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이 맥베스를 그렇게 했다 이거죠?


지난 토요일, 조씨고아를 관람했다. 서울에서 작품을 먼저 관람한 지인들이 모두 강력 추천하길래 취소표를 모니터링하다가 마침 붙어있는 두자리를 구해서 볼 수 있었다. 대전에서 표가 매진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방심했다 큰일날 뻔 했다.


보면서 너무 많이 울었다. 손수건이라도 챙겨갈 걸... 눈물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 콧물을 주체할 수 없으니 괴로웠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편이라 예전엔 오케 공연을 보러다니면서도 손수건을 꼭 챙겨갔는데 요즘은 인생의 괴로움이 줄어들어서인지 공연이 구려서인지 눈물 흘릴 일이 없어 안 챙긴다. 방심했다 큰일났다.

연애의 일환으로 연극을 종종 보러다녔었다. 작년 쯤 대학로에 일이 있어 몇번 찾아갈 일이 있었는데 거리에 붙어있는 수많은 연극 포스터를 보면서 이렇게 많은 작품이 공연되는데 한번도 안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러갔던 작품이 체호프의 <챠이카>였다. 그것 말고도 충무아트센터에서 했던 <레드>는 아주 인상깊게 봤고, 예술의전당에서한 <환도열차>도 재미있게 봤다. 연극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자람의 <이방인의 노래>를 보고 감명받아 천안까지 가서 <억척가>를 보았다. 억척가를 보면서도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여자친구는 이방인의 노래에서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름 연극을 조금씩은 찾아보고 다녔지만 크게 내상을 입은 것이 바로 <엘리펀트 송>이었다. 글을 쓰려다가 힘이 빠져서 쓰지도 못했다. 극장을 나와서 우리 둘은 혹시나 상대방이 재밌게 보진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가 정말 형편없는 공연이었다는 걸로 동의했다. 나름 인정받은 외국 희곡을 원작으로 삼았고 꽤 큰 극단인것 같아 기대했는데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때 까지만 해도 "재미없는 연극"이라는 게 뭔지 상상을 못했다. 연극을 보고 후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을 부숴줬다.


그게 우리가 같이 본 마지막 연극이었다. 그러다 조씨고아가 정말로 좋다길래, 대전까지 내려와달라는 부탁을 해 같이 보게 된 것이다. 


무릇 공연을 보는 인간이라면 예습을 하는 것이 지당한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조사도 안 하고 갔다. 그냥 지인이 '원나라 시대 작품이 원작이다'라고 말해준 것과 공연장에서 리플릿에 적힌 시놉시스를 읽은 것이 다였다. 프로그램북도 다 팔리고 없더라.


공연은 원작, 연출, 배우의 3박자가 잘 어우러졌다. 무엇보다 조씨고아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동양적 비극 구성에 압도됐다. 정쟁으로 멸족의 위기에 처한 조씨 집안, 그 집안의 막 태어난 아이 조씨고아, 조씨 집안 사람의 간청으로 조씨고아를 돌보게 되는 정영. 수많은 사람들이 정영에게 조씨고아를 부탁하며 목숨을 내놓고 정영은 결국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대신 죽게 한다.


자식을 희생시키는 부모라는 소재에서 이미 극단적이다. 이 부분에선 메데아를 연상케한다. 이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이게 말이 되는 플롯인가 의심했다. 기우였다. 운명은 정영의 목을 조금씩 죄여온다. 조씨고아를 찾아내기 위해 생후 한달 미만의 신생아를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하는, 고대에나 가능했을 법한 말도 안되는 잔혹한 계책은 이 플롯을 완성하는 캡스톤이었다.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대신 죽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살리자고 조씨고아를 죽일 수 없다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정영의 목을 착실하게 조여오는 비극의 힘을 보며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인간한테 이런 짐을 지우는 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작품은 지극히 동양적이다. 동양에선 결백하면 자결하고 서양에선 죄를 지었을 때 자결한다는 (신빙성은 둘째치고) 말이 있지 않는가. 동양권에서 자결이란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위대한 수단이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라는 말에, 등장인물들은 목숨으로 대답한다. 단체로 미친 게 틀림없는데, 그 광기의 소용돌이가 '존나 있어보인다'. 남의 여자랑 재미보다가 ㅈ된 조조를 살리려고 화살받이가 된 전위나, 합비에서 손권 살리려고 수십 군데 상처를 입었다는 주태나, 장차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군주가 될 아이를 살리기 위해 혼자 진삼국무쌍을 찍은 조운이나, 동양에서 존나 있어보이려면 목숨을 내놓는 건 기본이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2부에서도 이어진다. 정영은 성인이 된 조씨고아에게 그 동안의 비밀을 말하지만 조씨고아는 차마 믿지 못한다. 이 때 보통 "물증"을 내놓는 것이 이야기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칼조각이 좀 대세더라. 뭐 깨진 노퉁이라든지, 고주몽이 아빠 찾을 때 쓰라고 반쪼각낸 칼이라든지.. 그런데 조씨고아에서는 역시 하드코어하게 간다. 우리에게 합리적이고 간편한 물증 따윈 있을 수가 없어!


내 마음대로 동양과 서양의 비교를 하다보면 분명 틀린 개념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이 작품은 동양적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다. 정승집 대감이 밥이랑 술 한 상 차려줬다고 화살 맞아가면서 수레를 끄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있나. 암살자 주제에 대감이 책 읽는 소리 듣고 감명받아 나라의 큰 일꾼을 죽일 순 없다며 돌에다가 자기 머리를 박아죽는 사람은 또 어디있고. 충, 의, 효가 인간의 모든 것인 때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으리 으리 하다. 



고선웅의 연출은 호흡이 훌륭했다. 레치타티보 처럼 배경설명을 빠르게 치고나가기도 하며 군더더기는 생략했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하지 않고 보여주려하지 않고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갈 여백을 준 것도 훌륭했다. 군데군데 유머가 효과적이었고 특히 2부 처음 조씨고아의 오도방정은 극의 긴장도를 적절히 조절해주는 탁월한 장치였다.

마지막 연출 역시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으리와 복수라는 거대 담론에 한 인간의 인생이 망가지는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배우들의 연기는 내가 딱히 할 말이 없다. 다들 잘하더라. 주인공 정영을 맡은 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정영의 부인 역을 맡은 배우도 뛰어났다. 거참 사람이 소리지르고 절규를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그 분노와 감정을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지 잘 알더라. 그래서 내 눈물콧물이.... 커튼콜 때도 그 표정으로 나오는데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 돌아와서 수미상관. 이 연출이 베르디 맥베스를 그렇게 말아먹었던 거죠? 작품을 보니 같은 사람이 연출을 했다는 건 알겠다. 맥베스에 나온 파편적인 아이디어들이 조씨고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자신이 각색하고 호흡을 완벽히 조절할 수 있는 연극 연출과 오페라 연출이 다르다는 건 뭐 길게 설명할 것도 없지만, 듣기로는 최소한의 성실성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 맥베스 공연 얼마 전에도 국립극단과 다른 작품을 올렸으니. 입금을 못 받았나 흥미를 못 붙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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