를 밀어서 내는 걸 좋아하며 듣는 사람을 안달 나게 할 정도로 클라이막스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다가 아주 서서히 그 정점에 다다르는 변태다. 

그런데 틸레만이 이제 그 변태 짓을 줄였다. 틸레만은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호랑이에 비유하며 어떻게 너무 가까이 가지 않고 우리에 넣을까라고 말하는데, 이제 그 호랑이를 더 가까이서 잡고 있는 느낌이다. 음악 속에 틸레만의 색깔은 사라지고 바그너 작품의 폭풍같은 에너지가 강하게 자리잡는다. 오케스트라를 통제하는 능력을 십분발휘한다. 본인은 이제 모든 마디에서 황홀감을 주려는 유혹을 벗어났다고 말하는데, 이제 과도한 변태적 설계를 어느정도 놓은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매특허가 어디로 사라진건 아니고, 중요한 순간에 포인트를 확실히 주는데 나타난다. 2004년 빈 슈타츠오퍼 실황 음반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다는데 그래도 틸레만은 틸레만이다. 놀랍게도 틸레만이 트리스탄을 다시 한건 2004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가수들의 노래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출연진이 전반적으로 모두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데 틸레만의 영향이 컸으리라 확신한다. 오페라 지휘자는 극의 흐름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사와 음악의 늬앙스를 꿰고 있어야 한다. 틸레만은 분명 바그너를 자신만의 확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지휘자다. 자기가 만드려는 극의 흐름을 가수들과 함께 확실히 만들어냈고, 4시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게 느껴지는 음악을 들려준다.


트리스탄, 이졸데, 브랑게네, 쿠르베날, 마르케 중에서 이졸데를 제외하면 모두 상당히 훌륭하다. 스티븐 굴드Stephen Gould는 이전엔 틸레만 무영녀에서만 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때는 황제 역의 비중이 애매해서 잘 몰랐지만 트리스탄을 보니 작품을 끌고가는 힘이 있는 가수다. 브랑게네 역의 크리스타 마이어Christa Mayer와 쿠르베날 역의 이아인 패터슨Iain Paterson는 노래도 좋고 연기도 훌륭하다. 둘 다 모범적인 목소리의 표본이랄까. 제펜펠트Georg Zeppenfeld는 요새 물이 오른 느낌이다. 로엔그린에서는 외모와 연출 때문인지 약간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는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무대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여기에 긴 호흡의 프레이징 역시 탁월하다. 딕션 역시 출연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이졸데 역의 에벨린 헬리치우스Evelyn Herlitzius는 괜찮은 가수지만 이졸데를 맡기에는 아직 부족해보인다. 과한 비브라토로 목소리에 안정감이 없다. 셰로 엘렉트라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엘렉트라에 비해 이졸데는 안정된 목소리를 통해 긴 프레이즈를 불러야 한다. 간혹 나오는 고음은 안정적이지만 평상시 노래가 불안한건 어쩔 수 없다. 거기다 노래가 벅찬지 발음도 명확하지 않다. 



함께 실려있는 틸레만 인터뷰가 압권이다. 아마 요즘 시대에 인터뷰를 제일 재밌게 하는 지휘자가 틸레만 아닐까. 베토벤 교향곡 다큐도 그렇고 반지 다큐도 그렇고. 인터뷰 영상이 많은 걸 보면 본인도 꽤 즐기는 것 같다. 그의 인터뷰에는 어떠한 정치적 타협도 없다. 메트 오페라 영상에서 지휘자 인터뷰 하면서 맨날 뻔한 "아 메트는 정말 완벽한 곳이에요 ^^" 이런 이야기만 듣다가 인터뷰어를 무안하게 만드는 틸레만의 날선 답변을 듣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하다. 인터뷰가 너무 재밌어서 한번 더 돌려봤다. 인터뷰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리얼리티 넘치는 대화의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다. 찾아보니 인터뷰어 악셀 브뤼거만은 독일 음악 저널리스트로 틸레만을 굉장히 자주 인터뷰했다.


인터뷰 내용 중에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옮겨보았다. 


- 이런 대작을 지휘할 때, 어느 지점부터 '황홀'을 줘야겠다고 생각하시나요?

틸:"맨 처음이요"  

.........

틸:"가급적 저기 까진 가지 말자. 지휘할 때도 그렇죠"

-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거기까지 빠져들고 말죠. 확 빠져들잖아요, 실제 삶에서는

틸: "그래보신 적 있으세요?"

.......

- 그렇다고 오페라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지 가르치진 않잖아요?

틸: Doch!(가르치고 말구요)

인터뷰를 볼때마다 내가 아는 지휘자님과 이야기 나눌 때가 떠오른다. 어떤 표현이든 명료하게 말하길 원한다든가, 인터뷰어가 안다고 생각한 것에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이야기한다든가, 무언가를 놓치면 단박에 반문한다든가, 순식간에 질문을 우문으로 만들어버리는 현답이라든가. 인터뷰어가 쩔쩔매는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면서 보는 내내 흥미롭다. 


글을 적당히 멈춰야 할 것 같은데 이왕 길어진거 더 써보자. 카타리나 바그너에 대한 이야기다. 


바그너 가문의 후손들은 아주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21세기에 찾아볼 수 없는 실질적인 왕족이라고 할까. 일단 어떤 작곡가, 혹은 어떤 예술가도 후손들이 이렇게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를 떠올릴 수 없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당연히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때문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바그너 종교화의 산물이며 일종의 니벨룽의 반지다. 실제로 어떤 힘이 있다기 보다는, 가치가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물론 극장 자체의 역사와 특징이 주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인기를 설명하긴 어렵다. 어떤 작품이 특정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것만 미쳐서 쫓아다니는 경우가 있나? 오페라 코미크에서 카르멘 다시 상연한다고 전세계 카르멘 덕후들이 달려갈까? 당연히 아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바그너 작품을 위해서 설계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바그너가 그 극장의 음향을 듣고 작곡한 작품은 파르지팔 밖에 없다. 사람들이 화란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 명가수를 보러 꼭 축전극장에 갈 필요는 없는거다. 바이로이트 음향이 특별한데요? 그 특별한 음향이 파르지팔 제외 바그너 오페라에 그렇게 좋은 거였으면 그걸 따라하는 극장이 하나 쯤은 있었을 테다. 

바이로이트는 바이로이트라서 가치가 있는거다. 

바이로이트에는 최고의 가수들이 모인다. 왜? 바이로이트는 최고의 공연을 하는 곳이고 가수들에게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연비를 후려쳐도 가수들을 모으는 게 힘들지 않았었다. 그렇게 1950~70년대에 바이로이트에서는 최고의 바그너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가수들의 면면을 보았을 때 이제 바이로이트에서 슈퍼스타를 찾아보긴 힘들다. 이제 열정 페이는 안 먹히거든. 요즘은 바이로이트의 명가수보다 뮌헨의 명가수가 더 기대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바이로이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바그너 가문의 운영이다. 작곡가의 후손들이 직접 운영하는 정통성이 차고 넘치는 축제다. 21세기에 혈통이라니! 바그너 가문은 바그너 예술의 진실한 수호자이자 계승자 역할을 도맡고, 사람들은 바이로이트에 가며 그 이미지를 만끽한다. 혈통과 역사가 주는 그 무형의 아우라가 바이로이트의 힘이다. 그 아우라를 쫓아 바그너 신도들이 몰려오는 거다. 그리고 그 신도들이 바이로이트를 완성한다. 실제로 다른 오페라 극장과 차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관객의 미친듯한 열성이다. 내가 경험한 바이로이트의 가장 큰 매력은 거기에 존재한다.


다행히도 바그너 가문은 그 아우라를 활용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안다. 첫째로 항상 전위적인 연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이로이트는 연출의 최첨단에 서야 한다. 바이로이트에 오는 관객들은 독일의 모든 바그너 공연을 쫓아다니는 미친 놈들이니까. 모든 관객이 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봤고, 이 작품에 너무나 익숙하며 더 깊게 알고 싶어 미쳐있는 작자들이라는 걸 기본으로 생각하고 연출한다. 

또 하나는 바그너 가문이 직접 연출을 맡는 것이다. 빌란트 바그너는 전후 바그너 연출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다. 볼프강 바그너 역시 빌란트 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의 스타일로 바이로이트를 이끌었다. 이제 그리고 카타리나 바그너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 때보다 훨씬 더 다양한 연출이 판을 치는 마당에, 바이로이트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앞에서 바그너 가문은 왕족이 되었다고 표현한건 이 때문이다.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좋든 싫든 누군가 한명은 왕위를 이어받아 뛰어난 통치자가 되어야한다. 왕을 될만한 재목이 없어도 누군가는 해야한다. 그렇게 키워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바그너 가문 역시 좋든 싫든 누군가 한명은 뛰어난 연출가가 돼야만 하는 운명이다. 그저 적당히 입헌군주제의 '왕 코스프레'만 하며 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왕으로서 자질을 보여줘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혈통으로 내려온 낙하산일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오페라 연출은 그나마 바그너 가문이 승부를 볼 수 있는 분야라고 본다. 바그너 작품을 지휘 한다는 건 바그너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연출의 경우, 바그너 작품을 정말 잘 알고 있다면 프로덕션 팀과 함께 자신의 아이디어를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다. 내가 연출가의 역할을 너무 나이브하게 바라본 것일 수도 있지만, 바그너 오페라 연출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건 작품 전반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다. 연출가가 엄청난 미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으면 띄어난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바그너 작품에 노출되어서 모든 바이로이트 공연 기록에 접근할 수 있고, 바그너라는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이면 애초에 다른 연출가보다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왕자가 제왕 수업을 받으면서 왕이 되는 것처럼, 바그너 가문의 연출가 수업 역시 충분히 가능할 테다.


그렇기에 카타리나 바그너의 성패 여부는, 단순히 바이로이트의 새 프로덕션의 퀄리티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바그너 가문이 바이로이트를 이끌어 나갈 능력이 있는지 증명하는 자리라 할 수 있다. 감독이 몇년에 한번이라도 바이로이트에서 직접 연출을 선보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카타리나는 바그너 가문의 아우라를 지켜내야만 한다. 

다행히 명가수에 이어 트리스탄에도 카타리나는 자신의 자질을 입증해 보였다.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좀 남는다. '미장센'으로서 보았을 때 저런 공간 활용이 최선은 아닐 테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아이디어는 이만 하면 훌륭하다. 100년도 넘는 트리스탄 공연사에 묘약을 뺀게 최초의 시도는 아닐 것 같지만, 바이로이트에 올라왔다는 건 앞으로 바그너 연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카타리나의 명가수가 '이런 해석도 가능하겠구나'였다면, 트리스탄은 '이렇게 하는 게 더 좋다'라고 평가하고 싶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사랑의 묘약은 빼버려야 한다. 앞으로 묘약을 안 마시는 연출이 더 늘어날 거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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