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의 메소드 연기를 이을 메소드 연출.

Britten - Peter Grimes (2013 Aldeburgh Beach)


"해변의 아인슈타인"도 아니고 "해변의 그라임스"라니. 영국놈들의 새로운 도전이다. 브레겐츠와 베로나, 오랑주 페스티벌 등 수많은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이 있지만 이번 시도는 좀 특별하다. 베로나와 오랑주 등은 야외 오페라이긴 하지만 엄연히 무대가 있고 객석이 있으며 이를 둘러썬 벽면이 있는 공연장이다. 브레겐츠 역시 호수의 무대를 바라보는 상당히 넓은 부채꼴 계단형 객석이 있다. 

하지만 올드버러 해변엔 아무것도 없다. 진짜 해변 위에 무대를 설치하고 객석을 설치한 게 전부다. 그리고 브레겐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 요소를 갖췄다. 바로 바다의 파도다.


바다는 피터 그라임스에서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것도 4개의 바다 간주곡이다. 좀더 넓혀보면, 피터 그라임스와 음악적으로 가장 닮은 빌리 버드Billy Budd 역시 피터 그라임스 처럼 바다와 배의 이야기다. 바다를 더 넓혀보면 물의 도시 베니스가 배경인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이 있으며 강으로는 도요새의 강Curlew River이 있고 호수 역시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라임스 초연은 1945년 6월 7일로 "종전 시대 최고의 영국 오페라"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다. 6월 7일이면 우리가 보기엔 전쟁 중이지만 독일 항복이 5월 8일이었으니 종전 시대가 맞다. 사실 "영국 오페라"라는 범위에 "종전 시대"라는 단서까지 덧붙인 건 딱히 좋은 평가는 아닌 것 같지 말입니다. 브리튼 이전에 퍼셀 말고 영국에 오페라라는 게 있긴 했나요??? 


피터 그라임스는 브리튼의 첫 오페라며 동시에 가장 성공작이기도 하다. 테너 역할인 타이틀 롤의 초연은 물론 피터 피어스가 맡았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어부 피터 그라임스가 함께 일하던 어린 조수가 사고사한 것 때문에 마을에서 재판을 받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결국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였다고 판결이 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라임스가 소년을 죽게 만들었다고 수근댄다. 그런 그라임스를 옹호하는 건 오로지 교사이자 미망인인 엘렌 뿐. 이제 어린 조수를 쓰지 말라고 하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라임스는 또 구빈원에서 조수를 영입한다. 결국 돈이 마을 사람들의 가십을 없애고, 자신이 엘렌과 결혼해서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은 채로 말이다. 그라임스는 아이를 혹독하게 굴리며 학대하는데 이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그라임스를 추궁하러 쫓아온다. 하지만 그라임스는 그 와중에도 고기떼를 찾아 급하게 출항하려고 하는데, 서두르다가 아이가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한다. 며칠간 잠적하지만 사실을 알게된 엘렌과 그라임스의 친구가 그라임스를 찾아서 그에게 배를 타고 나가서 수장시키라고 조언한다. 그라임스는 이를 따르고 다음날 배 하나가 침몰했다더라라는 뉴스가 마을에 전해지는 것으로 오페라가 끝난다. 

전반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이 어떻게 삐뚤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고, 자신의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수렁에 빠지는 주인공의 모습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피터 그라임스 만큼이나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여러가지 모습도 아주 비중있게 다뤄진다. 


올드버러 페스티벌은 브리튼이 남친 피어스와 함께 1948년에 시작한 음악제로 현재까지 계속되며 브리튼과 다른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공연한다. 올드버러 페스티벌은 당연히 브리튼의 여러 작품을 공연했지만 여태 피터 그라임스는 한번도 올리지 못했다. 루크레시아의 강간Rape of Lucretia은 ENO가 올드버러 페스티벌의 스네이프 몰팅 홀에와서 공연한 것이 영상으로도 발매되었지만 피터 그라임스 같은 큰 작품을 올리기엔 공연장의 규모가 너무 작았던 것이다.


2013년 브리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드버러 페스티벌에서는 피터 그라임스를 올리기로 한다. 이걸 올릴 공연장이 없으니 선택한 게 해변에다가 무대를 짓는 것이었다. 객석도 설치한 야외 공연이었지만 처음 계획에서부터 영화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지구 반대편 방구석에 쳐박혀 있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참 좋은 자세다.


영상화가 아니라 영화화라는 데 주목해야한다. 실제 공연의 영화화라는 점에서 체스키 쿠름로프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와 닮았지만, 언급했 듯 저 작품에서는 중간에 무대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실제 공연은 아니다. 하지만 이 그라임스는 실제로 관객들을 데리고 전작품을 공연했고 그 공연을 영화 필름으로 직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연 영상'에 가깝긴 하지만 영화 필름과 영화 화면비를 사용했다는 점과 중간중간 간주곡에서 여러가지 영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공연 녹화와는 차이점이 있다. 거기에 1막 폭풍우가 몰려오는 장면에서 하늘을 CG처리한 점도 이 작품을 '영화'라고 부를 만한 이유라할 수 있다.


피터 그라임스를 진짜 바닷가에서 공연하겠다는 건 메소드 연기의 접근과 같은 셈이다. 파도 소리와 바다 바람과 함께 공연하면 오페라 속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이 쉬운 건 사실이겠지. 거기다 브리튼이 피터 그라임스를 작곡할 때 떠올렸던 해변 마을의 모습이 고향인 서포크였으니까 "여기가 브리튼의 마을입니까"라는 마음가짐을 갖기도 좋다. 그렇지만 연출적으로 별다른 건 없다. 브레겐츠 처럼 화려한 무대 장치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베로나 처럼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무대의 변환이 어려우니 모든 무대 배경이 동일하다는 것 역시 오페라 연출에서는 큰 제약이고 조명 효과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메소드 연기의 신화에 회의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이 연출이 고증적으로 훌륭하다는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고싶은 마음은 없다. 물론 저 자리에서 오페라를 직접 봤다면 아주 독특한 경험이었겠지만, 파도 소리 좀 들어간다고 컴퓨터 앞에서 바다를 느끼긴 어렵지 않겠는가. 거기다 바다 간주곡에 바다 영상 보여준다고 해서 "어머나 바다로 가버렷!"할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연출적으로 분명 압도적인 장면들이 있다. 연출가는 횡으로 넓게 퍼진 무대에서 합창단을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이 점이 부각되는게 3막에서 마을 사람들이 피터 그라임스 잡으러 가자고 노래하는 장면이다. 마침 유튜브 트레일러가 딱 이 장면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레 넓게 퍼져서 굳건한 자세로 분노를 표현할 때 카메라가 로우 앵글 트럭truck(카메라를 각도 고정한 채 횡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합창단원의 얼굴을 잡는다. 내가 평생 메트 로우 앵글 트럭 샷을 까왔지만 이 순간 느꼈다. 문제는 메트였지 로우 트럭이 아니었구나. 로우 앵글은 차캤습니다ㅠㅠ 


이 공연이 놀라운 건 오히려 음악적인 내용이다. 야외 공연이라는 특성상 음향이 구릴 수밖에 없는데, 가수들의 소리가 마치 무향실에서 녹음한 것 마냥 건조하게 들린다. 그래서 흡사 뮤지컬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하지만 이 단점을 꽤나 오히려 영리하게 이용했다. 가수들이 성량에 신경쓰지 않고 텍스트를 연극적으로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듯 편하게 노래하며 발음도 언제나 명확하게 난다는 점은 브리튼 오페라에서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특히나 합창단의 가사 처리가 명확하며 조금 건조한 듯 통통 튀는 리듬감이 작품과 괜찮게 맞아 떨어진다. 합창은 오페라 노스 합창단과 길드홀 음악원 학생들이 맡았다.


지휘를 맡은 스튜어트 베드포드Steuart Bedford는 브리튼 전문가다. 찾아보니 내가 처음 본 브리튼 오페라인 나사의 회전 영상물도 이 사람 지휘더라. 반주를 맡은 브리튼-피어스 오케스트라는 올드버러 페스티벌에서 구성하는 학생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인 것 같은데 반주를 참 잘한다. 폭풍우 장면에서 신경질적인 폭발력은 감탄이 나올 만한 부분이었다. 사실 해변에다가 오케스트라까지 세울 순 없어서 레코딩해서 틀었다더라. 지휘자는 무대 앞에다가 진짜 구덩이를 파서 프롬프터 박스마냥 만들어서 지휘했다고... 


오케나 합창단이나 준비가 철저하다는 게 느껴진다.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평이하지만 앙상블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이런 작품에서는 개개인의 역량보다 결국 얼마나 준비를 많이했느냐가 공연의 성패를 가른다. 결국 아주 성공적인 오페라를 만들었다. 


부가 영상은 조금 아쉬운 편이다. 준비 과정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체로 축약해서 이야기해준다. 재밌는 점은 영화로 찍으면서 저탄소배출로 펀딩을 받은 이야기를 꽤 길게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영화 찍는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면 지원금을 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영화 찍을 때 카풀도 열심히하고 물통도 재활용하고 종이 대신에 태블릿 쓰고 필름도 디지털로 쓰고 등등 노력했다고 한다. 이게 나한테도 낯선 이야기가 아닌게 영국에서 있는 학회에서 Greener Conference라고 학회에 올 때 탄소배출을 줄여서 오면 장학금 준댄다ㅋㅋㅋㅋㅋㅋㅋ 각자 어떻게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학회장에 왔는지 말하고 사람들이 투표해서 뽑는다고... ㅅㅂ 영국놈이 타가겠지... 남들은 일단 시도도 못 해볼텐데ㅋㅋㅋㅋ 예제로 독일에서 자전거 타고 오기! 이런 게 있다. 독일에서 런던까지 자전거 타고 가면 이미 페북 스타 될듯 ^^ 난 비행기 타야하니까 안될거야 흑흑. 학회 이름 달아서 학교 근처에 나무 가득 심으면 인정해 주려나.... 잡소린데 부가영상에 그린 무비가 나오길래 재밌어서 주절거렸다. 


영화 버전이라 제끼려다가 므드트 아트하우스 세일에서 떨이로 팔길래 샀었다. 왜 떨이로 팔렸는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놓치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는데 음반쪽이 상은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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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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