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럽지만 약간은 어설픈 장미의 기사


글라인드본은 사랑스러운 곳이다. 더럽게 비싼 티켓, 턱시도 사이에 이방인으로서 서있는 느낌은 썩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곳이다. 젊고 능력있는 가수들을 볼 수 있으며 오랜 준비 기간 덕에 상당히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준다. 유럽의 다른 유명 극장에서 간혹 느끼는 불안정한 부분을 글라인드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아리아드네의 경우 연출이나 음악이 매우 좋았기에 장미의 기사에서도 특별한 공연을 기대했다. 


공연은 여러모로 '글라인드본스럽다'. 첫째, 가수들이 매우 젊다. 가수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지만, 장미의 기사에서 인물의 나이는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옥타비안과 조피가 이렇게 어리고, 원수부인 이 정도로 젊은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가수들이 젊다는 것은 역할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도 의미한다. 원수부인, 옥타비안, 조피 역 모두 이번이 롤 데뷔이다. 둘째, 연출이 매우 영국적이다. 화려하고 아기자기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처럼 진부하진 않다.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무대 배경과 의상, 가수들에게 많은 동작을 요구하는 연기, 뭔가 나사 빠진 것 같은 특유의 유머 감각까지 영국적이다. 연출가가 다르지만 최근 글라인드본에서 상연한 세비야의 이발사나, 그 전의 돈 파스콸레와 무대 구성이나 색감이 매우 유사하다. 셋째,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은 확실히 준비된 모습을 보여준다.


티치아티의 지휘는 매력적이다.  오페라 지휘자에게 필요한 극적인 늬앙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벨저-뫼스트 처럼 단단하게 휘몰아치거나 틸레만처럼 극도로 가공된 부드러운 음색은 없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런던필은 표정 변화가 많은 음악을 뽑아낸다. 극의 흐름에 따른 늬앙스의 변화야 말로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인데 티치아티는 바로 이 부분에 장점이 있다. 풍만한 음향이나 악단의 비루투오시티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어떤 표정으로 음악을 연주할 지 고민하는 듯하다. 이를 통해 장미의 기사에 조용히 깔려있는 인물의 섬세한 감정선을 잘 끌어낸다. 아직 젊은 지휘자인데다 극장 경험도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재능이다. 티치아티가 어린 나이에 글라인드본 감독이 된 걸 보고 전형적인 영국의 자국 밀어주기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렇지 않다. 위키피디아에서 티치아티의 경력을 찾아보니 정말로 간지폭풍이다. 2008년 스코티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첫 객원 지휘 이후 그해 바로 다음 음악감독으로 결정, 계속해서 계약을 연장하고 있고 2007년에 글라인드본 투어 감독을 맡았다가 2014년에 글라인드본 음악 감독, 2014년에 DSO베를린 첫 객원지휘 이후 1년 뒤에 차기 음악감독으로 결정. 


케이트 로열Kate Royal은 독특한 원수부인을 연기한다. 일단 연출부터 육체적인 매력을 과시하는 젊은 부인으로 그려낸다. 목소리가 다른 원수부인(이라고 해봤자 내 기억엔 플레밍과 스토야노바 정도 뿐이지만)에 비하면 메마르다. 스토야노바의 부드럽고 달콤한 프레이징을 생각하면 3막에서 더욱 아쉬워진다. 어쩌면 로열의 딕션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비독일인 치고 자음 발음을 상당히 명확하고 힘을 주어서 하는 편이다. 그래서 딕션이 꽤나 명확하게 들리지만, 그렇다고 정확하진 않다. 모음의 발음이 꽤 어색하고 딱딱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 점도 그런 인상에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기력은 아주 놀라울 정도인데, 표정 하나하나가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원수부인의 슬픔을 담고 있다.

옥타비안 역할의 타라 에로트Tara Erraught는 외모 논란을 먼저 접한 가수였다. 아니 뭐 오페라에서 새삼 가수 외모 따지나 하고 봤는데 오히려 옥타비안에 제일 잘 어울리는데? 약간 심은경을 연상시키는 외모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고 까이는 지 알 수가 없다. 여기에 노래가 참 깔끔하다. 비브라토가 과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내주는게 아주 마음에 드는 옥타비안이었다. 독일어 딕션은 안좋은 편이다.

조피를 부른 테오도라 게오르규Teodora Gheorghiu는 아직 조피를 부르기엔 불안정해보인다. 가볍다 못해 살짝 앙상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나 불명확한 딕션은 듣고있기에 답답했다. 안젤라 게오르규 처럼 루마니아 출신이지만 안젤라와 친척 관계는 아닌 듯 하다. 

옥스역의 라르스 볼트Lart Woldt는 주역 중에 유일한 독일인인데, 전형적인 옥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좋게 말하면 모범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마냥  진부하게 느껴지는 해석이다. 


리처드 존스의 연출은 몇몇 괜찮은 장면이 있지만 탁월한 느낌은 부족하다. 원수 부인의 육체적인 매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꽤나 충격적인 노출을 보이는데, 전라 노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에 달라붙는 얇은 스판을 입고 있는 듯 하다. 1막에서 옥타비안과의 관계를 이렇게 에로틱하게 묘사한 연출은 흔치 않을 것 같다. 둘의 관계에서 정신적인 사랑보다 육체적인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원수 부인이 옥타비안을 쿨하게 놓아주는 것을 설명하려는 듯하다. 1막에서 원수부인이 화장을 하고 '나를 나이든 사람으로 만들었구나'라고 말을 하는 대목 역시 그 대사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확연하게 나이든 여성으로 분장시킨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진짜 나이들어 보이게 화장해서가 아니라 '기분 탓'인 게 좀더 문학적일 것 같긴 하다.

2,3막은 전체적으로 가볍고 아기자기 하다. 글라인드본의 넓지 않은 무대를 아담하게 효율적으로 잘 활용했다. 여기에 가벽을 내려 무대에서 더 좁은 공간을 만들어 낸 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다. 가장 인상깊은 연출은 3막에서 옥스가 퇴장하는 장면에서 왈츠가 나오는 부분인데, 일반적인 '헤헤 개판이네'를 연상시키는 연출과 달리 합창단이 일렬로 서있고 여관 주인이 옥스를 천천히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옥스가 뒷걸음질 칠 때 그 옆에 서있는 인물들이 요금을 청구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굉장히 정적이지만 오히려 극적인 긴장감이 확실해진다. 적게 움직임으로써 많은 걸 표현하는 좋은 예시다.

묵역으로 나오는 하인 모하메드나 옥스의 혼외자 레오폴드의 연기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둘다 씬스틸러의 면모를 보여준다. 


연출보다는 오히려 카메라 촬영이 훌륭하다. 비교 대상인 잘츠부르크 장미의 촬영 감독이 브라이언 라지인 걸 생각하면 완벽한 대비라할 수 있다. 무대 전체 풀샷을 상당히 자주 활용하고 아주 중요한 순간에 클로즈업을 활용한다. 3막에서 원수부인이 옥스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음악에 맞춰 딱 케이트 로열을 특별한 각도에서 클로즈업하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멋진 장면이었다. 기억하기 위해 언급하자면 촬영 감독은 프랑수아 루시용François Roussilon이다.


부클릿에 아주 좋은 글이 실려있다. 마이클 레이놀드Michael Reynolds가 쓴 글인데 최근에 박사학위를 받은 내용을 요약해둔 것이다. 장미의 기사에 영감을 준 여러가지 작품이 있지만 (피가로의 결혼이라든지) 가장 중요한 소스는 바로 1907년 파리에서 초연된 오페레타 L'ingénu libertin(자유로운 방탕아) 이라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장미의 기사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주인공 푸블라스Faubulas는 메조 소프라노가 부르는 바지역할인데 중간에 여장을 했다가 다른 호색한 후작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푸블라스는 그 후작의 부인을 유혹하여 동침한다. 하지만 푸블라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어렸을 때의 연인인 소피Sophie로 후작 부인과 소피 사이에서 고민하며 결국 소피를 선택한다. 이 때 여성 3중창이 등장한다. 후작 부인은 푸블라스와 소피를 축복해준다. 여기에 소피의 약혼 남이지만 후작 부인을 꼬드기려고 했던 로잠베르 백작Count Rosambert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끝난다.

호프만스탈이 이 작품을 접한 것은 하리 케슬러 백작Harry Kessler과 작업을 하면서였다. 케슬러는 이 작품을 파리에서 보았고 호프만스탈에게 이 작품의 줄거리를 모두 알려줬다. 호프만스탈은 새 오페라를 구상하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이었고 곧바로 이 작품을 베이스로 채택한다. 


끝으로 마음에 안드는 부분하나. 수입사 아울로스 미디어의 소개글

본 영상물은 2014년 6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작곡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공개되었던 리처드 존스의 최신 프로덕션을 담은 것으로, 원수 부인을 노래한 정상급 소프라노 케이트 로열의 과감한 노출연기와 패기의 젊은 지휘자 로빈 티치아티의 섬세하고도 명쾌한 해석으로 오페라 애호가들 사이에 큰 화제를 모았었다. 타라 이러프트가 연기한 옥타비안은 유니섹스한 외모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성악적인 면에서만큼은 나무랄 곳 없는 활약을 보여주며, 청순한 미모의 소프라노 테오도라 게오르규는 요조숙녀다운 조피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째서 가수들한테 '과감한 노출연기', '유니섹스한 외모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청순한 미모의' 같은 말만 써붙이는지 너무했다. 그것도 여자 가수들에게만 말이다. 브리튼 글로리아나에서도 수잔 불록의 '통통한 외모' 같은 언급이나 하고 말이야. 최소한의 선은 지켜줬으면 좋겠다.



성악가들의 노래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라인드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전통적인 추천반으로 꼽기에는 살짝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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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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