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의 역작. 게르기예프가 잘 해주나 가수가 망쳤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인(Les Troyens, 트로이 사람들)은 아마 프랑스 작곡가가 쓴 그랑 오페라 중 현재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몇 안 되는 작품일 테다. 동시에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작품 중 파우스트의 겁벌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트로이 사람들>이란 표기도 쓰는 것 같은데 제목이 복수형이라고 우리말도 복수로 옮기는 건 좀 촌스럽다.

모든 그랑 오페라가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긴 하지만 트로이인은 특히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단 서구 문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거대한 스케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트로이 목마가 등장한다. 발할라의 무지개 다리가 직접 등장하는 걸 기대하는 관객은 없지만 트로이 목마는 이상하게도 거대한 목마가 진짜 무대 위에서 등장하길 기대하게 한다. 아마 극 무대 위에 등장할 수 있는 상징물 중 가장 거대한 물체가 바로 트로이 목마가 아닐까 싶다. 잡썰이지만 학교에서 한 학생 단체가 트로이 뮤지컬을 계획하면서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트로이 목마 만드는 데 썼었는데, 결국 그 목마는 의뢰를 받은 학생의 졸업 작품이 되어 건담 머리를 한 채로 높이 제한 때문에 공연장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쩌면 목마는 트로이 이야기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야기의 너무나 확고한 상징이며 많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대목이지만 정작 훌륭한 극이 되기 위해서 공을 들여야하는 장면은 아니기 때문이다.


트로이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트로이 전쟁 중 그리스 군의 가짜 회군 부터 시작해 트로이가 멸망하는 1, 2막이 있고 그 뒤에는 에네아스가 트로이를 탈출하여 카르타고로 도망치다 디도를 만나는 3, 4, 5막이 있다. 1부인 1, 2막에서는 카산드라와 그의 연인인 코로에부스가 주요 역할을 맡고 에네아스의 비중은 크지 않다가 2부에 가서는 에네아스와 디도가 주연이 된다. 

이렇게 거대한 스케일 때문에 베를리오즈의 생전에는 단 한번도 전막이 공연된 적이 없다. 1858년에 완성되었지만 1863년 초연에는 2부에 해당하는 3,4,5막만 공연됐으며 1부는 작곡가 사후 10년이 지난 1879년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됐다. 1부와 2부를 모두 공연한 건 1890년 칼스루에 궁정 극장이 처음이었는데,  그마저도 1부와 2부를 이틀로 쪼개어 공연했다. 처음으로 베를리오즈의 의도대로 1부와 2부를 하룻밤에 공연한 것은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였는데 그게 작곡가의 서거 100주년인 1969년이었으니 제대로 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게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한번 부활한 오페라가 표준 레퍼토리의 한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주는 매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랑 오페라답게 합창단을 전면에 내세우는 장면이 아주 많은데 이 때 뿜어내는 에너지가 보통 수준이 아니다. 합창단의 성부를 쪼개 정신없이 노래하는 장면은 조증을 의심하게 만들 만큼 활력의 과잉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베를리오즈가 평생 셰익스피어 빠였다는 걸 증명하듯 극적인 장면들의 처리가 매우 뛰어나다. 라오콘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이나 트로이가 몰락하는 2막의 마지막 장면은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합창단의 노래와 극이 모두 혼연일체가 된다.


처음 트로이인을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파우스트의 겁벌을 듣고 나서 다시 보니 베를리오즈의 스타일이라는 게 글자로 새겨놓은 듯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나 합창 곡들은 두 작품에서 빼와 적당히 섞어도 전혀 위화감이 안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오케스트라 반주의 독특한 리듬 패턴이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그랑 오페라 답게 발레와 합창, 오케스트라 간주곡이 자주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억지스러운 부분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도 뛰어난 점이다.


연출은 라 푸라 델스 바우스가 맡았다. 라 푸라의 연출을 항상 높게 평가해왔지만 어째 최근들어 보는 것마다 영 마음에 안 든다. 발렌시아 반지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제외하면 대단하다라고 말할 만한 작품이 없다. 아, 영상은 아니고 직접 본 에네스쿠 외디프 연출 같은 경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지만. 독특한 의상 컨셉과 전반적인 아이디어가 잘 어울릴 때도 있지만 아쉬울 때도 많다.

라 푸라는 트로이인을 현대 혹은 미래의 이야기로 옮긴다. 트로이인은 대부분 스포츠용 개인보호 장구를 장착하거나 우주복을 입고 있다. 트로이 목마는 그리스인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담고 있다. 카르타고의 궁전은 입자가속기를 모델로 했으며 친환경적인 기술이 발달한 미래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에네아스는 이탈리아 대신 화성으로 떠난다.

문명 간의 만남과 결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지만 시각적인 디자인이 좀 구리다. 무대에서 영상활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선구적인 라 푸라이지만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형상화한 트로이인의 시각 디자인은 2017년에 보기에는 너무 촌스럽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는 대체로 예술적 수명이 짧기 마련이다. 2009년이면 아이폰 3GS가 막 발매되던 해다. 여기에 문명을 나타내는 의상들 역시 너무 과장되었고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라 푸라한테 예쁜 걸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 건 더욱더 적응하기 힘들다. 트로이 문명 컨셉을 쓰면서 일단 무리수를 한번 두고 거기다가 카르타고 문명까지 색다른 컨셉을 만들려니 무리수가 너무 겹친 느낌이랄까.


반면 게르기예프와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상당히 훌륭하다 (참고로 Gergiev의 올바른 표기는 게르기'에'프가 아니라 게르기'예'프다. 프로코피예프와 마찬가지).  게르기예프가 딱히 대단한 지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 컨셉으로 사는 요즘은 더더욱 정 떨어지는 존재지만 이 영상을 보면서 상당히 놀랐다.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파트에 적절히 포인트를 주면서 극에 베를리오즈 특유의 활력을 많이 집어넣어줬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대충할 것 같은 게르기예프의 이미지와 반대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상당히 많은 리허설을 한 느낌이다. 최근 결성된 단체답게 겉보기에도 단원들의 평균 연령이 많이 낮은데 앙상블은 수준급이다. 종종 나오는 목관 솔로도 아주 뛰어나다. 요즘 잘나가는 오보이스트인 나바로나 오르테 쿠에로를 비롯해 스페인 주자 목관 주자들이 유럽 명문 오케 수석들을 먹고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모두 아쉽다. 일단 주인공인 랜스 라이언Rance Ryan은 21세기에 나온 반지 사이클 영상 중 세 개에서 지크프리트를 해먹었고 바이로이트까지 먹은 지크프리트 전문 가수다. 노래하는 게 좀 바보같게 들려서 바이로이트에서 직접 볼 때도 관객들이 엄청 부잉을 했던 가수인데 나는 영상으로 자주 보다보니 정이 들어버린 케이스다. 지크프리트가 좀 바보 같은 면이 있어도 그냥 귀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정이 든 나도 베를리오즈를 그런 목소리로 부르는 건 참아주기가 힘들더라. 지크프리트는 자주 불러서 프레이징이라도 어느 정도 나오는데 에네아스는 노래라고 하기 힘들 지경. 지크프리트를 연기할 때도 항상 물약먹고 브륀힐데를 잊어버린 넋나간 모습에만 최적화된 연기실력을 보여주었는데 그 연기력이 여기서라고 고쳐질 리가 없다. 캐나다 출신이지만 프랑스어 딕션도 딱히 뛰어나진 않다.


디도 역으로 나오는 다니엘라 바르첼로나Daniella Barcellona 는 랜스 라이언에 비하면 훨씬 괜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딕션이다. 애초에 프랑스인 주역 가수가 한 명도 없는 캐스팅이라 딱히 네이티브랑 비교될 상황도 아닌데 바르첼로나는 심각하게 발음을 못한다. 이탈리아어에 ã 같은 발음이 없어서 그런 지 아예 흉내도 못 낸다. 이러면 또 딕션 나치 처럼 들리겠지만 특히 프랑스 오페라에서 딕션이 구린 노래를 듣는 건 고역이다. 음악에 집중함 -> 딕션이 하나도 안 들림 ->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음 -> 집중이 안됨 -> 노래를 안 들음 -> 오페라 감상이 안됨 -> 그날 기분이 나쁨


카산드라 역의 엘리사베테 마토스Elisabete Matos가 안정적인 노래로 무대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고 나르발 역의 슈테판 밀링Stephen Milling도 큰 비중은 아니지만 맡은 부분을 잘 소화해내고 이오파스 역할의 에릭 퀴틀러Eric Cutler도 아리아를 훌륭히 소화해준다. 



제발 프랑스 오페라에는 프랑스어 할 줄 아는 사람 좀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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