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오페라의 밋밋한 연주.


일단 나도 몰랐던 점 하나. Mussorgsky(Мусоргский)의 표준 표기는 무소르그스키가 아니라 무소륵스키다. 표기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무소륵스키의 대표작 중 하나인 Khovanshchina(Хованщина)의 올바른 표기법은 호반시치나가 아니라 '호반시나'다. щ라는 하나의 자음을 shch로 풀어써서 생긴 일. 실제 발음은 и에 강세가 있고 첫 모음 о가 강세가 없는 음이라 '하반시나'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보리스 고두노프'도 '바리스 고두노프'에 가깝게 발음한다. 


보리스 고두노프에 꽂힌 건 코플런드의 책에서 보리스 고두노프가 음악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마침 국립오페라단이 올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오 보리스 고두노프 소식 좀 올렸다가 말도 안되는 멍청한 키배에 휘말렸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나지만 마음 수련하고 있다. 하 이 공연은 도대체 얼마나 좋으려고 벌써부터 나를 시련에 들게 하시나이까....


이제 클갤 공인 국오 광팬 Da로서 예습은 일찍부터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러시아에 꽂혀서 언젠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가서 1,2주라도 살다 오는 걸 버킷 리스트에 넣어놨다. 아 그냥 생각나는 김에 글을 쓰자면, 마린스키의 일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충 요약하면 2월 한달 동안 프스코프의 처녀, 오네긴, 코, 리골레토, 초연작 하나, 살로메, 나사의 회전, 마술 피리,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루슬란과 류드밀라, 이발사, 보리스 고두노프, 신작 오페라 하나 더, 욜란타, 이고르 공, 가면 무도회, 돈 카를로, 헨젤과 그레텔, 카르멘, 눈 처녀, 반지 사이클, 호반시나, 아이다를 올린다. 이게 다 딱 2월 한달 간만 올리는 거인데 26편이다. 게르기에프가 반지 사이클을 5일 동안 하는데 중간 쉬는 날짜에 호반시나를 올린다. 거기다 루블 화 환율도 패대기쳐진 상태라 제일 비싼 좌석이 우리돈 6만원 남짓. 한번에 여러 작품 돌리는 메트나 빈 슈타츠오퍼도 결국 주역 가수들 스케줄 맞추기 위해서 한 작품의 공연 기간을 밀집 시킬 수밖에 없는데 마린스키는 그런 거 없다. 거의 내가 블루레이 장에서 오페라 골라보는 수준으로 매일 오페라가 달라진다. 여기가 천국이지 어디가 또 천국이겠습니까ㅠㅠ 


잡썰이 길어졌다. 마린스키의 일정을 보면서 느낀 건 러시아 오페라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가이다. 차이콥스키,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오페라에 얼마나 쟁쟁한 작곡가들이 많은가. 그런데 작품의 퀄리티에 비해 영상물이나 음반이 희귀한 편이다. 그나마 오네긴의 경우 영상물이 순풍순풍 잘 나오는 편이지만 음반도 별로 안나오는 편이다. 

가장 음반 녹음이 많이 남은 러시아 오페라는 오네긴이 아니라 고두노프라고 한다. 공연 횟수는 물론 오네긴이 단연 러시아 레퍼토리 중 1위를 차지한다. 이 이야기를 하니 샤이보이가 카라얀과 아바도가 모두 녹음을 남긴 러시아 레퍼토리이지 않냐고 하니 그제서야 이 작품의 위치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보리스 고두노프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이 작품은 상당히 독특한 구조의 오페라다. 일단 제목은 보리스 고두노프이지만, 정작 보리스의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다. 초판본의 경우에도 1막 1장과 2막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1막 2장과 4막 1장의 비중 역시 크지 않다. 개정판으로 가면 이 비중은 더 줄어든다. 추가되는 폴란드 막은 참칭자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막에서도 그나마 등장하던 1장이 삭제되고 보리스가 죽고 난 다음의 상황이 추가된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줄거리를 핵심만 짧게 요약해보겠다. 

배경: 1589년 차르 표트르 1세가 요절했는데 후계자가 없음. 그래서 외척인 보리스를 차르로 추대하려 함. 

1막 1장 (개정판 프롤로그 1장) 노보데비치 장면: 경찰과 귀족들이 백성들보고 보리스를 차르로 추대하도록 노래하게 겁박하고 사람들은 이를 따름.

1막 2장 (개정판 프롤로그 2장) 대관식 장면: 보리스가 차르를 받아들임.

2막 1장 (개정판 1막 1장) 수도실 장면: 노승 피멘이 젊은 그리고리에게 역사를 읊어주며 표트르1세의 동생 드미트리가 어릴 적 살해당했다는 말을 함. 드미트리의 출생년도가 자기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은 그리고리는 자신이 드미트리 행세를 해 참칭하기로 함.

2막 2장 (개정판 1막 2장) 여관 장면: 참칭자가 리투아니아로 도망치다가 경찰한테 걸릴뻔 하는데 잘 도망침. 참고로 그리고리가 외국으로 튀는 이유는 외국 군대를 얻기 위해서.

3막 (개정판 2막) 크렘린 장면: 슈이스키 공작이 보리스에게 참칭자 드미트리가 나타났다고 말하자 보리스는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며 드미트리를 제대로 죽였던 게 맞냐고 되물음.

[개정판 3막 폴란드 장면]: 나도 아직 안봐서 모름. 뭐 폴란드 군대를 얻으려는 참칭자와 차르 부인이 되보려는 마리나,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를 물리치고 싶어하는 란고니 세명이서 밀당하다가 결국 힘을 합친다는 이야기.

4막 1장 (개정판 삭제) 성 바실리 장면: 사람들이 못 살겠다고 데모함. 아이들이 백치를 괴롭히는 와중에 보리스 등장. 백치가 보리스에게 왈 "쟤네들 다 죽여주세요! 니가 드미트리 죽였던 것 처럼요". 백치의 운명은 여러분의 상상에.

4막 2장 (개정판 4막 1장) : 참칭자가 모스크바에 다가오니 귀족들 회의. 그런데 보리스는 이미 자신이 죽였던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공포에 미쳐있음. 자기 아들에게 차르를 물려준다고 하고 죽음. 

[개정판 4막 2장]: 역시나 안봐서 모름. 민중들이 보리스 까는 합창을 하고 드미트리가 돌아온다는 이야기.


상당히 골때리는 이야기인데 역사적 고증이 비슷한 내용이 많다. 가짜 드미트리가 수도원에 보내졌다가 소문을 듣고 참칭하기로 한 것, 폴란드에 가서 폴란드 귀족의 딸인 마리나와 결혼한 것, 결국 드미트리의 군대가 승리한 것 모두 사실이다. 관련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다면 나무위키 항목을 살펴보면 좋다. 네 제가 바로 나무위키 충입니다. 참고로 저 가짜 드미트리 이야기는 저 뒤로 두 번이나 더 생긴다.   


음악의 스타일 역시 상당히 독특하다. 무소륵스키 특유의 대담한 화성이 돋보이며 당시에는 까였던 투박한 관현악법 역시 독특한 매력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1막 (혹은 개정판 프롤로그) 2장 대관식 장면은 음악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면이다.


난 여태까지 보리스 고두노프의 특징에는 이런 화성적 독특함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라우트 음악사에도 그 부분이 가장 강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역사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 자체는 국민악파로서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던가.


작품을 다시 바라보면서 내가 아주 중요한 걸 놓쳤구나 싶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서사 진행 방식은 매우 뚜렷하게 바그너적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2막 1장 수도실 장면을 보자. 피멘이 열심히 역사를 지루하리 만큼 열심히 읊어준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를 베이스 혼자서 열심히 읊어주다니, 이거 완전 파르지팔 아닌가요? 이 외에 여러가지 바그너스러운 특징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아리아다운 노래가 별로 없으며 선율을 열심히 부르는 사람은 주로 합창단이라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독백은 아리아가 아니라 바그너 풍 모놀로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하는 건, 보리스 고두노프의 초판본이 1869년에 완성되었고 개정판이 1872년, 초연이 1874년이라는 점이다. 파르지팔은 커녕 반지보다도 일찍 초연됐다. 차이콥스키 오네긴 초연이 1879년에 초연되었고, 베르디 아이다가 1871년 초연됐다. 그리고 바그너의 명가수가 초연된 것이 고두노프의 완성 바로 전 해인 1868년이다. 


바그너나 다른 오페라와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독창이 있는 비중있는 등장인물의 수가 작품의 길이에 비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직접 세보자. 1. 보리스 고두노프 2. 고두노프 딸내미 3. 피멘, 4. 그리고리, 5. 바를람 6. 슈이스키 7. 백치 8. 고두노프 아들내미 (비중이 좀 애매하다). 이게 초판본 이야기고, 개정판이 되면 마리나와 란고니라는 중요한 역할이 추가되고 유모와 여관 주인까지도 노래를 잘해야한다. 여기서 언급한 인물은 아리아 혹은 중요한 독창이 나오는 배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냥 혼자 나와서 몇마디 노래하는 사람들까지 더 하면 4명 정도는 더 추가해야한다. 탄호이저나 로엔그린을 다 세보면 물론 만만치 않게 많겠지만 걔네는 3시간이 넘잖아. 이 오페라는 초판본 기준 2시간 20분 정도다. 


인물들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등장하며 모두들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 중 많은 내용이 왜 나오는지, 작품의 큰 플롯과 왜 연관이 있는지 불명확하다. 이 오페라에서 제일 씐나는 노래인 바를람의 노래 역시 왜 이 대목에서 이 사람이 이반 뇌제 때의 이야기를 푸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바그너의 작품이 대체로 모든 노래가 플롯의 진행과 밀접하게 붙어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무소륵스키는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플롯은 산재되어있고 인물들은 각자의 고통을 이야기 한다. 고두노프 딸내미가 자기 약혼자 죽었다고 징징대는 노래 역시 딱 그런 부분이다. 막의 시작부터 저런 노래를 부르길래 난 약혼자가 죽은 게 무슨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되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거 없다.

별 생각없이 유튭 떠돌다가 본 영상. 러시아 오페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술주정뱅이 노래의 맛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아저씨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공연에서도 바를람 역을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가장 많이 녹음된 작품일 지언정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네긴은 바리톤, 소프라노, 테너 한 명씩에 뭐 인심써서 그레민 공작 역 베이스 까지만 제대로 캐스팅하면 나머지는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런데 보리스에서는 제대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상당히 여럿 필요하다. 


여기서 코플런드의 말을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어느 개인의 몫이 아니라 합창단이라고 봐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합창단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은 당장 떠오르는 예시로 베르디의 맥베스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맥베스에는 명확한 주인공들이 있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렇지 않다. 마치 콜라주 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덧붙여나가는 이 이야기 안에서 합창단이 노래하는 러시아의 민중들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개정판에서 합창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피날레를 붙임으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아 물론 전 아직 개정판을 못 봤습니다만....


자 이제서야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가수의 비중이 몰빵되어있지 않고 분산되어있는 경우 극장 가수진이 얼마나 두텁냐가 결국 공연의 퀄리티를 결정한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가수들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테다. 요즘 손꼽을 만한 바그너 바리톤 마르쿠스 아이헤Markus Eiche가 내가 앞에서 중요한 역할이라고 카운트 하지도 않은 셸칼로프를 맡았으며 슈이스키 역에는 역시 뛰어난 슈필테너 게르하르트 지겔Gerhard Siegel이 맡았다. 아리아 한번 부르고 그 뒤로 나오는지 기억도 안 나는 고두노프 딸래미는 요즘 나름 잘가나는 소프라노 에리 나카무라Eri Nakamura가 맡았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온갖 엑스트라를 다맡는 테너 케빈 코너스Kevin Conners가 백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럼에도 몇몇 중요한 역할은 동유럽 가수를 불러다 썼다. 보리스 고두노프 역의 알렉산더 침발류크Alexander Tsymbalyuk, 피멘 역의 아나톨리 코체르가Anatoli Kotscherga, 그리고리 역의 세르게이 스코로호도프Sergei Skorokhodov다. 피멘과 그리고리의 노래는 상당히 괜찮은데 보리스는 타이틀 롤의 포스가 잘 안나긴 한다. 목소리나 스타일이나 미하일 페트렌코 하위 호환 느낌이다.  


이렇게 괜찮은 가수진을 갖췄는데도 오페라가 제대로 못 나아가는 건 순전히 합창단의 파워가 약하기 때문이다. 1막 내내 극을 이끌어나가야할 합창단의 노래가 답답하기 그지 없다. 나가노의 지휘는 범생이 같이 무난하며 적당히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내려하는 것 같은데,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응당 기대하는 폭발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나가노가 진은숙 오페라에서 괜찮다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보리스 고두노프는 정말 참담한 수준이다. 그냥 못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재미없게 한다는 인상을 준다.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어떠한 흥분도 느끼기 어렵다. 내가 게르기에프 음반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보리스 고두노프가 이렇게 재미없는 음악이었나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오페라를 본 지 1주일이 다 되가는 지금 세부적인 부분을 다시 짚어내긴 어렵지만, 참으로 밋밋한 연주였다.


오페라 도살자로 유명한 칼릭시토 비에이토가 연출을 맡았다. 사실 이 블루레이는 예전에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고 이번이 두 번째 보는 거라 별 감흥은 없었다. 비에이토의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전막 영상을 본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카르멘은 몇몇 장면만 보고 전막은 안 본 걸로 기억한다. 1막의 시작은 상당히 괜찮다. 현대 경찰관들이 민중들을 억압하고, 푸틴, 아베, 카메론, 부시 등 정치인의 얼굴이 붙은 팻말을 들게 한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안개로만 가득 찬 텅빈 무대를 연기로 채우지 못하고 모호하게 흘러간다. 4막 끝에 참칭자가 나타나 보리스의 자식을 죽이는 연출은 서사적인 약점을 채워주는 장치였다. 초판본에는 참칭자가 모스크바에 입성하는 이야기가 안 나오기 때문에  참칭자는 원래 2막 끝나고 퇴근해도 괜찮다. 하지만 또 1막에서 강조한 민중의 고통은 애매하게 사라지고 보리스 개인의 비극만 강조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초판본의 성격이 그런 것도 있지만. 보리스 역 가수가 극을 이끌어갈만한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도 연출이 먹히지 않은데 일조했다.


나가노의 지휘 때문에 추천 목록에 들기는 어렵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나가노가 지휘한 것보다 훨씬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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