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오페라의 빼놓을 수 없는 역작.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난 보체크를 여태 한번도 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조교를 할 때 보체크를 주제로 발표를 하는 조가 있었음에도 여태 보체크를 볼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현대음악을 들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기피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나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블루레이 보기도 바쁜 요즘에 굳이 DVD로 보체크를 찾아볼 생각을 안했다는 거다. 그래서 이번에 보체크 블루레이가 발매됐을 때 일말의 고민도 안하고 바로 구입했다.


간혹 오페라를 보고 나서 무슨 글을 해야할 지 막막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작품이 안 유명해서 내가 무슨 말을 써제껴도 상관없을 피츠너의 팔레스트리나나 침머만의 병사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오페라면서 무조 작품 중에 극장 표준 레퍼토리의 반열에 올라간 몇 안되는 작품이지 않은가. 


보체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귀에 편안하다. 오래 전 오알못 시절에 들은 기억은 꽤나 과장되어서 머리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난 살로메를 다시 들었을 때 그렇게 달콤한 선율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베르크의 룰루 역시 국립오페라단 공연 때 보러갔다가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보체크를 들으니까 충분히 대중적인 작품이다. 그로테스크한 극의 내용에 음악은 대체로 상당히 절제되어있다. 극의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다채롭게 만들어내는 것과 종종 나오는 블랙 코미디가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를 떠올리게 했다. 극과 결합하는 섬세함으로 따지자면 베르크가 더 뛰어나보인다. 특히 반주의 관현악법이 매우 효율적이며 입체감이 뚜렷하다. 가수의 노래를 채워주면서도 절대 가수를 괴롭히지 않기에 실제로 극장 안에서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밸런스를 맞추는데 아주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감상하면서 까다로웠던 것은 바로 보체크에 적용된 아주 까다로운 음악 형식이다. 보체크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각각의 장면을 기악 음악의 형식을 차용해서 만들었다. 파사칼리아가 나온다든가, 소나타가 나온다든가 론도가 나온다든가. 나름 형식 덕후인 나로서는 들으면서 저걸 쫓아가기 위해 애썼는데,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과연 이게 진짜 그 형식이 맞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

부클릿에 들어있는 루이지와의 인터뷰에도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지휘자로서 이런 형식 구조를 인식하면서 지휘하는가였는데, 루이지 본인은 그걸 의식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이 극의 내용에 아주 잘 맞물려있기 때문에 형식을 신경쓰지 않고 극적인 면모만으로 해석하여도 충분히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반대로 나는 형식을 쫓느라 극의 내용을 너무 놓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드레아스 호모키Andreas Homoki 연출은 상당히 독특하다. 모든 배경을 삭제하고 액자 속의 액자 안에서 일어나는 인형극으로 표현했다. 무대 디자인과 의상 디자인을 마이클 레빈Michael Levine 한 사람이 맡아서 했기에 무대와 인물이 같은 톤으로 어우러진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로테스크한 극의 분위기는 매우 잘 살려내지만, 연극적인 파괴력이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색깔 톤의 변화가 없다는 게 통일성을 주지만 드라마틱한 대비를 줄여버린다는 점에선 단점으로 작용한다.


루이지가 보체크를 지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루이지 처럼 칼을 갈고 쥐어짜내는 스타일이 과연 얼마나 먹힐까 싶은데, 보체크를 처음 듣는 내가 평가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다만 3막 마지막에 나오는 간주곡의 꽉찬 음향은 상당히 인상깊었다.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모습과 목소리가 익숙하지만 이름은 낯선 볼프강 아블링어-슈페르하케Wolfgang Ablinger-Sperrhacke가 장군 역으로 나온다. 찾아보니 내가 본 것 중에 네덜란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모노스타토스, 글라인드본 헨젤과 그레텔 마녀, 잘츠부르크 침머만 병사들에서 피르첼, 스칼라 반지 라인골트 미메, 틸레만 장미 발자키 역으로 나왔다. 사악한 목소리가 걸출한 가수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영상물에서 봐놓고 이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아는 이름은 타이틀 롤을 맡은 크리스티안 게어하허Christian Gerhaher 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한 정신병적인 보체크와 상당히 달라보였는데, 오히려 극중에서 가장 평범한 인물처럼 보인다. 다시 생각해보니 보체크가 제일 평범한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표지에는 꽤나 무섭게 묘사되지만 극중에선 그런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과장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해낸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예측해본다. 극중에서 보체크가 성경을 인용하는 장면을 수난곡 전문가가 부르니까 뭔가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드는 건 덤이다.  


부클릿이 아주 두꺼워서 놀랬는데, 종이 자체를 좀 두꺼운걸 썼다. 독, 영, 불어로 연출가, 지휘자, 그리고 작곡가 베르크의 1930년 라디오 인터뷰를 수록해두었는데 꽤 알찬 편이다. 

결론: 베르크 오페라를 더 열심히 들어야겠다는 반성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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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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