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라스가 새로 창작해낸 퍼셀 오페라


쿠렌치스가 퍼셀의 인디언 여왕을 공연한다고 했을 때 그게 어떤 작품일지 딱히 찾아보지 않았다. 쿠렌치스의 디스코그래피 중 디도와 에네아스도 있으니 다른 퍼셀의 오페라를 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 작품은 온전히 퍼셀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다.


원래 인디언 여왕에서 퍼셀이 작곡한 음악은 45분 가량으로 하나의 오페라로 인정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다. 물론 요정 여왕 처럼 연극과 함께한 작품이었겠지만, 당시 극장 안의 내분으로 인해 요정 여왕 처럼 제작비가 큰 작품을 올리지 못하고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을 상연하기로 했는데 이 중 하나가 인디언 여왕이었다. 인디언 여왕은 1664년에 초연된 연극으로 퍼셀이 이 오페라를 준비할 때는 이미 30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극단 United Company에서 인디언 여왕을 선택한 이유는 인디언 여왕의 공동 집필자 중 한명인 로버트 하워드가 극단 파업을 담당하는 고위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높으신 분한테 잘 보이려고 그 분의 작품을 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하워드는 결국 극단 분리파를 지지해서 새로운 극단 설립을 승인해줬고, 엿먹은 극단은 인디언 여왕의 대사를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걸로 복수한다. 재연할 때는 퍼셀이 죽었기 때문에 헨리 퍼셀의 형제인 대니얼 퍼셀이 마지막 5막의 마스크를 추가해넣었다고 한다.


셀라스는 이 오페라를 가지고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과연 이 작품을 '인디언 여왕'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일단 내용부터 완전히 다르다. 검색해본 결과 원작 인디언 여왕은 멕시코와 잉카 제국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셀라스는 이 내용을 아예 버리고 니카라과 작가 로사리오 아귈라르의 '테라 피르마의 잃어버린 연대기'(1992)를 토대로 새로운 리브레토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인디언 여왕의 음악만으론 부족하니 퍼셀의 다른 무대 작품이나 종교 곡 까지 가져와 새롭게 작업해냈다. 


여러 음악을 모아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어 내는 예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메트에서 시도한 바로크 오페라 '마법의 섬'Enchanted Island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는 카사노바 길들이기라든가. 셀라스의 시도가 다른 점이 있다면 퍼셀의 음악만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작품의 기초가 된 인디언 여왕의 음악이 (아마도) 다 들어있다는 점이다.


셀라스가 새롭게 차용한 이야기는 콩키스타도르를 소재로 삼았다.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를 침략해왔을 때, 인디언 추장이 자신의 딸을 볼모로 스페인 장군에게 보낸다. 첩자가 되라고 보낸 것이지만 이 여자는 스페인 장군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 결국 남자에게 버림받게 되고, 자신의 딸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며 죽는다. 딸은 뒤늦게서야 어머니의 삶을 이해한다.


약간 뻔한 이야기다. 연극 작품으로선 참신함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오페라 대본으로서는 강렬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괜찮은 이야기다. 무엇보다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한 순간을 고발하겠다는 셀라스의 의도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셀라스는 존 애덤스의 닥터 아토믹에서 극작가로도 활약한 바 있지만, 극작가로서 그의 능력이 연출 만큼 뛰어난지는 살짝 회의적이다. 괜찮은 대본 선택이긴 하지만 너무 직설적이고 뻔하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음악 선택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셀라스는 퍼셀의 작품 이것저것을 가져오면서 대중성은 집어 던지고 무겁고 느린 노래로 진한 감정선을 만들어낸다. 물론 중간에 흥겨운 노래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극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게 배제한다. 특히 무반주 합창을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바로크 오페라보단 오라토리오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셀라스는 시오도라나 마태, 요한 수난곡에서 보여주었 듯이 오라토리오를 연출해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갖추고 있다.


셀라스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기대했던 것은 쿠렌치스였다. 쿠렌치스의 오페라 영상이 꽤 있는 편이지만 무지카 에테르나와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영상에서 놓쳐서 안될 것은 그간 음반에서도 실력 발휘할 기회가 적었던 무지카 에테르나 합창단이 전면에서 활약한다는 점이다.


쿠렌치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작품의 특성 상 폭발적인 부분, 혹은 리드미컬 하다가 부를만한 음악도 얼마 나오지 않지만 그 때마다 자신의 장기를 확실히 발휘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쿠렌치스가 퍼셀의 극히 절제되고 다소곳한 음악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느냐다. 쿠렌치스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느다란 실을 뽑아내 듯 긴장감을 만들었다. 가수들이나 오케스트라의 비브라토는 아주 효과적으로 절제되었고 각각의 단어는 감정을 담아 소리났다.

가수들은 노래나 연기나 상당히 수준 높은 노래를 들려준다. 익숙한 가수는 줄리오 체사레 톨로메오를 기가 막히게 불렀던 크리스토프 뒤모 한명 뿐이다. 뒤모는 여기서도 특유의 따뜻하고 매력적인 음색을 보여준다. 스페인 총독의 아내인 돈나 이사벨 역을 맡은 나디네 쿠체르Nadine Koutcher(벨라루스 출신으로 러시아어 이름은 나드제야 쿠차르Надзея Кучар)는 2015 카디프 콩쿨 우승자인데 원래 드라마틱 콜로라투라라지만 그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침착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기가 막히게 뽑아준다. 타이틀 롤인 줄리아 벌로크Julia Bullock 역시 전문 배우 같은 연기는 물론 호소력 있는 노래를 갖췄다. 둘이 부르는 듀엣 Oh Lord, rebuke me not(Z40 시편 6:1-7)은 특히나 아름답다.

하지만 단 하나의 주인공을 꼽자면 역시 합창단이다. 다른 바로크 오페라와 달리 오라토리오 뺨치게 등장 횟수가 많은데다 합창곡 대부분이 무반주라서 합창단에게 부담이 많은 작품이다. 여기에 셀라스의 연출을 따르는 건 더더욱이나 어렵다. 무지카 에테르나 합창단은 정말 훌륭하게 해낸다. 무지카 에테르나 오케스트라와 똑닮은 음색을 갖췄는데 역시 쿠렌치스의 수족과 같은 단체다. 비교적 단조로운 곡 안에서도 대단한 극적 표현을 보여준다. 여기에 셀라스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여 합창단 한명한명의 표정이 살아있다. 1부 2막의 끝 Hear my prayer, O Lord(Z15, 역시나 시편으로 102:1)은 특히나 감동적이다. 


연출 역시 셀라스 답게 훌륭하다. 나레이터를 맡은 연극 배우 마리텔 카레로Maritxell Carrero(뭐라 읽어야할지 모르겠지만 괜히 마리텔이라고 쓰고 싶다)는 극에 있는 모든 대사를 혼자 소화해내는데, 내가 대사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톤에서 모든 감정이 공감가도록 만든다. 무대 미술이 황홀할 만큼 아름답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셀라스는 영상 감독 까지 자처했다. 때문에 일반적인 오페라 영상에서는 보기 힘든 격렬한 카메라워크를 보여준다. 클로즈업도 굉장히 많고, 듀엣에서 샷 변화는 한 박자에 간격으로 바뀔 때도 있다. 여기에 공연장과는 아예 다른 것을 기록하려는지 박수소리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 같고 나레이션 중 많은 부분이 스튜디오 레코딩된 것으로 다시 나온다. 대사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레코딩된 대사로 바뀌어서 당혹스러운 부분도 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여튼 셀라스의 집착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하자.


쿠렌치스와 셀라스의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더 이어질까 기대하게 만든다. 연주 곳곳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위해 음악 프레이즈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연출과 지휘자가 서로를 잘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미 테아트로 레알에서 욜란타/페르세포네 영상도 출시한 적 있는 두 사람은 여러모로 찰떡 궁합 같다. 쿠렌치스야 뭐 솅크나 제피렐리하고 작업하라면 오히려 fuck you 날릴 것 같은 인간이니...


테아트로 레알에서 찍혔지만 페름 극장과 ENO와 공동제작했다. ENO가 퍼셀에 대한 전통과 음악학적인 기반을 제공했다면 페름에서는 지휘자와 반주, 합창 (그리고 아마 캐스팅까지)을 도맡았다. 테아트로 레알에서 촬영한 건 아마도 테아트로 레알이 갖추고 있는 영상 촬영 장비의 인프라 때문일 것이다. 프로덕션 초연도 페름에서 하고 실제 제작진에서 페름의 비중이 가장 크지만, 그래도 공동 제작의 장점을 꽤 잘 활용한 예시라고 하고 싶다.

 

플레이 타임이 130분이라고 되어있지만 실제론 190분이다. 소니 답지 않게 부클릿 내용이 알찬데, 피터 셀라스 인터뷰와 퍼셀 학자 앤드류 피녹의 소개가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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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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