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진에서 활약하는 두 가수.


오랜만에 로시니를 잡았다. 로시니 오페라 영상물이 발매되는 것이 많아서 봐도봐도 쌓여있는 느낌이다. 시지스몬도는 아트하우스에서 발매한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 블루레이 박스 세트에 포함되어있는 타이틀이다. 


시지스몬도는 로시니의 전성기가 막 꽃피기 전의 실험적인 작품이다. 부클릿에 따르면 큰 성공을 거둔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뒤에 발표한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와 <이탈리아의 터키인>이 실패한 뒤로 딱히 흥행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작곡한 작품이 <시지스몬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시지스몬도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시지스몬도는 폴란드의 왕이다. 15년 전에 신하의 모함을 듣고 자기의 부인인 알디미라를 처형했는데 이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상황에 알디미라의 아버지이자 보헤미아의 왕이 폴란드를 쳐들어온다. 테이큰 찍기에 15년은 너무 오래걸린 거 아닙니까 앞날이 깜깜한 폴란드에 구세주가 등장하니, 알디미라랑 똑닮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오페라 관객이라면 당연히 눈치채듯 이 사람 알디미라 본인 맞다.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일부러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자신이 알디미라 행세를 하면 보헤미아 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겠냐며 시지스몬도를 설득한다. 시지스몬도도 옳다구나 좋아하는데 알디미라 닮은 외모에 진심으로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니 폴란드의 총리인 라디슬라오다. 바로 15년 전에 알디미라를 음해한 장본인이다. 자기 누이를 왕비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삼고 있기 때문에 시지스몬도가 가짜인 듯 가짜 아닌 알디미라에게 사랑에 빠지는 걸 못 참고 이 사실을 보헤미아 왕에게 몰래 꼰지른다. 보헤미아 왕이 빡쳐서 난리를 피우지만 알디미라가 "나 진짜 본인 맞음ㅇㅇ"이라면서 라디슬라오가 예전에 써준 공인인증서로 본인인증을 시전하면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아 물론 라디슬라오는 ㅈ된거지. 


무고한 부인이 고통 받다가 돌아온다는 점에서 게노베바 이야기와 비슷한 모티프라할 수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15년은 좀 너무하지 않았냐. 처형 피하고 15년 동안 숨어 살았는데 아직도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미스테리... 진짜 알디미라가 가짜 알디미라인 척 하는데 이 가짜 알디미라를 보고 이 알디미라가 진짜 알디미라인가 가짜 알디미라인가 헷갈려하며 게슈탈트 붕괴를 일으키는 시지스몬도와 라디슬라오의 모습이 포인트다. 


작품의 흥행이 망해서 여기에 나오는 음악을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타>와 <세비야의 이발사>에 재활용했다. 시지스몬도 2막 처음에 나오는 합창이 이발사 1막 서곡 끝나고 나오는 합창이고 바질리오의 '미풍' 아리아에 나오는 술 폰티첼로 음형이 원래는 시지스몬도 1막에서 라디슬라오와 알디미라의 듀엣에 등장한다.

너무나 익숙한 반주


음악은 상당히 흥미롭다. 알디미라의 등장 때가 참 독특한데, 처음 오보에+잉글리시 호른의 조합도 특이한데 여기에 피콜로 앙상블과 번갈아 같은 선율을 주고받는다.


가짜 알디미라의 아빠 역을 맡은 제노비토의 아리아의 시작은 더블 베이스 두 대가 서로 번갈아가며 독주하는 거다. 로시니의 관현악법이 상당히 실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니체티나 벨리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사운드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로시니 크레셴도 패시지들이 많지만 희극이 아니다보니 패터 패시지는 별로 많지 않다. 기교적인 부분이 많이 등장하지만 대놓고 기교자랑 곡이라는 느낌을 주는 부분은 없고 음악 흐름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아리아가 벨 칸토의 전형적인 카바티나-카발레타 형식을 따르는데 음악적인 흐름이 자연스럽고 음악간의 대비도 적절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지휘는 미켈레 마리오티가 맡았다. 내게 마리오티는 그냥 벨 칸토 어느 정도 잘하는 지휘자 정도였는데 이걸 보면서 재평가하게 됐다. 로시니의 리듬을 잘 살리면서 오케스트레이션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거기다 자연스러운 프레이징 처리, 크레셴도를 설계 까지 모두 탁월하다. 마리오티가 지휘한 호수의 여인에서 "전체적인 느낌은 괜찮지만 번뜩이는 순간을 찾아보긴 힘들다"라고 했는데 그건 메트 오케스트라와 마리오티가 잘 맞지 않기 때문인 듯 하다. 


여기에 주역 두 가수가 엄청난 기량을 뽐낸다. 공교롭게도 두 가수 모두 내가 바로 앞 두 글에서 아쉬워했던 가수들이다. 다니엘라 바르첼로나Daniella Barcellona는 트로이인에서 절망적인 불어 딕션을 선보였고 올가 페레탸트코Olga Peretyatko는 차르의 신부에서 타이틀롤 치고 좀 무게감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원래 가장 잘하는 분야가 로시니고 이 공연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바르첼로나는 어둡고 두터운 메조 소리를 충분히 뽑아내면서 안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가수이기 때문에 바지 역할에 특히 제격이다. 트로이인에서 약점이었던 딕션도 당연히 걱정할 필요 없고, 콜로라투라 패시지도 잘 소화해낸다. 디도나토 처럼 인상적인 목소리는 아니지만 모범적인 메조라고 할 수 있다.


페레탸트코는 내가 마틸데 디 샤브란에서 반했던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고음은 깔끔하고 정확하며 가사 전달도 확실하며 노래에 감정도 잘 실려있다. 위에서 라디슬라오와 다투는 듀엣을 보면 가사를 얼마나 맛깔나게 처리하는지 알 수 있다. 어째 러시아어 딕션보다 이탈리아어 딕션이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거기다 연기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아 물론 거기다 예쁘기까지 합니다. 



메이킹 영상에서 인터뷰할 때 이탈리아어로 인터뷰한다. 뭐 아무리 오페라 가수라도 이탈리아어로 인터뷰하는 게 쉬운 편은 아닐 텐데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오래했나 찾아봤다. 그러다 알게된 건데 미켈레 마리오티랑 부부였네ㅋㅋㅋㅋㅋㅋㅋ 이 시대의 참된 로시니 커플 인정합니다. 부부 세트로 내한 한번 해주시죠ㅠㅠ


반면 이 두 명 만큼이나 중요한 배역인 라디슬라오를 맡은 안토니오 시라구사Antonio Siragusa는 많이 아쉽다. 레제로 테너이고 목소리도 약간 비열한 느낌이 나서 잘 어울릴 것도 같지만 발성이 불안정하다. 고음만 되면 포먼트가 깨지는 게 느껴져 거슬렸다. 음표를 소화해내는 것만 해도 살짝 벅찬 느낌이다. 나머지 두 명이 워낙 잘해주다보니 더 비교가 되는 것도 크다. 


연출을 맡은 다미아노 미키엘레토Damiano Michieletto는 이탈리아인 연출 치고 꽤나 적극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1막을 정신병원으로 설정해 시지스몬도를 정신병 환자로 만들어놓아 그가 알디미라를 만났을 대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2막 끝에서는 시지스몬도가 정신을 차리고 반대로 라디슬라오가 정신병원에 끌려간다는 연출도 극의 내용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장치였다. 가수들의 연기나 동선도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로시니 오페라에서 마리오티, 바르첼로나, 페레탸트코는 보증수표라고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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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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