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치 vs 멜리


투토 베르디 박스의 공연이다. 오랜만에 투토 베르디를 열어보았다. 타이틀 롤에 레오 누치, 아도르노 역에는 프란체스코 멜리가 나온다. 


공연 퀄리티가 어떨까 기대하고 보던 중에 눈에 익은 가림막 그림이 보인다. 당시 제노바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분명 저번 볼로냐 공연 영상에서 본 것 같다. 돈 카를로에 나오는 펠리페 동상 처럼 이것도 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미술인가보다 했다. 그러다가 설마?하는 순간 막이 올라가면서 볼로냐와 같은 무대가 펼쳐진다. 그렇다. 두 공연은 같은 프로덕션이다. 볼로냐 공연을 보면서 2막 시몬의 의상의 어째 투토 베르디 영상물 커버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뭐 이탈리아 연출이 다 그렇지 하고 넘어갔다. 그게 같은 연출이었을 줄이야...


연출이 같으니 출연진의 역량이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다. 분명히 저번에 봤을 땐 뭔가 지루하게 보았던 것 같은데 누치와 멜리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니 달라도 너무 다르다. 둘다 힘있는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으로 프레이징을 끌어가는 능력이 있는 가수다. 여기에 멜리는 누치와 비교해도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노래를 들려준다. 저런 목소리에 저런 발음이 가능하단 말인가. 레오 누치도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힘에 있어선 어디 가서 절대 밀릴 사람이 아닌데, 멜리가 노래를 부르면 누치마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인다. 사실 아도르노가 대체로 드라마티코-스핀토를 요구하는데, 멜리는 음색 자체는 부드럽지만 목소리가 곧게 뻗어나가는 힘을 이용해 이 역할들을 커버하는 느낌이다. 만리코로 하이 C만 안부르면 이태리 오페라에서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아 물론 누치도 훌륭하다. 대체로 연기가 조금은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 큰 감정 변화를 무대 위에서 표현해낼 수 있는 가수는 많지 않다. 여기에 나이가 들긴 했지만 여전히 보통 바리톤은 범접할 수 없는 소리를 낸다. 레치타티보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베테랑 답다.

아멜리아 역의 타마르 이베리Tamar Iveri는 이들에 어울리는 알찬 소리를 들려준다. 베테랑 처럼 프레이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진 않지만, 과한 비브라토로 목소리를 치장하지 않고 깨끗한 소리를 낸다는 점이 매우 좋았다.

피에스코 역의 로베르트 스칸디우치Robert Scandiuzzi는 좀 독특한 소리를 들려준다. (아마 틀린 표현이겠지만) 약간 입 안에서 울리는 듯한 둥근 소리를 들려준다. 파올로 역의 시모네 피아촐라Simone Piazzola는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조금 허한 소리를 들려준다. 가사를 극적으로 소리내는 것은 충분히 훌륭하다. 사실 파올로가 오페라에서 하는 역할이라곤 극적인 대사를 잘 처리하는 것 뿐이지만 마르코 브라토냐의 꽉 찬 목소리가 그리웠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이 가수가 수요일 롯데 홀에서 시몬을 부른다. 조금 걱정이.. 

지휘 다니엘레 칼레가리는 미켈레 마리오티보단 좀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흐름을 이끌어낸다. 오케스트라 녹음도 더 블렌딩이 잘된 상태다. 


사실 이 전까지는 시몬 보카네그라의 리브레토가 구리다고 생각했는데 내 식견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역사 정치적인 면모가 조금 낯설고 복잡한 편이긴 하지만, 시몬과 피에스코의 관계는 베르디가 집착한 아버지 설정의 끝판왕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엔 피에스코의 비중을 너무 과소평가했는데 다시 보니 시몬과 피에스코의 2중창이 극 시작과 끝에 배치됨으로써 이 관계의 중요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있다. 특히 아멜리아의 본명이 어머니와 같은 마리아라는 점, 그래서 시몬과 피에스코 모두 마리아의 아버지가 되고 시몬이 죽어가면서 피에스코를 padre di Maria 라고 부르는 것은 신파적인 장치이지만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디가 이 작품을 쓰면서 바로 저 대사 하나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결국 자기도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야만 해결된다. 작품 안에서 아버지의 비극은 일종의 재귀적 형태로 등장하는데, 이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것이 바로 시몬이 죽어가며 아도르노를 축복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부분이 단순히 아버지의 비극 뿐만 아니라 제네바의 계급 갈등 역시 종식 시키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작품에 흐르는 정치와 개인사라는 두 면모가 본질적으로 같은 성질의 문제로 엮으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피에스코가 아도르노를 도제로 선언할 때 광장에서 들려오는 'No - Boccanegra!'와 이어지는 화음은 이 갈등이 시몬의 의지와 달리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잡썰이지만 이태리 오페라 3대장인 Vendetta, Maledetto,(maledizione) Sangue가 모두 나온다. 저 3개가 다 나오지 않는 오페라를 찾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든 생각인데 저것만큼 자주 나오는 단어가 Orrore가 아닐까. 무엇보다 단어가 나오는 상황이 극적일 수 밖에 없고 rr이 주는 강렬한 느낌이 특별하다. 맥베스에서 막두프가 orrore! orrore!라고 외치는 부분이 너무 인상깊기도 하고. 


이 작품에서 오프 스테이지 합창을 상당히 많이 사용한 것을 중요하게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거기다 그 대중의 합창이 약간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는데, 1막 끝에서 놀라운 태세전환이라든가 앞서 언급한 3막 마지막 장면이라든가. 베르디 오페라 전체에서 오프 스테이지 합창의 변화를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아울러 수요일 공연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지 궁금하다. 아마 합창단이 노래하는 방향을 틀어서 조절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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