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프만, 베스트브룩, 파파노, 맥비커 모두 활약하는 가운데 역시나 루치치만 아쉽다.


카우프만이 셰니에를 한다고 할 때부터 고대해왔던 영상이다. 최근에 본 파파노 파르지팔이 망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이다.


안드레아 셰니에 안에는 낭만의 폭풍이 담겨있다. 이 작품 역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소재와 작품의 탄생 배경 때문에 베리스모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내용은 낭만의 절정이다. 혁명 속에 피어나는 사랑, 사랑에 감동하여 마음을 바꾸는 바리톤, 경이로운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 테너와 소프라노. 말도 안되게 낭만적인 작품이다.


카우프만과 베스트브룩 둘 다 기대했지만 카우프만은 약간 아쉽다.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보여주었던 감정의 폭발을 셰니에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나 같은 카우프만 빠는 카우프만이 무대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긴 하지만 기대했던 격정은 빠져있었다. 카브/팔리 데뷔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과 달리 셰니에에선 아직 완벽하게 배역을 소화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노래가 평범하게 흘러가는 부분이 있고, 오페라를 부르는 게 아니라 아리아만 따로 떼서 부르는 것 같은 인상도 준다. 각 막의 아리아에서 어디 한 군데 인상적으로 터지지 못하고 90%의 수준에서 머무른달까.  물론 종종 내가 기대하는 무언가를 들려주지만 카우프만에 기대하는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다. 카우프만이 셰니에에 어울리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아 근데 진짜 비주얼은 깡패다. 이건 사기야...


반면 베스트브룩은 좀 더 나은 모습을 들려준다. 서정적이면서도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힘이 있다. 유독 오케스트라 소리만 가까이에서 잡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이런 폭발적인 성량은 영상임에도 큰 장점이 된다.  


루치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장면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캐스팅 구멍을 담당한다. 루치치는 웅변가로서의 힘이 없는데, 제라르 같은 역할에서 이건 치명적이다. 시민들에게 Udite!를 말하는데 목소리에 힘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다. 3막 nemico della patria는 괜찮지만 최고의 캐스팅과는 거리가 있다. 1막에서 하인 때려치게 하겠다는 장면에서도 위협적이지 못하고 3막에서 셰니에를 변호하는 것도 오케스트라를 뚫지 못한다.


파파노는 기대했던 대로 파르지팔 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 각 막의 피날레에서 필요한 폭발력 하나 만큼은 역시 발군이다. 여기에 모든 선율을 달콤하고 매혹적으로 연주하는 것도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미덕이 된다. 제라르와 쿠아니가 설전하는 3막 장면에서의 반주에서도 아티큘레이션을 완벽하게 조아내는 걸 보면 확실히 오케스트라 장악력이 뛰어난 지휘자다. 1막 처음 부분 처럼 오케스트레이션의 색깔이 반짝이는 부분을 잘 살려내는 것도 파파노의 장기 중 하나다.


맥비커는 모범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맥비커는 보수적인 비주얼 안에서 진보적인 어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아주 사실적인 디자인을 기반으로 연극적인 재미를 잘 만들어낸다. 디자인이 현실적임에도 이탈리아 무대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는데, 입체적인 무대 배치와 자연스러운 조명 처리가 큰 역할을 하는 듯 하다.

무엇보다 연극적인 디테일에서 맥비커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셰니에가 인사를 하려다 무시당하는 장면, 셰니에와 쿠아니가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 그 짧은 순간에도 관객을 극으로 흡입한다. 합창단은 시종일관 움직이고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살아있다. 2막과 3막이 살아 움직이는 것 역시 무대 위에 실제 현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3막 재판 장면에서 재판을 지켜보는 관객들이 간식을 꺼내 먹는 모습은 셰니에의 자기 변호와 함께 병치되어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쿠아니가 대신 죽기로 하고 살려주는 르그레이에게 딸이 있다는 설정을 더해 4막에서 신파를 더 하는 것도 조금 유치하지만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맥비커는 전통주의자나 혁신주의자나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시대와 공간의 배경이 강력하게 고정되어 있는 셰니에이기 때문에 이런 연출의 가치가 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엑스트라도 훌륭하다. 베르시를 맡은 미국 출신 메조 데니스 그레이브스Denyce Graves가 상당히 인상깊다. 그리고 3막에서 노파가 자신의 손자를 입대시키는 장면은 훈련소가 며칠 안 남은 내게 눈물을 안겨주었다. 


부클릿엔 조르다노의 전체적인 작품 활동이 꽤나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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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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