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예습 용으로 찾아본 파우스트의 겁벌.


1999년으로 꽤 오래된 영상인데, 바셀리나 카사로바, 윌라드 화이트 같은 반가운 이름이 등장한다. 지휘는 실뱅 캄브를랭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가 반주를 맡았다. 연출은 무려 라 푸라 델스 바우스이고, 합창단은 아바도 공연 영상으로 익숙한 오르페온 도노스티아라다. 잡썰이지만 옛날에는 이 합창단이 어디 스페인이라는 것 정도까지만 알았는데 바스크 지역 합창단이다. 빌바오 오페라를 볼 때 합창단의 실력에 감탄했는데 확실히 바스크 지방에서는 합창 음악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있는 듯 하다.


작품 자체가 오페라 형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연출 역시 정적인 편이다. 아무래도 다른 오페라를 볼 때에 비해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컨텍스트 없이 주어지는 파우스트의 노래,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상징적인 장면과 노래들이 이어지는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오페라와는 거리가 멀다. 무대로 종종 올라가는 헨델 오라토리오 시오도라 정도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어느 오페라 못지 않게 극적인 장면들도 여럿 존재한다. 파우스트와 마르게리트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다가 메피스토펠레가 들어오는 장면은 아주 훌륭한 3중창을 만들어낸다. 가장 압권은 마르게리트를 구하기 위해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가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결국 실패하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파우스트의 겁벌이라는 제목은 이 장면 하나를 보고 달려온 것일 테다. 이곳에서 베를리오즈가 보여주는 표제적 색채는 전례를 찾기 힘들만큼 강렬하며 효과적이다.


라 푸라는 이 오페라에 색감을 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데,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면은 많지 않다. 가뜩이나 무대극의 성격이 옅은 이 작품을 펠젠라이트슐레의 황량한 무대에 올린 것은 크나큰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라 푸라는 자신의 무대 장치로 이 거대한 무대를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듯하지만 실제로 효과는 미미하다. 내가 연출의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미리 인정해야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큰 무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는가 하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무대 배경이 공허하다는 것이 연출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라 푸라는 거대한 프로젝션을 꾸준히 활용하는데, 1999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술적으로 상당히 놀라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 퀄리트는 썩 훌륭하지 못하며 특히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말이 여러마리 겹쳐지는 CG는 조악하기 짝이 없다. 좀 심했어..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가 지옥으로 진짜 '추락'하는 것은 아주 멋진 연출이었다. 기억에 남는 연출이란 그것 뿐.


음악적으로도 아쉬운 면이 남는다. 가장 먼저 타이틀 롤을 맡은 폴 그로브스Paul Groves가 구리다. 고음에서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이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온몸으로 보여준다. 파우스트 특유의 고민하며 번뇌하는 모습 역시 노래에서 잘 표현되지 않는다. 순진무구한 파르지팔 같다고할까... 캄브를랭의 반주 역시 초점과 방향성을 잃을 때가 있다. 앙상블의 밀집도도 구별될 정도로 안 좋은 편이라 오케 이름을 다시 확인했을 정도다. 


하지만 나머지 두 주역 윌라드 화이트Willard White와 바셀리나 카사로바Vasselina Kasarova가 탁월하다. 화이트의 경우 화이트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관객을 사로잡는 가창을 한다. 보는 이를 두렵게 하는 악마의 전형을 보여준다. 카사로바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표현의 기량면에서는 이번 내한 공연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카사로바 특유의 매혹적인 목소리를 젊은 날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는건 특별한 즐거움이다.


원래 이걸 쓰고 강요셉 사무엘 윤, 카사로바의 조합으로 있었던 동 작품의 공연 후기도 쓰려고 했는데 친구가 쓴 좋은 후기가 있어서 링크로 대신한다. 공연 본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핑계로.. 폴 그로브스에 비하면 강요셉은 철인적인 스태미너로 파우스트의 서정적인 매력을 잘 살려냈다. 사무엘 윤의 메피스토펠레는 화이트와 확연히 비교되었는데, 자신이 설정한 캐릭터를 놀랍도록 능수능란하게 표현했기에 아주 즐거운 해석이었다. 카사로바는 두 개의 아리아 만으로 관객들을 휘어 잡았다. 적절히 밀고 당기는 그 프레이징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우리나라에서 다시 보기 힘든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롯데홀 개관공연 대신 선택한 게 후회되지 않은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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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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