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게티의 꿀잼 오페라, 라 푸라의 욕심.


난 현대 음악에 대해 어두운 편이다. 뭐 현음을 일부러 피하는 건 절대 아니고, 아르스 노바도 종종 찾아가고 현대음악 콘서트도 재밌어보이면 열심히 찾아가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흔히 '현음성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비하면 거의 까막눈이다시피 한다. 공연장만 쫓아다녀도 좋은 레퍼토리를 다 접할 수 있는 낭만시대 음악과 달리 바로크나 현음은 자기가 열심히 파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데, 난 아주 유명한 작품이 아닌 이상 별로 찾아보질 않았다. 단적으로 난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이번 오페라를 보고 나서 검색해보다가 처음 알게 됐다.


내가 현음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보체크와 라이만의 메데아와 보면서였다. 아 물론 보체크는 현음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좀 더 앞으로 돌아가면 벤저민의 Written on Skin이 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현음 오페라를 샀던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 작품들이 지루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바그너나 푸치니를 좋아하는 것만큼 특별한 감정을 느낀 건 더더욱 아니니까. 내게 현음이란 궁금하고 봐야하는 존재지만 정작 손은 잘 안 가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분야다.


그래도 이 작품은 오래 전부터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일단 리게티의 오페라라는 점, 그리고 그로테스크해보이는 표지와 제목까지. 그러던 와중에 2014년에 루체른에서 바바라 해니건이 그 유명한 Mysteries of the Macabre를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한 걸 봤다. 그걸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2014년 여름 여행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다. 심지어 카메오로 래틀이 객석에서 출현했다. 그 Late Night 콘서트에서 해니건은 리게티의 루마니아 협주곡도 지휘하며 현음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뽐냈다. 그 때부터 리게티가 참 재밌는 작곡가라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찾아듣진 않았습니다.


해니건의 아리아를 듣고 나서 위대한 죽음(그랑 마카브르, Le Grand Macabre)를 얼른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DVD로 빌린 것도 있지만 블루레이로 사도 되지 않을까 해서 세일할 때 샀던 것 같다. 제목은 프랑스어지만 초연은 스톡홀름 왕립오페라 의뢰라 스웨덴어였고 이후에 이런저런 언어로 번역해서 공연하다가 이 공연은 영어로 공연했다. 그러고보니 리세우 영상을 많이 봤는데 정작 리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위대한 죽음은 리게티의 유일한 오페라로, 줄거리가 궁금하다면 위키를 검색해보자. 사실 딱히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게 없긴 하다. 짧게 요약하면 네크로차르라는 놈이 나타나서 "내가 인간에게 죽음을 선사하겠다!"는데 정작 사람들은 "어 그래? 재밌겠넼ㅋㅋㅋㅋ"이랄까. 네크로-차르가 혼자 지구 멸망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동안 남들은 그저 웃고 떠들 뿐이다. 그렇게 종말이 찾아오나 싶더니 결국 다들 무덤에서 일어나 낄낄댄다. "우리 죽은 거 맞음?? -아니 술 마시고 싶은 거 보니까 살아있는듯ㅋㅋㅋㅋㅋㅋ"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등장 인물들끼리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만들지 않고 독립된 에피소드의 느낌을 준다. 술 주정뱅이, 색욕광 커플, 팸돔/맬섭 커플,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연상시키는 정치인 두명, 멍청한 왕자. 이야기는 어디로 튈 지 모르고 무슨 미치광이 같은 일이 일어날 지 예상을 거부한다.


리게티의 음악을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재미있다'일 것이다. 리게티의 비교적 후기작인 이 오페라에선 정말 모든 종류의 음악을 다 나온다. 여기에 자동차 경적 소리, 종이 구기는 소리 등 온갖 생활소음을 오케스트라 타악기로 쓴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라이만 오페라가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ㄷㄷ"이라면 리게티 오페라는 "이거 뭐얔ㅋㅋㅋㅋㅋ"에 가깝다. 처음 피에트가 등장할 때 인물을 묘사하는 바순의 소리부터 너무 코믹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작곡하면서 분명 어떻게 써야 관객들이 웃을까를 고민했을 거다. 자동차 경적 전주곡, 초인종 전주곡. 여기에 온갖가지 패러디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디에스 이레 그레고리안 성가를 사용하고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 등을 패러디 하고 스콧 조플린의 엔터테이너도 비꼬아버린다. 여튼 패러디가 아주 많이 쓰이는데, 내가 그냥 듣는 것만으로 알아차린 게 거의 없는 건 분명 리게티가 정말 잘 꼬아놨기 때문일 테다. 내가 막귀라니 엉엉엉

이런 이유로 오페라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극이나 음악이나 누가 더 또라이같은 지 경쟁하고 있다. '죽음의 미스테리'로 유명한 비밀경찰 게포포의 아리아가 음악적인 똘끼를 한껏 발휘한다면 극에서는 고고 왕자와 두 명의 정치인이 코미디를 한다. 2막은 두 정치인이 A에서 Z까지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욕설 배틀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아주 가관이다. 고고 왕자가 정치인 사퇴를 안 받아주다가 밥 차려주니까 "이제 먹을 식사가 나왔으니가 너희들 사임받아줄께 ㅂㅂ"하는 장면도 마하고니의 흥망성쇠를 보는 느낌이다. 


가수들의 노래도 괜찮다. 바바라 해니건의 분량이 조금 적은 건 아쉽지만, 모든 가수들이 이 괴상한 오페라에서 상당히 분발하고 있다. 지휘를 맡은 미하엘 보더Michael Boder는 라이만 메데아 초연도 맡았던 지휘자인데 현대 오페라 전문인가보다. 유튭에 있는 래틀의 해니건 반주를 생각하면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오페라를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건 보더가 이 작품의 괴상한 매력을 잘 포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 가수 중에 네크로차르를 맡은 가수가 영어 발음이 좀 구리다. 사실 네크로차르가 이름에 비해 비중이 큰 건 아니다. 


다만 라 푸라의 연출은 조금 아쉽다. 분명 라 푸라는 기술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거뒀다. 르파주가 메트 반지에서 기계 장치에 3D 프로젝션할 수 있다고 자랑 아닌 자랑 했던 것에 비하면 라 푸라는 기술 자체에 연출이 매몰되지 않고 연출을 위해 기술을 활용하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사실 기술력 자체도 르파주의 엑스 마키나보다 라 푸라가 좋지 않을까. 라 푸라는 진격의 거인에 나올 것만 같은 거대 여인상을 무대로 활용한다. 여기에 온갖 프로젝션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근데 뭐 이런 걸로 감탄하기는 시대가 벌써 5년이나 지났잖아? 메이킹필름에 나오는 맥북이랑 아이맥이 구 시대의 유물 느낌을 준다.

컨셉 자체는 '위대한 죽음'을 보쉬의 지옥도 처럼 인체 각 부분을 분할하는 것이다. 종말이 다가올 때 가장 두려운 것은 육체적인 고통, 즉 육체 자체에 완전히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대 역시 여인의 신체를 활용한 것이고 모든 인물들이 인체의 부분으로 비유된다. 종말을 생각하는 네크로차르는 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피에트는 지방, 색욕광 커플은 근육, 두 정치인은 정맥과 동맥, 고고 왕자는 심장, 게포포는 림프절로 비유된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로 보이긴 한다. 이 정도로 작품 전체에 논리적이고 강렬한 비유를 관통시킨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이야기를 더 꼬아버린다는 것이다. 위대한 죽음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리브레토의 의미를 파악하는 동시에 라 푸라의 새로운 알레고리 역시 이해해야하는 셈이다. 예컨데 1막 2장에서 점성술사와 그의 부인이 변태행위를 할 때, 이걸 작가가 왜 넣었을까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왜 여기서 점성술사는 우리 몸에 필수적인 장기를 표현하고 부인은 피부로 표현됐을까를 고민해야한다. 왜 저렇게 비유했지?도 어렵지만 저렇게 비유했을 때 이 장면이 어떻게 다르게 읽힐 수 있지?는 더 어려운 문제다. 라 푸라의 비유가 정말 작품에 완벽하게 입혀졌다면 그들의 해석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번 건 너무 나선 것 같다. 거기다 솔직히 다큐보기 전까지는 의상이 무슨 컨셉인지 전혀 몰랐어.... 이렇게 또 연출 막눈 인증합니다ㅜㅜ 작품의 그로테스크함과 이 컨셉의 시각적 그로테스크함이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해석은 아니라고 평가하겠다.

아 그래도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 하나는 상당히 훌륭했다. 라 푸라는 처음 시작에서 실제 현실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주며 어떤 여자가 지저분한 집에서 TV보면서 음식 먹다가 갑자기 체했는지 죽을 것 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통받는 여자의 모습이 곧 무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이 다가오는 가 싶더니, 결국 오페라 인물들이 살아나니 이 바깥의 여자도 화장실 물을 내리면서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다. 원래  이 오페라는 마치 스트라빈스키 난봉꾼의 행각처럼 마지막에 등장인물 단체로 등장해서 "죽음 걱정하지 말고 재밌게 사세요ㅋㅋㅋ"라고 노래하는 황당한 결말로 끝난다. 돈 조반니 엿 먹으라는 것 같은 이러한 결말 구조로 극은 한없이 가벼워지는데, 결국 영상 속 여자의 고통이 죽음이 아니라 그저 하찮은 급똥일 뿐이었다는 것과 완벽하게 맞붙는다.


2시간 정도의 오페라와 30여분 정도의 연출팀 인터뷰, 그리고 6분 정도의 지휘자 인터뷰가 있다. 연출 인터뷰에서 다른 연출들이 보통 작품 자체의 메시지를 많이 설명해주는데 반해 라 푸라는 이 기괴한 무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신들의 의상 컨셉은 무엇이고 어떤 예술작품에 영감을 받았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라 푸라의 무대가 기술적으로 놀라운 면이 많으니까 열심히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정작 내가 궁금한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다른 코멘트가 없어서 아쉬웠다. 반면 보더의 인터뷰는 짧지만 유익하다.


한국어 자막이 엉망이다. 가사 대부분을 아주 짧게 요약하는 못된 버릇은 다른 영상에서도 나타나는 거지만 여기선 좀 심하다. 거기다가 진짜 말도 안되는 오역이 있는데, '그가 죽으면'을 '내가 죽으면'이라고 번역해놓질 않나, "I would plunge the whole world into damnation if only I could be assured it would get rid of her!"를 "널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파괴하겠어!"라고 번역해놨다. 반대잖아 임맠ㅋㅋㅋㅋㅋ 성질이 뻗쳐서 그냥 영어 자막으로 봤다. 아마 그 뒤로도 한국어 자막으로 봤으면 재밌는 오역이 더 나왔을 것 같다. 자막 누가 만들었는지 안 써져있더라. 확실히 한국어 자막 달려나오기 시작한 초창기 블루레이는 자막 퀄리티가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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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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