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네 - 베르테르 (2010년 파리 오페라)

카우프만의, 카우프만에 의한, 카우프만 얼빠들을 위한 오페라.

2016년의 마지막 날을 카우프만으로 마무리 했다. 원래 도이체 오퍼 리엔치를 보려고 했지만 블루레이가 인식이 안되길래…. 집에 남아있는 블루레이 중 안 본걸 집어들었다.

사놓고 오랫 동안 안 본 블루레이가 몇개 있다. 유니버설에서 나온 작품들을 dvd로 보고 나서 블루레이 세일할 때 또 산 경우다. 이게 애매한 게 dvd는 보통 라이센스 반을 만들면서 한글 자막이 들어가는데 블루레이는 라이센스 반이 없다. 그래서 한글 자막이냐 화질이냐 양자택일을 강요당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우프만의 얼빠로서 베르테르 블루레이를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이미 dvd로 한번 봤지만 블루레이로 한번 더 볼 요량으로 구입했다.

작품 이야기부터 해보자. 일단 귀찮은 표기법 부터 이야기하자면 forvo.com에 올라온 Werther의 독일어 발음은 ‘베아터’ 혹은 ‘베어터’에 가깝다. 최근 들어서는 출판사에서는 원어와 비슷하다고 ‘베르터’를 밀고 있는데 이 이름의 어원은 wert + hari 라고 한다. wert를 베르트라고 읽진 않잖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국립국어원에서도 Werther의 표기는 ‘베르테르’로 못 박혀있다. 그런데 오페라로 오면 문제가 참 단순해진다. 프랑스어로 Werther를 ‘베르테르’ 에 가깝게 읽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베르테르라고 당당히 써도 아무 문제 없는 셈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오페라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대체로 원작을 아주 유명한 작품으로 골랐다는 점이다. 구노의 대표작 파우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마스네의 마농, 베르테르, 돈 키호테, 토마의 미뇽과 햄릿 중 원작의 명성을 뛰어넘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비제의 카르멘이 메리메의 원작을 뛰어넘는 명성을 얻었을 뿐이다. 하나 더 껴주면 마스네의 타이스 정도?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원작 빨 좀 받는 오페라라는 거다. 마스네한테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마스네 오페라를 본 게 마농과 베르테르 두 개인데, 둘 다 원작을 다 읽어본 뒤에 오페라를 봤다. 과연 이 작품들이 원작 빨이 없었다면 지금의 공연 횟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좋게 말하면 이 작곡가들이 리브레토에 쓸 원작을 잘 고르는 거고, 그런 유명한 작품을 오페라로 옮길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여튼 베르테르 같은 불후의 명작을 오페라로 옮긴 마스네의 용기 만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원작이 유명하고 또 이야기의 갈등 구조도 확실하기 때문에 오페라 역시 쉽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오페라는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다. 빈 슈타츠오퍼 영상이랑 이 영상을 이미 한번 보고 세번째 보는 건데도 이 작품이 비슷한 시대 다른 프랑스 오페라에 비해서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예컨데 샤를로테와 베르테르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어보이는 알베르의 비중은 크지 않고 오히려 샤를로테의 여동생인 소피의 파트가 상당히 많다든가, 작품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아이들의 노엘 노래, 그리고 항상 하고 싶은 말을 시 처럼 읊어대는 베르테르까지. 짧은 말로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오페라는 절대 아니다.

여기에 마스네의 음악 역시 동시대(베르테르의 초연은 1892년 빈)의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에 비하면 별로 선율적이지 않다. 물론 Pourquoi me réveiller 라는 기가 막힌 아리아가 있긴 하지만 음악적으로 아리아다운 아리아 보다 연극적인 장면들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관현악법의 색채도 좀 독특한데, 3막의 샤를로테 독백 장면에서 알토 색소폰 오블리가토를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이 작품이 테너 오페라라는 점이다. 1막 부터 4막 까지 끊임없이 노래해야하며 배역의 비중 역시 압도적이다. 매 막마다 아리아를 하나씩 뽑아줘야하고 4막은 막 전체가 듀엣이다. 여기에 샤를로테를 제외하면 중요한 역할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테너 오페라인 안드레아 셰니에나 오텔로, 투란도트와 비교해보았을 때도 베르테르에선 여주와 바리톤의 비중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곧 카우프만의 오페라다. 카우프만이 가장 잘 부르는 배역이고 이 배역을 가장 잘 부르는 가수가 카우프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이다. 특히나 베누아 자쿠의 이 아름다운 프로덕션은 카우프만을 위한 맞춤 옷과도 같다.

이 영상을 보고도 카우프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이먼 킨리사이드의 대표적인 입덕 영상이 토마 햄릿 공연인 것 처럼 카우프만의 입덕 영상을 딱 하나 꼽자면 바로 이 베르테르라고 생각한다.

(https://ximo.files.wordpress.com/2010/01/kaufmann-werther-2.jpg)

일단 잘 생겼다. 오페라를 보면서 가수 외모는 신경쓰지도 않고 언급하지도 않으려고 하지만 좀 솔직해져야겠다. 카우프만은 남자가 봐도 도가 지나치게 멋있다. 얼마 전 운명의 힘에서 요상한 가발을 봐서 더욱 그렇겠지만, 좀 심하게 잘 생겼다. 이 공연을 이야기하면서 카우프만의 외양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건 기만이며 리뷰어로서 자격 미달이다. 자쿠의 무대는 한폭의 그림 같은데, 그 그림 같은 무대에서 그림 같은 인간이 튀어 나온다. 처음에는 이상한 선글라스를 끼고 나와서 도대체 연출가는 무슨 생각인거지 원망스럽다가도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 아 이건 카우프만의 등장에 관객들이 눈이 부시지 않게 도와주는 장치였구나 깨닫게 된다. 비정상적으로 잘 생긴 카우프만을 위한 적당한 핸디캡임. 이미 한번 본 영상이지만 그래도 또 감탄한다. 노래를 부를 때도 잘 생겼다. 고음 내지를 때 찡그리는 것 마저 멋있다. 의상과 헤어 스타일 역시 카우프만의 단점을 완벽히 커버하면서 잘생김을 빛나게 한다. 여기에 아직 주름과 흰머리도 별로 없을 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꽃미남 시절…. 어떤 순간에서도 카우프만의 눈빛은 관객의 환상을 깨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대 위에 있는 저 사람은 틀림 없는 베르테르다. 

항상 카우프만을 빨면서도 “주의 - 가수가 보이는 것보다 노래를 잘 합니다”라며 잘 생긴건 덤이고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빠는 거라고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이제 솔직해져야할 것 같다. 카우프만보다 베르테르를 더 잘 노래하는 가수가 나올 가능성보다 이 정도로 잘 생긴 가수가 나올 확률이 더 낮을 것 같다. 

아 물론 노래도 잘 합니다. 잘 하죠. 저도 클덕으로서 양심이 있지 못하는 가수를 빨겠습니까… 

1막에서 등장해서 자연 예찬 노래를 부를 때 태양에 감탄하는 대목에 순간 조명이 밝게 빛나는데, 진짜 목소리로 태양 소환하신다. 베르테르가 3막 아리아를 부를 때 카메라가 샤를로테를 잡아주는데 조명효과와 카우프만의 노래 때문에 소피 코크가 초절정미인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생긴다.

예전 카우프만 리사이틀 보고와서 쓴 글에도 언급했지만, 난 카우프만 특유의 그 흔들리는 느낌을 사랑한다. 왜 그 임동혁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는데 평론가들이 어렵게 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거였나. 쉽게쉽게 해치우는 것보다 자신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더 감동적이라는 거다. 카우프만이 클라이막스에서 내지르는 소리가 딱 그렇다. 여기에 그 어두운 목소리에는 이미 말 못할 고통이 담겨 있다. 자신의 감정을 명확한 말로 표현하지 않는 젊은 시인에게 이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장착됐을 때 시인의 이야기는 더 이상 뜬구름잡는 소리가 아니라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된다.

치명적인 사랑을 하는 인간은 오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이다. 특히나 프랑스 오페라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카르멘의 동 조제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메오, 마농의 데 그리외, 삼손과 달릴라의 삼손을 예로 들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1막에서부터 자신이 ㅈㅁ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베르테르는 1막에서 알베르를 만나는 순간 이 사랑의 끝을,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이제부터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테르는 오페라 내내 고통받아야만 한다. 테너 중에 가장 마조히즘 적인 인물이 아닐까도 싶다. 가수는 그 슬픔에 먹히지 않으면서 샤를로테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인간으로 보여야한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에 분노해서 샤를로테에게 자기 감정을 쏟아내는 순간 지나가는 흔한 한남1이 되버린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뮤지컬 베르테르가 딱 그 꼴이었다. 으으 개극혐….

카우프만은 이 줄타기를 해낸다. 일단 잘 생겼고 표정도 이미 베르테르로 변신 끝났다. 우울하고 힘들어보이지만, 남들에겐 매력적으로 보이는 정도의 멜랑콜리를 훌륭하게 표현해낸다. 여기에 목소리까지 특유의 억울한 느낌이 살아난다. 프랑스어 딕션 역시 프랑스 인들 사이에 껴있지만 부족함이 없다.

카우프만 빠심을 잠시 접어두고. 샤를로테를 맡은 소피 코크Sophie Koch 역시 날아다닌다. 장미의 기사 옥타비안으로만 익숙하지만 역시 국적 버프는 속일 수 없다. 아주 안정적이며 분명한 프랑스어 발음까지 모범적인 샤를로테를 노래한다. 3막 독백 장면 순간에서만큼은 카우프만의 원맨쇼를 분명하게 가로채간다. 베르테르가 Je vous aime 에서 드디어 Je t’aime로 바꿔 말하며 들이대는 3막의 듀엣에서도 넘어갈듯 말듯 훌륭한 밀당을 하면서 카우프만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치열한 듀엣을 들려준다.

샤를로테의 남편 알베르는 루도빅 테지에가 맡았다. 배역 비중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냥 평범한 모습이다. 소피 역도 샤를로테와 대비되는 상큼상큼한 모습을 보여주며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해낸다.

미셸 플라송의 지휘는 작품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확실히 만들어간다. 전반적으로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가는가 싶다가도 3,4막에서 갈등이 고조될때 불같은 면모를 뽐낸다.

베누아 자쿠Benoît Jaqout는 담라우 라 트라비아타 연출을 맡기도 했다. 말그대로 회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무대를 보여준다. 솅크 식 자연주의와는 달리 회화주의라고 표현해야할까. 무대의 벽과 바닥은 실제를 모방하지 않고 분명하게 회화를 모방한다. 이런 연출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카우프만과 코흐 등 가수들이 무대에서 충분히 맡은 바 역할을 해줬다. 그리고 조명의 활용이 굉장히 사실적이라 정말 햇살 가득한 회화를 보는 듯 하다. 앞서 언급한 3막 베르테르가 아리아를 부를 때 코크를 잡아주는 장면에서 햇빛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역광을 쓰며 ‘여신짤의 정석’을 보여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장면 하나는 진짜 인정합니다.

 바로 이 아리아다.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아리아 + 자쿠의 조명 + 코크의 인생샷 + 카우프만의 노래. 내한 리사이틀 때도 이 곡을 불렀는데 프랑스 아리아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베누아 자쿠는 라 트라비아타와 마찬가지로 카메라 감독 까지 맡았는데, 소격효과를 아주 많이 활용한다. 오케스트라 피트 + 가수가 한 샷에 보이는 측면샷은 물론이고 커튼 뒤에서 준비하고 있는 가수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꽤나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부가영상은 없고 대신 부클릿 내용이 알차다. 너무 알차서 한 문장을 읽으면서 사전을 몇번이나 찾아봤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젊은 시인을 위한 거대한 레퀴엠이며 베르테르의 '독실함'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자세히 설명해주는데 10%도 이해 못한 것 같다. 제 머리가 이렇게 멍청합니다ㅜㅜ

카우프만 얼빠면 오페라 내내 헠헠 거리면서 감상할 수 있다. 영상으로 남겨준 파리 오페라 방향으로 절이라도 한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